소설리스트

54화 독이 든 성배 (2) (54/341)

독이 든 성배 (2)

파리, 팔레 르와얄 저택.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혁명군의 아지트이자 계몽주의자들의 거점.

수백 명이 족히 들어갈 만큼 거대하고 궁전에 버금갈 만큼 웅장한 이 저택의 주인, 오를레앙 대공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모두 그의 응접실 탁자에 놓여 있는 화려하게 치장된 편지 때문이었다.

[친애하는 사촌, 오를레앙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왕위를 순순히 양보하겠다고?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르의 왕이라는 그 지존의 자리를? 그것도 루이 그 자신을 가장 괴롭힌 오를레앙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루이 오귀스트.”

편지가 도착한 새벽녘부터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편지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던 오를레앙 대공은 낮게 읊조렸다.

“네놈, 대체 나에게 뭘 원하는 거냔 말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가 놓인 탁자를 빙빙 돌며 이어서 말했다.

왕위라, 좋다.

일평생 이 날만을 위해 살아온 오를레앙 아니던가.

혁명세력을 후원하고, 시민들을 선동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려 권위를 실추시키고, 귀족들과 사조직을 형성해 물밑에서 왕을 견제 한 오를레앙이다.

그러나 그 일평생 심혈을 기울인 결과가 실제로 다가오자, 오를레앙은 끝없는 의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함정인가?

함정이라면 어떤 방식의 함정인가?

이 함정에 빠진다면 내게는 어떤 실이 들어오는가?

설마 암살인가?

암살이라면 어떤?

독살? 교수형? 아니면 총으로 저격인가?

의심에 가득 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마 남의 자리를 탐내면서 평생을 정치적 술수에 바친 탓이리라.

그러나 그 모든 수를 몇 번 씩이나 다시 계산하고 계산해 봐도 오를레앙에게는 실이 될 것이 하나 없었다.

왕 루이 16세를 흔들고 있는 혁명세력은, 오를레앙을 자신들의 후원자이자 친구로 여기고 있으며.

귀족과 사제세력 또한 오를레앙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류가 더 많았다.

국민의회에서 오를레앙 밑에 있는 사제들이 오를레앙의 명령에 따라 깽판을 쳐놓은 전적도 있지 않은가.

군대? 군대라, 그래 군대 하나는 루이가 자신보다 가진 게 많았다. 왕실 용병 연대는 프랑스 최고의 전투부대니까.

그런데 오를레앙 자신이 왕이 된다면, 마지막 남은 군대마저 오를레앙에게 충성을 바칠 것이다.

혁명세력의 지지와 귀족 및 사제들의 지지. 군대의 충성까지 얻는다면 오를레앙은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될 터다.

물론 자신이 왕이 되고 나서는 왕권을 휘두르는데 걸리적거릴 혁명세력을 한 줌도 남지 않게 갈아버려야겠지만 왕까지 이렇게 정치적 암투로 보내버린 자신이 그것 하나 못할까.

“하, 평등한 필리프(Philippe Egalite)니 뭐니. 사춘기 철부지 꼬마들도 아니고 웃기는군.”

오를레앙은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읊조렸다.

한참을 또 고민하던 오를레앙은 마침내 뜻을 정했다. 새벽녘 시작 된 고민이 태양이 하늘 정 가운데를 지날 때 돼서야 끝났다.

“그래, 이건 오를레앙, 내가 이루어낸 결과다. 내 모든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는 것이리라.”

까짓껏 독이 좀 묻어 있으면 어떠랴, 조금 귀찮아질 뿐이지.

어차피 퇴위한 루이도, 혁명세력도 ‘정리’할 때 어느 정도의 독도 같이 정리하면 될 것이다.

오를레앙 대공은 그날, 베르사유로 편지를 붙였다.

왕위 계승을 받아들이는 편지를.

***

휘이익

“이야, 이거 월척인데요, 폐하?”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편지를 루이 16세가 잘 보이게끔 흔들었다.

“오를레앙 그 놈이야 수십 년간 짐만 죽도록 괴롭혔으니 왕위를 주겠다는 말이 얼마나 달갑겠나. 눈이 홱 돌아가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지. 그래, 재무총감. 이제 짐이 뭘 어떻게 하면 좋겠나?”

루이는 씩 웃으면서 답했다.

음. 엿을 먹여줄 기본적인 준비는 끝냈지만 이걸로는 좀 부족할 거 같은데.

그 뭐랄까, 사람의 기분을 정말 좆같이 만들려면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 딱, 바닥으로 떨어뜨려 줘야 하지 않나.

기껏 한타 잘 열어서 싸움 이겼는데 적 한 놈의 백도어에 기지가 터져나갈 때처럼,

송편을 딱 집어먹었는데 안에 콩이 들어있을 때처럼 말이지.

어이 오를레앙, 절대왕권 그런 건 없다! 니가 원한 왕위! 니가 원한 왕좌! 니가 실추시킨 권위! 다 달게 받아라.

나는 루이 16세를 보고 말했다.

“···보통 즉위식을 어디서 열던 가요?”

“랭스 성당에서 열걸세.”

“오호 그렇단 말이지요? 으히히힣.”

“···재무총감이 무슨 술수를 꾸미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짐이 그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 상당히 달갑구만.”

루이의 말에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이었다.

“랭스에서 파리,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 다시 오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정도 걸리는 지 아십니까?”

“음. 짐이 즉위식을 했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약 이틀정도 걸린다고 보면 되네. 즉위식이라는 게 참 까다로운 게 많아서 말이네.”

“이틀, 이틀이라.”

충분하네. 이틀 동안 왕이라는 자리를 폭탄을 칭칭 둘러서 건네주마.

아니 그냥 폭탄이 아니라 핵폭탄으로.

그러려면 일단 함정카드는 최대한 많이 설치해놓는 게 좋겠지.

***

루이 16세와의 대면이 끝난 후, 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찾아갔다.

“왕비님, 며칠 만에 다시 뵙게 됐군요.”

“그렇네요, 재무총감. 본녀의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어 고마워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렇게 말한 뒤, 예의 그 기품 있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였다.

“본녀에게 재무총감이 왔다는 건, 지난번에 약속한 대가를 받으러 오신 거 겠군요.”

“그렇습니다만 왕비님. 제가 받게 될 그 대가를 조금, 바꿔도 되겠습니까.”

“대가를 바꾼다는 건, 무슨 말이신가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답했다.

“왕비님께서 직접 절 지지하시는 것 보다, 사람 한 두 명만 소개시켜주십시오.”

“···사람이라면 어떤?”

“믿을만한 사제를 소개시켜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는 바람잡이가 필요하다. 개혁 같은 기존과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마리는 미간을 좁히면서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미 재무총감은, 시에예스 샤르트르 주교와 친밀한 관계 아니던가요?”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겁니다. 저와 친밀한 사람이 제 정책을 지지해줘봤자 사람들은 ‘끼리끼리 논다’라고 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시에예스 사제님과 친분 있는 사제가 절 지지한다고 말해봤자 똑같을 겁니다.”

왕비님은 전임 재무총감 브리엔 주교 등 걸출한 사제들과 잘 알고 계시는 사이니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나는 뒤이어 덧붙였다.

내말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흠. 재무총감이 그렇게 말씀한다면야, 본녀가 책임지고 수소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비님!”

“뭘요, 남편을 구해주신 것만 해도 제가 다 못 갚을 빚인걸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

“어서 오세요, 재무총감!”

“환대에 감사합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

“하하! 그래요, 무슨 일인데 날 찾아오셨습니까?”

라파예트 사령관은 넉살 좋게 웃고 나와 함께 의자에 앉은 뒤, 말했다.

“플랑드르 용병연대 건에 대해 의논할 게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내 말에 방금 전까지 환했던 라파예트 사령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음.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재무총감.”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복도를 살핀 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아 말했다.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습니까.”

“···폐하께 직접 들었습니다.”

“그렇군요...뭐라고...하시덥니까?”

“플랑드르 용병연대를 베르사유로 부르기로 하셨다더군요.”

“···예?”

라파예트는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폐하가 아니라, 오를레앙 대공이 말입니다.”

“···.”

내 말에 라파예트 사령관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한참을 있다가 다시 날 쳐다보고 말했다.

“오를레앙 대공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오를레앙 대공은 우리 혁명군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한 분이십니다. 그런 사람이 왜···.”

“증거도 있습니다. 오를레앙 대공이 폐하를 부추겼다는 증거지요.”

“솔직한 얘기로는...믿기 힘든 얘기군요. 저는 폐하와도, 오를레앙 대공과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라...”

“믿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만일을 대비해 사령관님이 국민방위대를 단단히 잡아놓으라는 뜻이지. 오를레앙 대공을 쳐라, 뭐 이런 게 아닙니다.”

“만일이라니요, 재무총감.”

“곧, 강도 높은 개혁안이 의회를 통과할 겁니다. 소요사태가 분명히 따라올텐데, 그런 일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령관님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소요사태가 일어날만한 개혁안이라면 무슨?”

“교회의 재산 압수입니다.”

“···일어날만하군요, 총감. 그러나 왕실의 동의 없이는 힘들 텐데요.”

“이미 국왕 폐하와 왕비님과 얘기가 된 내용입니다.”

“허, 대단하시군요. 어떻게···.”

그 순간,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라파예트 사령관은 움찔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누구인가!?”

밖에 있는 사람은 대답했다.

“기욤 재무총감이 불러서 왔습니다.”

이제 라파예트는 날 보고 말했다.

“진짜입니까?”

“예, 괜찮습니다. 들여보내도.”

곧 라파예트가 문을 열고, 밖에 있던 사람이 들어왔다.

사제복을 입고 무뚝뚝한 얼굴을 지닌 서른 남짓의 사내는 자리에 앉아 손을 모아 기도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걱정 마십시오, 사령관님. 우리 혁명군 쪽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라파예트 사령관님. 오툉의 주교,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입니다. 왕비님께서 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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