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3)
“왕비님이 보내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탈레랑 주교는 라파예트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라파예트 사령관께 이미 말했다시피 왕실의 지지는 이미 받아냈고 이 분, 탈레랑 주교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의회 여론을 움직여볼 생각입니다.”
“···재무총감, 나에게 이렇게 모든 패를 까서 보여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라파예트 사령관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다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원래 사업하는 사람은 거짓말 같은 거 하면 큰일 나거든요. 사업은 항상 시이 인용이 중요하다 아입니까 신용이.
“막상 일 터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해드리려면 힘들지 않습니까, 미리미리 어디서 어떻게 폭탄을 터트릴지 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무엇보다 전 라파 예트 사령관님의 눈을 피해 권모술수를 꾸밀 수 있을 만큼 영악하지도 않아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답했다.
“음...”
내 말에 라파예트는 팔짱을 끼고 짧게 신음을 흘렸다.
“아마...지금 당장 시작할 계획은 아닌 듯 싶은데, 재무총감은 일을 치룰 날을 언제정도로 잡고 있습니까?”
음. 그게 맞지.
아마 몇 달간은 좀 잠잠히 있어야할 거다.
이미 이 시대 쪽에서 보면 급진적(?)인 개혁들을 반강제적으로 통과시켰는데, 여기서 또 사고를 거나하게 치면 의회고 뭐고 진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걸.
조삼모사라지만 그래도 가진 걸 한 번에 다 뺏는 거랑 차근차근 뺏어가는 거 랑은 기분이 다르거든.
"당연히 사령관님 말씀대로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거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서너 달 정도 이후 정도에 일으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너 달, 서너 달이라.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국민방위대 개편안을 모두 끝내놔야겠군요.”
“엥, 국민방위대를 또 개편할 이유가 있나요, 사령관님?”
내 말에 라파예트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장교들 중에 탈영자가 속출해서 말입니다. 어느 연대는 연대장, 대대장이 모두 탈영해서 중대장인 중위가 임시 연대장을 맡고 있는 연대도 있더군요. 이름이 니콜라 다부였었나.”
뭐? 중위가 임시 연대장이라니 이게 대체 뭔...
“뿐만 아닙니다. 해군 장교의 7할은 이미 배를 타고 영국이나 스페인, 네덜란 드로 도망친 지 오래라 우리 해군력은 사실상 공중분해 된 수준입니다. 만일 전쟁이라도 나면 상선사관을 모조리 강제로 징집해야 배라도 띄워 볼 수 있겠더군요.”
“···보통 개판이 아니군요.”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런 날 보고 라파예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누구 덕에 그 개판을 겨우 삼, 사 개월 만에 수습하게 되었네요.”
“아..아앗..”
“하하, 됐습니다. 재무총감.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런데...”
요즘 제 사무실에 커피가 다 떨어졌더군요, 앞으로 야근이 참 많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라파예트는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최고급 커피로 채워다 드리겠습니다...”
“기왕이면 디저트도 같이 부탁드립니다, 재무총감님.”
“넵.”
“참고로 전 호박파이를 좋아합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리.
***
“오랜만에 돌아와서는 하신다는 말씀이 안 그래도 모자란 인력을 빼 가신다는 겁니까, 사장님.”
“에이 이제는 다들 노하우도 생겼는데 한 명 없다고 무슨 일 생기지는 않잖아요, 플로리앙 씨.”
하하 왜 그렇게 날 째려보신담.
라파예트 사령관의 간절한 부탁, 아니 협박을 이기지 못한 나는, 오랜만에 파리로 돌아와 이것저것에 손대고 있었다.
커피야 제일 좋은 최고급품으로 주문해 마차에 실어놨고, 남은 건 디저트를 만들 사람뿐인데.
“그러니까, 차라리 사람 한 명을 더 고용하는 거라면 이해라도 하지. 왜 하필 조리장 마리 씨를 뽑아 가시려는 거냐는 말입니다.”
“아아아니 저도 그러고 싶죠, 그런데 도저히 사람이 안구해지는 걸 어떻게 해요. 그리고 마리 씨가 제일 요리를 잘하는 데 당연히 마리 씨를 뽑아가야죠.”
바스티유 요새를 함락시키고 파리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자, 대부분 좀 산다 하는 사람들은 모습을 감추고 섣불리 밖으로 나오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둘의 의견대립은 우습게도 우리 둘이 아니라, 마리 씨를 비롯한 조리원들의 한 마디로 인해 내 승리로 끝나버렸다.
“아유, 나는 좋아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언제 궁전을 가보고 그러겠어요? 호호호.”
“맞아, 맞아. 우리가 뭐 십분 더 일하면 되는 거 아니여요? 우리 몫까지 궁전구경하다 오라고 해요.”
“마리씨, 대신 갔다와서는 우리한테 보고 온 거 다 말해줘야 되는 거 알지?”
5년간 매일 동고동락한 조리원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마리 씨의 베르사유행을 기쁘게 받아 들였다.
결국 플로리앙 씨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고럼 고럼. 내가 막 무리한 부탁을 한 것도 아니잖아. 정의는 승리하는법.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러면 저도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아 네, 뭔데요, 플로리앙 씨.”
“사실 창고에서 예비용 곡물 좀 가져다 썼는데 괜찮겠지요?”
“예? 어, 얼마나 가져다 쓰셨는데요?”
“한...20톤 정도...?”
“···뭐 이상한 곳에 쓴 건 아니죠?”
“그럴리가요. 사장님이 하셨던 것처럼 빈민구제용으로 썼습니다.”
“아, 그런 거야 뭐. 괜찮아요. 난 또 뭐 큰일인가 싶었네.”
나는 손을 몇 번 휘휘 흔들며 말했다.
잠깐만 그러면, 곡물을 또 추가 발주해야 되잖아. 어떻게 된 게 항상 일이 늘어나지?
“음, 아무래도 근시일 내에 한 번 제퍼슨 씨를 찾아 뵈셔야 할 것 같네요. 플로리앙 씨.”
“추가 발주 말이지요? 예 알겠습니다. 계약 조건은 저번과 같이 할까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많···.”
그 순간, 누군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와 플로리앙 씨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동시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뭐 미납한 세금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사장님하고 몇 년을 같이 했는데 당연히 다 냈죠.”
그러면 저 새끼가 왜 여기 왔을까.
“···플로리앙 씨, 잠시 나가주세요.”
***
“재, 재무총감 각하! 오, 오랜만입니다. 하, 하하...”
“···각하라니, 언제부터 절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셨다고 그러십니까?”
내 말에, 사무실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하...”
“각설하고.”
난 사무실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뭐 때문에 오셨습니까? 라부아지에 씨.”
“그, 그것이...”
라부아지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것보다 제가 파리로 온 건 어떻게 아셨답니까?”
아니지. 보나마나 듀퐁 그 녀석이겠구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뭐 그건 됐고, 저한테 뭐 때문에 오셨는 지만 빨리 얘기하고 돌아가시죠. 저도 할 일이 많아서.”
“사, 살려주십시오. 재무총감!”
“예? 제가 저도 모르게 라부아지에 씨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확실히 죽이고 싶었던 적은 많긴 한데, 진짜 실행한 적은 없었는 걸.
라부아지에는 이제 애원하듯 말했다.
“바, 바스티유가 폭도들한테 넘어가고...한 시도 편안하게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길을 나설 때 마다 뒤에 시선들이 박히는 데 ㄱ···.”
“아니, 그걸 왜 저한테 와서 따지십니까? 제가 그 사람들을 사주하기라도 했나요?”
“그, 그건 아닙니다만...”
“다 라부아지에 씨가 하신 일 때문 아닙니까. 왜 저한테 와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지 잘 모르겠군요.”
라부아지에는 흥분해 숨을 헐떡이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자리에 누울 때마다, 생각난단 말이오! 바스티유 요새 사령관의 머리가, 장대에 매달려서 우리 집 앞을 지나던 모습이! 로네이 그 사람, 가끔씩 우리 집에 와서 차를 마시고 가던 사람이었소. 이웃이 하루아침에 그런 꼴을 당했는데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단 말이오!”
아니 씨...뭐 어쩌라고요, 그러니까.
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제가 사악한 연금술사로 보고 로네이라는 사람 머리를 다시 붙여달라는 겁니까?”
“재무총감 각하! 난 살고 싶습니다! 난 로네이 그 사람처럼 장대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단 말이오! 난, 난 법에 따라 세금을 징수했을 뿐이란 말이야!”
“쯧. 그 법이 희대의 악법인 걸 알고서도 했잖습니까.”
“···.”
라부아지에는 내 말을 듣고는 입을 다문 채, 손을 벌벌 떨기만 했다.
한참을 손발을 덜덜 떨던 라부아지에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난 살고 싶소. 제발...제발 방도를 알려주시오, 재무총감...”
이걸 어쩐다.
“···왜 하필 저한테 와서 이러십니까? 콩도르세 후작님한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시고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기, 기욤 드 툴롱, 온 파리 시민들이 콩도르세 후작은 몰라도, 당신 이름은 알고 있소. 당신 말고는 날 비호해줄 사람이 없단 말이오!”
“···파리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안다구요?”
“당연하지! 왕 앞에서도 주둑 들지 않는 혁명의 얼굴, 기욤 드 툴롱. 당신 이름 모르는 파리 시민은 없을 거요! 그러니 제발!”
라부아지에는 거의 오체투지를 하면서 내게 매달렸다.
“···집에 패물이나 금, 은 있습니까?”
“이, 있소. 전부 다 당신한테 가져다 드리리다!”
“아잇 씻팔! 그런 거 안 받는다고!”
사업하면서 검은 돈에 손대면 칼빵 맞기 더해?
라부아지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 그러면?”
“그거 싹 다 곡식으로 바꿔서 파리 시민들에게 뿌리십쇼. 그러면 그나마 목은 보전할 수 있을 테니까.”
내 말에, 라부아지에는 덜덜 떨면서도 연신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이 양반 화학자였지? 오, 오 머리가 핑핑 빠르게 회전하는 게 느껴지는 걸.
“라부아지에 씨. 화학자죠?”
“그, 그렇소.”
“혹시 도로를 확, 빨리 얼릴만한 무언가 만들 수 있습니까?”
“도, 도로를 얼린단 말입니까? 구간은 어느 정도나...”
“랭스에서, 베르사유까지.”
"그런 걸 바로 만들라고 해도..."
"뭐요?"
"무조건 해보이겠습니다, 재무총감 각하!"
빙판길을 지나는 왕의 마차라니, 키야 시간 참 많이 잡아먹겠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