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일고초려
윅슨 출판사는 최근 기존 인원의 반 가까이 되는 인원을 추가로 채용했다.
그것도 대부분 다른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던 경력직 인원들로.
덕분에 기존 직원들은 맡던 업무가 드디어 줄어들게 생겼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엘레나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추가 채용을 준비하는 게 좋겠어요.”
“또? 사람들 뽑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음. 그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요.”
출판사 대표실을 찾은 엘레나.
현재 윅슨 출판사의 대표직을 맡고 있는 클레이는 엘레나의 아버지와 함께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 일을 했던 이였다.
엘레나와는 서로 삼촌과 조카 같은 관계.
그가 엘레나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직 안 읽어 보셨죠?”
엘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클레이의 책상 위에 올렸다.
<마지막 마법사>의 2부 원고였다.
“읽어 보시면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거예요. 저 말고 다른 편집부의 의견도 비슷해요.”
“음. 지금 바로 읽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줄래?”
“그럼요.”
원고를 읽으면 알게 될 거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클레이가 의아한 기색과 함께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경영에 집중하고 있다지만 그 또한 편집자로 활동했던 경력이 족히 20년은 됐다.
물론 아무리 대단한 편집자라도 글이 얼마나 흥행할지를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기껏해야 이 글은 시장에서 먹히겠다, 이 글은 좀 힘들겠다 정도로 느끼는 게 전부.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경우가 있었다.
초반 몇 장만 읽어도, 순식간에 이야기에 몰입시켜 버리는 글.
그 어떤 감 없는 편집자라도 대박을 확신하게 만드는 글.
씰룩-
클레이의 입가가 자신도 모르게 씰룩거렸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어때요?”
“…아!”
엘레나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클레이가 탄성을 뱉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8권에 달하는 분량.
당연히 프린트된 원고도 엄청나게 두꺼웠다.
그걸 모두 읽으려면 하루 가까이가 필요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반 이상을 읽어 내린 후였다.
“내가… 무슨 마법에라도 홀린 거 같군.”
“억지로 그 마법에서 깨게 해 죄송해요. 계속 가만히 놔뒀다가는 퇴근 시간이 다 되신 것도 모르실 거 같아서요.”
“퇴근 시간? 허… 이거 참.”
엘레나의 말에 클레이가 제 손목시계를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걸 본 클레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1부와는 또 다른 글이었어. 같은 글이 맞나 싶을 정도더군.”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긴 했죠.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영웅이 된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니까요.”
<마지막 마법사>의 1부가 개인의 모험담에 가까웠다면, 2부는 이제 영웅이 되어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에 나선 주인공의 모습이 주를 이뤘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략, 처절한 전투, 여러 영웅의 희생 등.
전쟁 도중 주인공이 겪게 되는 위기, 1부에서 자신들의 매력을 톡톡히 보여 주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러 조연 캐릭터의 죽음까지.
격정적인 이야기가 휘몰아치듯 매 순간 독자들의 애간장을 타게 만들고 있었다.
그 탓에 클레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에 빠져들었던 것.
도중에 엘레나가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면 정말로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 내렸을지도 모른다.
“허… 그나저나 참 놀랍단 말이지. 그 짧은 사이에 필력이 엄청 느신 것 같은데.”
“1부도 충분히 좋은 글이었지만 단점이 없던 건 아니었죠. 단지, 그걸 모두 덮을 만큼 장점이 주는 매력이 확실한 글이었던 거고요. 하지만 2부에서는 그런 단점들도 대부분 고치신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 마법사>의 2부를 읽은 지금, 어째서 엘레나가 추가 채용이 필요하다 한 것인지 이해하게 된 클레이였다.
“이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군?”
“네. 물론 1부의 흥행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이번 건 1부와도 비교할 수 없을 거야. 단순히 흥행을 넘어서… 신드롬, 그런 단어가 어울릴지도 모르겠어.”
* * *
“벌써 떠나다니, 아쉽군.”
“조만간 또 보자. 아니면 네가 한국에 놀러 와도 좋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은 쭉 앤디의 집에서 묵었다.
할리우드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니, 거의 일주일 넘게 신세를 진 것.
나중에 앤디가 한국에 놀러 오면 서울식(?) 풀코스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캘리포니아를 떠나 미국 서부의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동양인? 일본? 중국?”
“한국이야.”
“오! 나 한국 알아. 킴종은! 뉴클리어 봄브 맨!”
“음. 그쪽하고는 많이 다른 한국이기는 한데.”
이번에는 고급 호텔이 아니라 여행자들이 다니는 평범한 숙소에 묵어서 그런가.
여행자들이나 현지 사람들과 만나게 될 기회들이 많았다.
특히 카페 같은 데서 혼자 음료를 홀짝이고 있다 보면 말을 거는 여자들이 많았다.
“우진? 발음하기 어렵지는 않네. 혼자 놀러 온 거야?”
“영어를 엄청 잘하네. 미국인이었어? 아, 여행 왔다고. 오늘은 뭐 할 계획인데?”
하지만 기대했던 로맨스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몇 살이야? 동양인들은 너무 어려 보여서 가늠이 잘 안 된단 말이지.”
“으음. 한국 나이로는 20살. 국제 나이로는…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18살.”
“왓?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어린 거였잖아?”
모두가 내 나이를 듣고는 무슨 남동생 보는 것처럼 태도가 바뀐 것.
미국의 성인 기준이 만 18세라고 하긴 하던데, 그래도 완전히 성인 취급을 해 주는 건 아니었나 보다.
사실 미국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도 만 21세 이상부터나 가능하기도 했고.
뭐, 그래도 여행은 그냥 여행 자체로 재미가 있었다.
숙소에서 마주쳐 얘기를 나누다 마음이 맞아 다음 날 관광을 같이했던 사람도 있었고, 시장을 돌아다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는 분이 계셔서 이야기를 나누다 그분 집에 초대받아서 저녁을 함께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3주간의 미국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이, 제이슨에게서 이런 연락이 와 있었다.
[제이슨 - 작가님, 저번에 말씀드렸던 NHM과의 지분 인수 협상 결과입니다. 작가님이 보유하신 데브브라더스 지분을 180억 원에 전량 인수하고 싶다더군요.]
‘달려라, 쿠키’는 출시 이후 스토어 다운로드 1위를 몇 달째 유지하며 대박 모바일 게임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 덕분일까.
데브브라더스에 투자한 지 반년 정도도 지나지 않아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
38억 8천만 원이 180억 원이 됐으니, 400%가 넘는 수익이다.
톡, 토도독-
나는 곧바로 제이슨에게 지분을 매각하는 방향으로 진행해 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150억 원을 번 거네, 그러면.’
돈이 돈을 부른다고.
남들이 평생 모아도 못 모을 돈의 10배를 고작 반년 만에 벌어 버렸다.
그런데도 막 엄청나게 신나거나 즐겁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 몇 개월 사이에 내 처지가 그만큼 바뀌어 버렸다는 뜻이었다.
월1억킥을 찍고 좋아 날뛰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난 그새 수백억을 벌어도 그냥 벌었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한 1억 달러는 벌어야 기쁘지 않을까.’
그것도 몇 년이 지나면 별 감흥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지금만 해도 내 자산은 벌써 수억 달러에 달하는데.
앞으로 한 5년 만 지나도 최소 10배는 늘어나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자꾸 새로운 걸 하려는 걸지도.’
내게 있어서 가장 쉬운 건 돈을 버는 일이었다.
비트코인은 물론, 앞으로 나타날 수많은 알트코인을 초창기에 사 뒀다가.
가상 화폐가 폭등하는 시기에 맞춰서 팔면 그것만으로도 수십억 달러를 손쉽게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마냥 돈을 벌어들이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그간 해 본 적 없던 일들에 도전하는 게 훨씬 더 흥미로웠다.
게다가 이미 성공이 확정된 과실을 따먹는 것보다는, 이렇게 성패가 불확실한 일에 도전하는 게 더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는 또 어린 게 좋네.’
미국에서 몇 번이나 애 취급을 받았던 나이.
그게 이상할 것도 없는 게 20살이면 정말로 어린 게 맞았다.
뭐든지 도전해 보고,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나이였다.
게다가 나에게는 몇 번이나 실패해도 내 뒤를 받쳐 줄 빽이 있었으니까.
‘마션을 제작하는 것도 사실 그냥 예정된 성공을 취하는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좀 달라져 버렸지.’
마션을 제작했던 영화감독은 리들리 스콧이었다.
영화라는 건 누가 메가폰을 쥐느냐에 따라 다른 조건이 모두 동일해도 결과물이 천차만별일 수도 있는 종합예술.
그렇기에 나 또한 가장 먼저 리들리 스콧에게 컨택을 했었다.
그와 접점이 몇 번 있다는 피터를 통해 영화화하기 좋은 글이 있는데 한번 해 보겠냐고 물은 것.
하지만 일정이 너무 바빠 맡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이제 막 프로메테우스를 끝내고, 카운슬러 촬영에 들어간댔지.’
이미 차기작인 카운슬러의 촬영 계약을 모두 끝냈다고 한다.
촬영 일정 또한 두 달 후로 잡혀 있었고.
1년 반이라는 시간 사이에 영화를 제작해야 하는 나하고는 일정이 맞지 않았다.
그 탓에 어쩔 수 없이 리들리 스콧이 아니라 다른 감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땅한 감독이 없더라.
다른 감독이 메가폰을 쥐게 된다면, 흥행이 불확실하게 되는 만큼 뭘 쥐어 줘도 잘 만들 만한 감독에게 맡기고 싶었는데.
그런 감독들은 이미 몇 년 단위로 일정이 계약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때였다, 그러다 생각이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된 게.
‘굳이 할리우드의 감독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할리우드의 유명한 영화감독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기만 하다면, 상관없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 정확히는 그렇게 될 사람 한 명을 알고 있었고.
“반갑습니다, 감독님.”
이 사람을 소개시켜 준 건 양진철 PD를 통해 스카우트했던 충무로의 인력 중 한 명이었다.
예전에 함께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는 것.
CG를 다루는 사람이었는데, 그때 촬영에서 느낀 거로는 CG를 통한 연출에도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었다고도 덧붙이더라.
‘그거야 나도 잘 알고 있지.’
첫인상은 TV를 통해 봤던 그대로였다.
사람 좋은 얼굴에 웃는 상.
대화를 많이 나누기도 전에 배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작가님의 작품은 저도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같은 나라 사람이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잘나가시는 게 참 대단했거든요.”
“뭘요. 감독님도 조만간 그렇게 되실 건데요. 이번 작품이 조만간 개봉이시죠?”
“예. 올해 8월입니다. 북미에는 몇 달 뒤에 배급될 예정이고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이 사람과 영화를 제작하려 한다는 소식이 워너 브라더스에까지 퍼진다면.
아마 그걸 들은 워너 브라더스 사람들이 나를 꽤 비웃게 되지 않으려나.
동양의 작은 나라의 작가가 뭣 모르고 헐리우드에 뛰어들었다가, 실패를 맛 보고 결국 자기처럼 동양의 작은 나라의 감독을 찾아가게 됐다고.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냥 동양의 작은 나라의 감독이 아니라… 몇 년 후 오스카에서 영화 하나로 단일 최다 수상 기록을 세우는 감독인데?
그것도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된 영화를 가지고.
“영화를 제작하려 하신다고요.”
“네. 제가 최근에 판권을 사들인 SF 소설이 있는데, 그 소설의 영화화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각색은 감독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좋고요.”
내가 알기로는 이번 영화 이후 한동안 휴식기를 가지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
어쩌면 내 제안을 거절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일단 돈으로 선빵을 치기로 했다.
“아, 우선 영화 제작비는 1억 달러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에 도전하는 만큼 크게 써야죠.”
“…1억 달러요?”
내 말에 봉 감독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아아, 유비는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얻었다지?
나는 삼고초려 대신 일(억$)고초려로 얻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