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산다는 것>
떠들썩한 복도를 걸으면서 현진이 나에게 장난스럽게 질문한다.
“야, 혜림이가 이번 기말고사 1등 했는데 너는 혜림이 반에 안 쳐들어가?”
“뭐?”
“1학기 때 혜림이가 1등 뺏기고 아니 뺏긴 건 아닌가?”
“난 2등으로 충분히 만족하거든?”
‘기억책 덕분에 암기과목에서 만점이지만 수리같이 활용이 필요한 문제는 아직 힘들다고···.’
“그거 혜림이 앞에서 말하지 마. 더 기분 나빠할걸?”
나와 현진이 시답지 않는 말로 교실로 향할 때 한 학년 선배로 보이는 사람이 현진을 붙잡았다.
“현진아 한참 찾았네. 너 2학년 독서부 서미리라고 잘 알지?”
“그런데···그건 갑자기 왜요?”
현진은 자신을 붙잡은 선배가 누군지 아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굳힌 채 대답했다.
“다행이다. 누구라도 보낼만한 사람을 찾아서···.”
“네?”
“담임이 미리가 입원한 병원에 안내문하고 성적표하고 가져다주라고 하는데 아무도 간다는 애들이 없잖아.”
“네?”
“그래서 나한테 책임지고 보내라고 하는데 다행히 현진이 네가 안다고 하니까 다행이다.”
하면서 노란 서류봉투를 현진에게 넘겼다.
“그런데 병원이면 크게 다친 거예요?”
“염산 테러 당했다고 하던데?”
“네?”
“염산 테러요?”
“미리네 엄마 때문에 이혼하는 가정에서 보복으로 염산 테러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걸 한 아이가 아직 어려서 처벌은 안 받을 것 같다고 하던데?”
“아니···그게 무슨···.”
나와 현진의 굳은 얼굴에 이미우 선배가 말을 이어갔다.
“얼굴만 믿고 나대다가 벌 받은 거지 뭐···.”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현진과 이미우 선배의 말을 듣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자 복도를 지나가던 아이들이 전부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나와 이미우 선배를 주시했다.
“내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주먹을 쥐고 참기 위해 부르르 떨고 있자 심상치 않다고 생각되었는지 현진이 유들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는 나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어깨를 두드리고 말했다.
“미리 선배는 얼굴 믿고 나댄다고 하지만 미우 선배는 뭘 믿고 나대는 건데요?”
“뭐?”
“헛소문 퍼트리고 자기가 모든 이슈의 중심이 되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요?”
“···.”
이미우 선배가 이빨을 악무는 게 눈에 보였지만 나는 평소와 조금 다른 현진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미리 선배 소문이 낸 것도 미리 선배가 관심을 받아서인 거지 미우 선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고요. 이번에는 미리 선배 소문으로 재미 좀 봤으면 이제는 누구 약점을 캐서 재미를 보게요?”
“무슨···아니야···. 그런 거.”
하지만 복도에서 나와 미우 선배의 대치를 지켜보던 아이들이 현진의 말에 이전과는 좀 달라진 분위기로 미우 선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리 선배한테 들러붙어서 약점 캐서 퍼트리고 이제는 다른 타깃을 구했나 보죠?”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현진에게가 아닌 지금의 다툼을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하소연하는 듯한 미우 선배의 말이었지만 다들 냉랭한 표정이었다.
“그 소문 때문에 미리 선배 어머니를 좋아한다는 그 인생 헛산 아저씨가 이혼하는 게 왜 미리 선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헛살았다니···.’
‘아니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얼마나 의미가 없으면 이제까지 같이 산 가족을 버리고 첫사랑이라는 사람한테 달려가냐고···.’
내가 현진의 옆에 붙여서 조용히 질문하자 답해줬다.
웅성거리면서 현진의 말을 가지고 서로 대화하는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현진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 소문을 낸 이미우 선배가 그 인생 헛산 아저씨가 이혼을 하기로 결정한 일에 결정적으로 계기가 된 것 아닌가요?”
“아니야!”
복도에서 크게 아니라고 부정한 미우 선배였지만 이미 복도에서 다툼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염산 테러를 당했다는 미리 선배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여론은 미우 선배가 나쁜 소문을 내고 다녀서 여럿 피해를 입었다는 소리를 입에 담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뚫고 나와 현진은 미리 선배가 입원했다는 병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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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산 테러라니···그것도 아직 어린 학생을 상대로 너무 잔인한 거 아니냐?”
“···.”
“그런데 그걸 한 테러범이 어리다며···.”
“허···정말···. 미리 선배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저 부모가 이혼을 결정하고 거기에 끌려가는 것밖에 더 있어?”
“그러니까.”
“복도에서 멋있었다.”
“···.”
평소와 다르게 굳은 표정의 현진의 모습에 내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서 다시 곱씹어 봤지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질문했다.
“아까부터 왜 그래?”
“넌 방금 내가 싸운 게 잘한 것 같아?”
“뭐···원칙적으로 싸우면 안 된다고 하지만 솔직히 안 싸우면서 어떻게 사냐?”
“그건 네 말이 맞아. 다투지 않고 사는 방법은 없지. 삶은 투쟁이니까. 그런데 방금 내 행동이 옳았냐고 하면 난 잘 모르겠어.”
“어?”
“방금 복도에서 한 행동은 이미우가 미리 선배한테 한 짓하고 다를 바가 없었어.”
“무슨···?”
“미리 선배 소문 때문에 힘들어했잖아. 자기 부모님 이혼만으로도 아직 감당하기 벅찰 텐데 다른 가정이 자신 때문에 깨졌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건···소문이 잘못된 거잖아. 미리 선배가 그 소문을 내고 싶어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사람과 친분을 나눈 것뿐인데···.”
“그래. 잘못은 이미우가 했어. 자신이 미리 선배 약점을 알게 되었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온 학교에 소문내고 다녔지.”
“아니 도대체 미리 선배 약점을 떠들고 다닌 이유는 뭔데?”
“미리 선배 예쁘다고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유명했었잖아. 몰라?”
“나 전학 왔었거든?”
“아···.”
“그래서?”
“미리 선배 얼짱으로 유명하니까. 부모님 이혼한다고 마음이 단단하지 못할 때 이미우가 옆에서 위로한답시고 약점 캐서 그걸로 자기가 유명세 얻고 싶어한 거지. 오늘 나는 그 여론에 면죄부를 준거고.”
“뭐? 여론에 면죄부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미리 선배 염산 테러 소식 방금 알았잖아.”
“그렇지.”
“이런 큰 사건이 소문이 이렇게 늦게 펴지는 건 알면서도 쉬쉬했다는 거야.”
“왜? 이렇게 소문내길 좋아하는 학교에서?”
“왜긴 왜야. 죄책감 때문이지. 미리 선배 약점이라고 쉽게 말해서 유명인 약점이라고 씹고 즐기고 하다가 자기네들도 알게 된 거지. 그저 살면서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일을 핑계로 미리 선배에게 상처를 준 거라는 걸. 거기다가 그 소문 때문에 테러까지 당했다?”
“쉽게 남의 이야기를 옮기고 다니던 학교 재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쉬쉬했다는 거구나?”
“그래.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편승해서 잘먹고 잘살고 있는 이미우를 보고는 폭발해 버린 거지. 소문 즐겁게 씹고 즐기던 너희들에게 면죄부를 줄 테니까. 원흉을 이 사람으로 정하고 이전에 행동했던 것처럼 하라고···. 내가 그렇게 총구를 들이민 거야.”
“그건 너무 앞서서 생각한 거 아니야? 설마 그렇게까지···.”
“내 상상 이상일걸?”
우울해하는 현진을 달래면서 도착한 병원은 화상전문치료 병원이었다.
병원 앞에 도착해서야 정말로 미리 선배를 향한 테러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1층 안내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가 말해준 곳으로 향하자 전신에 붕대를 두른 긴 머리의 여성으로 보이는 형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와 현진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침상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선배···.”
“선배는······.”
“나 불렀어?”
“어?”
나와 현진이 미리 선배의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뒤로하자 독서부에서 항상 보던 선배가 평소와 다르게 병원복을 입고 서 있었다.
“선배···괜찮아요?”
“그···테러 당했다고···.”
선배는 쓴웃음을 물더니 우리가 서 있던 침상을 아픈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나라 현진을 데리고 병원 산책로로 향했다. 병원 산책로에 준비되어 있던 벤치로 우리를 안내한 선배는 한참을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응. 테러 당했어. 그래서 머리도 잘랐고.”
나는 그제야 미리 선배가 자랑하던 긴 생머리가 짧아져서 조금 긴 단발처럼 느껴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리끝만 탄 거예요?”
“머리하고 여기 팔 부분?”
선배가 보여준 팔뚝은 맨살이 보이지 않도록 여러 번 붕대로 감겨있어서 운신이 어려워 보였다.
“사실 이것보다 더 다쳤을지도 몰라.”
“···!”
“그런데 엄마가 나를 구해줬어. 아니 자기가 다 뒤집어쓰고 나를 지켜줬어.”
“···!”
“난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 항상 나하고 아빠를 향해서 냉랭했거든.”
“···.”
“내가 어렸을 때는 아빠는 엄마가 도도한 도시 여성이라서 그렇다고 했고 나는 그냥 마음이 아팠어.”
“···.”
“내가 커서는 아빠는 엄마가 재수 없게 본다고 했고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졌지.”
“···.”
“아니 ‘아무렇지 않아’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지쳐서 포기한 건지도 몰라.”
“···.”
“이번에 엄마, 아빠 이혼 확정판결날 염산 테러를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기억나는 건 날 꼭 안아준 익숙한 온기뿐이었어.”
“···.”
“우습지? 아주 익숙한 온기더라.”
“···.”
“내가 서럽게 울고 자는 날이면 느껴지던 아주 따뜻하고 녹아내릴 것 같았던 솜사탕 같은 온기.”
“···.”
“바로 옆에 있었는데 몰랐어. 엄마가 항상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
“···.”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엄마가···.”
“··선배···.”
“그런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아니?”
“우리 엄마가 첫사랑이라고 죽고 못 산다고 하던 아저씨가 자기가 후원하던 아이가 멋대로 한 거라고 하면서 자기는 잘못 없다고 하면서 병실에서 도망치더라?”
“미친 거 아냐?”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선배는 쓰게 웃더니 말했다.
“그 아저씨도 그저 엄마가 예뻐서 첫사랑인 거겠지.”
무언가 아주 작은 희망을 보다가 절망하게 된 것처럼 선배의 얼굴은 염산 테러로 인한 화상은 1도 없었지만 마음 속은 이미 다 타고 잿더미만 남은 것 같았다.
병실로 향하면서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현진이 미우 선배에게서 받았던 노란 서류봉투를 미리 선배에게 넘겼을 뿐이었다.
우리가 나왔을 때 닫아놓고 나왔던 병실이 문이 열려 있다.
나와 현진을 제치고 다급하게 뛰는 미리 선배의 모습에서 절규가 느껴졌다.
‘안돼. 엄마···. 제발···.’
나와 현진은 누가 발이라고 붙잡는 것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을 힘들게 움직여 병실로 향했다.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