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경수 아버지>
토요일 저녁.
힘들게 손수 요리하지 말고 돌아가면서 먹을 걸 조금씩 싸가겠다고 말하고 방문한 종혁이네 였지만, 문을 열자마자 덮치는 음식 냄새와 잔칫집 같은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어머나, 이걸 종혁이 어머니 혼자 다 하셨어요? 저라도 부르지. 저는 간단하게 불고기 전골 할 재료만 들고 왔는데.”
“아네요. 종혁이가 친구들 부모님까지 초대하자고 하니깐. 하나씩 준비한다는 게 이렇게 되어버렸네. 갈 때 싸가요. 내가 손이 커서 너무 많이 만들었네?”
“이렇게나···.”
어머니의 당혹스럽지만 내 친구네 집에 처음 초대받았다는 사실에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하는데 그 뒤로 양장차림의 경수 어머니가 들어왔다.
“지희가 손이 커서 음식은 많이 했을 것 같아서. 내가 음료수만 사 왔지. 양손 가볍다고 흉보면 안 돼.”
“언니 왔어요? 너무 오랜만이다. 이렇게 얼굴 보면 좋은데 자주 안 오고.”
“내가 오면 꼭 보험 들라고 하는 것 같잖아. 미안해서 그러지. 너네 남편도 오늘 있는 거야?”
“불편해서 나가려는 걸 내가 꼭 붙들었잖아요. 호호.”
부산스럽게 종혁이 어머니와 경수 어머니 그리고 내 어머니가 붙어서 음식상을 차리자. 상다리가 휘어지는 게 뭔지 보여주겠다는 듯한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주신이는 벌써 음식 냄새만으로 배가 부른지 졸린 표정이었고 종혁이는 예상했다는 반응, 경수는 오랜만에 포식한다는 표정이었다.
당혹스럽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이는 종혁이 아버지 모습에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식사시간 내내 식당에서 경수와 종혁이 그리고 나의 학교생활을 대해 말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어머니들의 모습 뒤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은 주신이가 졸린 듯 꾸벅거리자. 종혁이가 자신의 방 침대에 눕히고 나왔다. 그리고 나를 쓱 보더니 이내 자신의 아버지에게 귓속말을 했다.
깜짝 놀란 듯한 종혁이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 무리에서 빠져나와 나를 거실로 불러내셨다.
“주인아, 종혁이한테 이야기 들었다. 그렇지만 그 돈은 너희 가족을 위해서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구나. 약속을 지키려는 자세는 보기 드물고 좋지만, 괜히 쉽게 번 돈이라고 계획 없이 사용하면 안 된다.”
“종혁이 아버지 말씀 감사해요. 사실 이렇게 어른의 상담을 받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제 이야기를 한번 듣고 결정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응?”
“종혁이, 경수 정말 좋은 친구예요. 그리고 미래에 자기 목표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요. 그런데 가장 걱정되는 게 뭔지 아세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부모님 건강이요.”
“응?”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의문을 표하는 종혁이 아버지였다.
“보험 많이 드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전부 생명보험 아닌가요?”
이 당시에는 고액의 생명보험이 많았다. 비록 우리 아버지는 생명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보험이 전부 생명을 담보로 하는 보험 위주였다.
“그거야 그렇지 그래서 종혁이 엄마한테 보험 그만 들라고 말한 거고.”
“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종혁이나 경수도 저하고 같은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고요.”
고심에 잠긴듯한 종혁이 아버지 모습에 설득할 거라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두서 없이 급하게 준비했던 말을 내뱉었다.
“부모님이 아파서 병원비로 고통받는 그런 모습은 싫습니다. 지금 나온 보험이···.”
“이래서 경수한테 실비보험 관련해서 설계해서 오라고 한 거니?”
뒤에서 보험 관련해서 이야기가 나오자 흥미를 보이던 경수 어머니가 어느새 나와 종혁이 아버지가 앉아 있는 거실 쪽으로 자리를 했다.
“경수 어머니···.”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종혁이 아버지 보험은 종신이지만 20년 만기가 지나면 법정이자율 최고로 해지하면 원금보다 더 나올 수 있게 설계했어요. 돈이 묶이는 건 불편하지만 종혁이 아버지 수입을 생각하면 적금이라고 생각하면 좋아요.”
“경수 어머니가 설계한 보험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전 그저 병원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보험을 부모님들이 전부 가입하셨으면 하는 거예요.”
“뭐?”
‘종혁이와 경수가 정말 부모님에게 내가 복권을 샀다는 언급조차 안 했구나.’
왜인지 따뜻해지는 가슴 밖으로 내가 품고 있던 말을 던졌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내 옆에 그리고 친구 부모님도 건강하게 옆에 계셨으면 하는 거예요. 병원비 걱정에 병을 키우는 게 아니라 그저 아프면 당연하다는 듯이 가고 건강검진도 자주 하고요.”
‘사실은 경수 아버지 암 진단 직전이에요. 병원비로 경수가 힘들어했다고 미래에서 봤다고 할 수도 없고···꼭 병원비에 대한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경수에게 너희 아버지 암이니깐 병원비 걱정 안 되게 보험 가입해라 고 말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병원비에 관한 실비보험은 지금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상품이라서 가입자에게 유리하지만, 점차 보험사에서 손해율을 반영하면서 비율이 점차 가입자에게 불리해진다.
복권으로 번 돈을 종잣돈으로 큰돈을 벌 수도 있다면 나도 고민되겠지만, 어차피 미성년자인 내가 혼자서 투자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경수의 아버지가 암으로 쓰러지기 전에 대책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수한테 들어서 애 늙은이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 너 생각이 평범하지 않고 다르구나?”
경수 어머니의 놀랍다는 감탄 뒤로 생각에 잠긴 종혁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 저 복권 당첨됐어요. 이걸로 가족들 전부 실비보험은 가입하고 싶어요. 그래서 설계해서 가져다 달라고 한 거예요.”
“보험은 매달 내야 하는 것 아니니?”
“아니요. 금액이 크면 일시납도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경수 어머니 그게 가능한가요?”
“네? 물론 가능하죠. 보통 그렇게까지 안 해서 그렇지만요. 자산가들은 현금 할인으로 일시납 하기도 해요.”
“그럼 넌 친구들 가족 보험을 들어주겠다고 오늘 전부 불러 모은 거니?”
“네···뭐 그렇죠?”
“남은 보험금은 어쩌려고 했는데?”
“그건 사용하고 싶은 데가 있긴 하지만 우선은 어머니하고 상의해보려고 했어요.”
어느새 거실에서 난 큰 소란에 다가온 건지 어머니가 내 뒤에 서서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어디에 사용하고 싶었는데?”
나는 어머니한테도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어머니 표정이 어쩐지 볼 수 없었다.
다만,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힘을 얻어 말했다.
“사실 보험 가입 후에 남는 돈을 제가 사용할 수 있다면 피해자 지원 재단을 만들고 싶었어요.”
“뭐?”
“이번에 붉은 벽돌 집 사건이요. 전 그 집 아줌마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그 집 아저씨를 죽인 건 잘못했지만···방법이 잘못된 거지만···그래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가요. 그래서 은영 누나랑 은수가 살인자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남아 있는 가족을 대상으로 질타를 하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 안 돼요. 도와주고 싶은데 개인이 하면 우리 가족이 욕먹을 수도 있으니깐. 학교 재단처럼 피해자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서 도와주고 싶어요. 뭐, 그냥 생각만···.”
말하면서 점차 흥분했는지 고개를 들며 말하다가 끝에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그 당혹스럽다는 표정에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갑작스럽게 종혁이 아버지가 일어나 내 손을 붙잡자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맞은편에 종혁이도 놀란 표정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경수도 거실 한가운데로 이끌더니 우리를 모았다.
“너희가 서로 친구라는 게···나는 종혁이 아버지로서 고맙고···감사하다.”
“네?”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엉겁결에 대답한 나를 따뜻하게 내려다보던 큰 손이 종혁이 경수 그리고 나를 감싸 안았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뭐든 도와주마. 뭐, 너희 엄마랑 주인이, 경수 어머니가 허락해야겠지만 말이다.”
“주인이가 하고 싶다면 나는 뭐든 좋아요.”
약간 물기가 어린 어머니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종혁이 아버지가 굳게 잡고 있어서 바라볼 수 없었다.
“계속 친구로 다들 친하게 지낸다면 나야 더 바랄 게 없지. 거기다가 내 실적까지 챙겨준다는데···.”
“종혁이 아버지가 이렇게 감정적이 되는 모습 오랜만이네요. 전 다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후식은 뭐로 할까?”
“엄마, 배 터질 것 같아요.”
우리는 종혁이 어머니 말에 다들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와 종혁이 경수가 소파에 주르륵 앉자 맞은편에서 우리를 취조하듯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그런 사건하고 연관된 거야? 잘못했다는 건 아니지만, 위험한 일에 겁도 없이 뛰어드는 건 안 돼.”
“저희는 그저 신고만 했을 뿐이에요.”
“그러다 은영 누나랑 우연히 만나게 된 거고.”
“그 아이가 안쓰러워서 식사 한 끼 챙긴다는 게 이렇게 연관된 거 같네요. 그 부분은 제가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주인이가 이렇게 바르게 큰 게 다 주인이 어머니 마음 씀씀이 때문인가 봐요.”
서로 공치사를 나누는 어머니 사이에서 내 옆구리는 남아나지 않았다.
경수와 종혁이가 양쪽에서 닭살이 돋은 자신의 팔을 감싸며 그 원인인 나를 계속 찔러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비명을 지르면서 헤드록으로 응징을 해주고 싶었지만, 부모님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식은땀만 흘리며 참아내야 했다.
‘두···고 보자.’
“그런데 다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네?”
“경수 아버지가 보험을 너무 싫어해요.”
“음···.”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여자가 무슨 일이냐면서 제가 보험일 시작할 때부터 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더 심해져서···.”
그 부분은 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경수의 어머니가 보험 일을 하는데 어째서 경수 아버지는 그 흔한 암 보험을 가입하지 않아서 집안 경제가 힘들었는지에 관해서였다.
‘경수 어머니가 보험 일 하는 걸 안 좋아하셔서 보험 자체를 싫어하신 거구나.’
“그건 제가 설득해보겠습니다.”
“아···종혁이 아버지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니···.”
“그럼 이참에 들 수 있는 모든 보험을 들게 만들면 어떨까요? 암보험이라든지···.”
“응?”
“다른 분들은 필요하거나 좋은 상품이 나오면 각자 생각해서 들 수 있지만 이번에 경수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보험 정말 싫어한다면서요. 그럼 최대한 들 수 있는 건 다 들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고액보험으로 가입하면 아무래도 큰돈이 들어갈 텐데 괜찮겠니?”
“왠지 경수 아버지는 이번에 꼭 들어야 할 것 같아요. 고액으로 빵빵하게 기회가 될 때.”
“뭐, 나야 실적도 올리고 건설 쪽 일한다고 몸 쓰는 일 하면서 다쳐도 병원도 안 가려고 하는 그이 가입시킬 수 있다면 좋지만···.”
“이때가 기회죠. 어떻게 보면 복권이 된 것도 이럴 때 필요해서 당첨된 게 아닐까요?”
그러자 부모님들끼리 상의를 해서 결정하기로 했다.
자세한 금전 이야기가 오가면서 우리를 방에 들어가게 하기 전에 나는 흘리듯 한마디만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