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내가 모든 걸 차지할 시간이다. (2)
스스슥!
가장 먼저 칼레브와 회색의 암살자들이 뛰어들었다.
“와아아아!”
그 뒤를 울칸과 산적들이 뒤쫓았고 나머지 병력들도 빠르게 합세했다.
콰아앙!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면서도 경비대장은 검을 뽑으며 크게 외쳤다.
“비상! 습격이다! 지원을 불러! 아멜리아 아가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끄러운 호각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성 앞을 지키는 경비대는 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습격자들의 공격에 대응했다.
“곧 지원이 올 것이다! 침착하게 적들을 막아라!”
경비대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대영지답게 영주성을 지키는 경비대원의 수도 수백에 이르렀다. 수에서 밀리지 않으니 충분히 격퇴하거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습격자들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선두에 선 자들은 어지간한 상급 기사보다 뛰어났다.
칼레브의 속도는 아무도 따라가지 못했고, 울칸이 강철 곤봉을 휘두를 때마다 몇 명의 병사들이 한 번에 쓸려 나갔다.
콰앙! 콰아앙!
“으아아악!”
“지원은 왜 안 오는 거야!”
“막아!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경비대는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학살당했다. 전력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경비대장은 뒤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뭐, 뭐지? 이놈들 도대체 뭐야? 다들 뭐 하고 이런 놈들이 모이게 내버려 둔 거야!”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 치안대 쪽에도 움직임이 없었다. 인근에 있는 방위군이라도 불러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었다.
상대측의 전력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병사 하나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비등한 수였음에도 이제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아멜리아가 뒤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경비대장은 전황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아가씨가 이런 지휘를…….”
그녀가 한 번 손짓할 때마다 누군가가 호각을 불었고, 그에 따라 습격자들의 위치와 진형이 절묘하게 바뀌었다.
경비대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포위되어 죽어 가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습격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이미 제대로 된 전쟁을 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막으려 한 경비대의 실책이었다.
넋이 나간 경비대장은 어느 순간 다가온 베르나프의 검에 목이 뚫리고 말았다.
그걸 끝으로 경비대는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멸하고 말았다.
완벽한 승리였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마치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베르나프는 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고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냐앙.
바스테트가 고개와 꼬리를 빳빳하게 들고 아멜리아보다 앞서 성으로 들어갔다.
베르나프는 그걸 보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내가 진짜 저 고양이 언젠가는 치워 버려야지.’
성내에 갑자기 피를 뒤집어쓴 병력이 나타나자 사용인들이 기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길고 적막한 복도를 지나, 습격자들은 두꺼운 문으로 닫힌 연회장에 도착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연회를 즐기고 있던 자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냐앙.
우아하게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바스테트를 보고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오는 아멜리아와 그녀의 수하들을 보고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전부 척살할 수 있을 정도의 무장 병력이었다. 그것도 온몸에 피가 묻어 있는.
그건 즉, 경비대를 뚫고 강제로 들어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연회장에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사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멜리아를 노려보던 잘생긴 중년인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멜리아.”
아멜리아 또한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작위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버지.”
중년인은 북부의 대영주인 레이폴드 백작이었다. 그는 아멜리아의 말에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하! 네가 드디어 미친 게로구나? 후계자도 아니고 여자인 네가 작위를 받겠다고? 그것도 강제로?”
레이폴드 백작의 옆에 있던 그의 아들들도 함께 웃었다.
“방구석에서 책만 읽다 보니 머리가 돌아 버렸나 봅니다.”
“이래서 빨리 시집이나 보냈어야 했는데. 펜리스 백작과 파혼은 왜 해서. 쯧쯧쯧, 저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형님, 쟤가 뭐 가라고 해서 갈 애입니까? 예전에 약혼도 싫다고 질질 끌다가 억지로 한 거 아닙니까? 이제 나이도 너무 많아서 어디서 데려가지도 않을 겁니다. 으하하하!”
다들 왁자지껄 웃으며 아멜리아를 비웃었다. 연회장에는 소수의 호위만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레이폴드 백작은 웃음을 멈추고 습격자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이 영지에서 더러운 짓만 골라 하던 회색 쥐새끼. 세금을 많이 바쳐서 내버려 뒀는데 진작에 없애 버릴 걸 그랬구나.”
칼레브는 무슨 말을 하든 관심이 없다는 듯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팔짱만 끼고 있었다.
“토벌당해 죽은 줄 알았던 유명한 산적 새끼도 있고.”
“으하하하! 아가씨가 몰래 빼돌려 주셨소!”
울칸은 강철 곤봉을 어깨에 걸치고 호탕하게 웃었다.
“요새 잘나가는 악티움 상단주 아닌가? 그쪽도 같은 편일 줄이야.”
콘라드는 정중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레이폴드 백작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지 같은 놈들이 미친 딸년을 따라서 죄다 연회에 몰려왔구나. 뭐라도 얻어먹고 싶었으면 이쪽에 붙었어야지.”
아멜리아는 레이폴드 백작의 그런 모습을 보고 살짝 웃었다.
“흐음, 뭔가 준비해 두신 게 있는 모양이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벌벌 떨면서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레이폴드 백작은 비웃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쿠웅! 쿠웅!
연회장의 비상문들이 열리며 일단의 병력이 들어와 주변을 포위했다.
모두 강력한 쇠뇌를 장전한 채 들고 있었다.
동시에 공격을 받는다면 습격자들의 피해도 클 것이리라.
아멜리아는 자신들을 포위한 병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준비를 해 두셨네요. 어떻게 아셨죠?”
“흐흐흐,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게 그리 쉬운 줄 아느냐? 권력자는 언제나 주변을 의심하고 살펴야 하는 법이다. 이 정도는 상시로 대기시켜 두고 있었다. 요새 자식놈들에 관해 안 좋은 소문이 종종 들려 오고 해서 조금 더 보강했지만 말이다.”
레이폴드 백작의 말에 아멜리아는 피식 웃었다. 과연 의심 많고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아버지다운 준비였다.
아들들도 호시탐탐 저 자리를 노리고 있을 테니 강박적으로 대비했을 것이다.
다들 여유로운 걸 보면 무언가 언질을 주었던 거 같았다. 확실히 오래 자리에 앉아 있으면 나름대로 감이 발달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잠시 침묵하자 레이폴드 백작이 거만하게 손을 저었다.
“그냥 다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려라. 아무리 딸년이라도 내 자리를 넘볼 정도로 미친 것은 그냥 둘 수 없지. 시집 보낼 딸들이야 많으니까 괜찮다.”
하지만 병력을 끌고 온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레이폴드 백작은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재촉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죽이래도?”
딸을 죽이는데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다.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방향 돌려.”
척! 척! 척!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가 손을 들자, 모든 쇠뇌의 방향이 레이폴드 백작을 향해 바뀌었다.
“뭐, 뭣! 이, 이게 무슨 짓들이냐!”
레이폴드 백작을 비롯해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당황했다. 이대로 쇠뇌가 발사되면 자신들이 고슴도치가 될 상황이었다.
기사는 아멜리아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소집되어 제때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괜찮아,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아버지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감사합니다.”
아멜리아는 영지의 수많은 인사들을 회유하고 포섭했다. 그게 어려우면 가족을 인질로 삼아 협박하기도 했다.
그렇게 영주성을 지키는 병력 대부분과 지휘관들이 아멜리아에게 넘어갔다.
영지의 전속 마법사와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진작에 회유되어 사태를 관망하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연회에서 빠져 대기하고 있었다.
상황이 뒤바뀌자 레이폴드 백작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이 배신자들! 이게 무슨 짓들이냐! 어서 저년을 죽여라! 빨리 죽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의 발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무장 병력은 아멜리아의 것이었다.
남은 건 귀족들을 따라온 호위 기사들뿐이었다. 연회장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들어와 있었기에 그녀의 병력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길길이 날뛰는 레이폴드 백작과 잔뜩 겁먹은 공자들을 보며 아멜리아가 다시 웃었다.
“이제야 얼굴들이 좀 볼 만하네요.”
승기는 아멜리아 쪽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직 변수가 될 사람이 하나 남아 있었다.
“흠, 아가씨께서 장난이 과하십니다.”
통통한 체구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딱 봐도 수련 따위는 전혀 안 하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 정체를 안다면 누구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자가 바로 ‘북부제일검’이라 불리는 레이폴드의 기사단장, 위르겐이었다.
위르겐은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신다면 제가 영주님께 잘 말씀드려서 목숨만은 살려 드리겠습니다.”
화악!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과연 북부제일검이라 불릴 만했다.
“오오, 위르겐! 당장! 당장 나를 탈출시켜 주게! 바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전부 죽여 버릴 테니까!”
레이폴드 백작은 희망에 찬 눈빛을 내비쳤다. 여기 있는 모두가 죽어도 자신만 살면 된다. 자식들이야 죽어도 또 낳으면 된다.
위르겐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주변에 있는 호위 기사들에게 말했다.
“전투 진형을 갖춰라. 내가 영주님을 모시고 이곳을 벗어나겠다.”
호위 기사들이 위르겐의 주변에 모여 전투 진형을 갖췄다. 수는 적지만, 이들은 필사의 각오로 백작을 탈출시킬 것이다.
다른 이들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들은 높은 확률로 죽을 게 뻔했다.
위르겐이 나서자 아멜리아 옆에 서 있던 베르나프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말했다.
“가시기 전에 저랑 한번 어울려 주시죠.”
“너는……?”
“베르나프입니다.”
“아, 그래. 기억이 났군. 허우대만 멀쩡해서 아가씨의 호위로 뽑힌 놈이 아닌가?”
위르겐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레이폴드에서 베르나프에 대한 평가는 밑바닥을 기었다. 그저 겉보기에 그럴듯하게 생겨서 뽑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정식 기사로 임명받지도 않았고, 아멜리아 옆에서 헤실대기만 하니 ‘아가씨가 어디서 반편이를 주워 왔다’라는 조롱이나 듣는 신세였다.
그런데 그런 놈이 지금 기사단장이자 북부제일검이라 불리는 자신에게 도전한 것이다.
이런 도발을 참는다면 기사라 할 수 없었다.
위르겐은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래, 자네 하나 정도는 죽이고 갈 시간이 충분하지. 검을 뽑게나.”
강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베르나프는 씨익 웃으며 검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몸을 틀었다.
베르나프의 왼쪽 발이 조금 더 돌아간다. 조금 더 자세가 낮아진 게 검을 뽑기 직전의 모습과 같았다.
위르겐은 강자의 오만으로 그가 검을 뽑기를 기다려 주었다.
“뭐 하나? 어서 뽑으래도? 그 이상한 자세는 뭔가?”
“갑니다.”
“뭐?”
카칵.
번쩍!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작은 마찰음과 함께 빛이 번뜩였다.
“크읏!”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난 위르겐은 이를 악물었다. 길게 베인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피했다며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베르나프가 혀를 찼다.
“하, 역시 북부제일검답군요. 처음부터 필살기를 썼는데 말이죠.”
냐앙!
바스테트가 왜 못 죽였냐고 질책하는 거 같았다. 베르나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저거 꼭 치워 버려야지.’
위르겐은 분노에 차 이를 갈았다. 기사 취급하기도 아까운 애송이에게 이런 상처를 입은 게 모욕적이었다.
가만 보니 들고 있는 검도 특이했다. 한쪽 면에만 날이 있었고, 검신은 뽑으면서 베기 쉽게 아주 살짝 휘어져 있었다.
“이놈! 감히 잔재주를!”
카앙!
위르겐이 번개같이 달려들고 베르나프가 검을 들어 그를 막았다. 곧 두 사람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공방을 나누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마나의 폭풍이 퍼져 나가며 바닥이 깨져 나갔다.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콰아앙! 콰앙!
베르나프와 위르겐의 대결은 백중세로 보였다. 연회장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량이라 소문난 베르나프가 저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나프는 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썼다.
‘괜히 북부제일검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군.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강하잖아? 수련도 잘 안 하고 매일 놀기만 해서 배까지 나온 주제에!’
젊은 나이에 이 정도까지 하는 것도 대단한 거지만, 베르나프는 정말 복잡한 심경이었다. 빨리 죽여야 하는데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게 쉽지 않았다.
과연 북부제일검이라 불릴 정도로 쌓아 온 연륜은 쉽게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개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나른한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회를 준 거 같네. 꼭 해 보고 싶다고 해서 허락은 했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
그녀는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이 정도면 기회도 충분히 주었으니 더 기다려 줄 필요는 없었다.
베르나프가 굳이 위르겐을 혼자 상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이유는 뻔했다. 아멜리아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아멜리아가 살짝 손을 들자, 칼레브가 품에서 검을 하나 꺼냈다. 한쪽 면에 여러 개의 홈이 깊게 파인 톱날 형태의 ‘소드 브레이커’였다.
콘라드는 허리에 걸친 레이피어를 뽑았고 울칸은 어깨에 걸친 강철 곤봉을 빙빙 돌렸다.
아멜리아의 손이 까닥거리며 위르겐을 가리켰다.
“처리해.”
세 사람이 위르겐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