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내가 모든 걸 차지할 시간이다. (1)
“대공자 도착했습니다!”
“2공자 위치 확보했습니다!”
“3공자는 지금 막 성으로 들어갔다는 보고입니다!”
“4공자는 곧 도착할 예정…….”
“5공자는…….”
수하들에게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받던 아멜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참 더럽게 많이도 낳았어.”
현재 그녀와 수하들은 영주성과 가까운 저택에 모여 있었다.
오늘은 큰 연회가 열리는 날. 영지의 후계자들과 주요 인사들이 거의 모두 모이는 날이었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오늘을 거사의 날로 잡았다. 반발할 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버지가 낳은 자식들이 너무 많다 보니 하나하나 감시하는 것도 일이었다. 절로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차던 아멜리아가 베르나프에게 물었다.
“지셀의 동태는?”
“영지에서 각 영지의 공자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다는 게 마지막 소식이었습니다.”
“흥, 식량도 넘치고 땅도 차지하니 이제 여유가 넘치시나 보네.”
아멜리아는 지셀 덕분에 대량의 식량을 확보했다. 지셀이 무슨 짓을 꾸미는 것 같아 손해를 각오하고 따라 했던 건데, 그 도박이 보기 좋게 성공했다.
하지만 지셀의 성공이 그저 운이 좋아서인지, 실력이 있어서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날씨를 예측하고 식량을 쌓아 두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아마 식량을 쌓아 두었던 의도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다만, 가뭄이 왔을 때 전쟁을 일으킨 건 정말 탁월한 수였다. 만약 졌으면 모든 게 망가졌겠지만, 그는 빠르게 승리를 쟁취했다.
‘그 부분만큼은 실력이지. 인정할 수밖에 없어.’
지금 그가 얻어 낸 것들을 보면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룬스톤, 철광석, 모두 내가 차지하고 말 거야. 그건 원래 다 내 거라고.’
레이폴드를 차지한 뒤에는 결국 지셀과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것들이 꼭 필요했다.
해럴드보다 먼저 그것들을 손에 넣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지셀이 카발디 백작령을 차지한 뒤부터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그놈에게 고마운 부분이 있긴 하지.”
지셀 때문에 손해를 보긴 했지만, 그 덕분에 얻게 된 이득도 컸다.
지셀이 해럴드에게도 큰 손해를 입힌 덕분에, 아멜리아는 권한을 넘겨받아 자신이 원하던 때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해럴드가 손해 본 것도 기분이 좋고.”
그녀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 눌러야 할 놈들이었다. 지셀이 알아서 해럴드와 치고받으며 힘을 빼 주고 있으니 아멜리아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방해하는 놈들은 힘으로 밀어 버리면 돼.’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레이폴드 영지부터 차지해야 했다. 오늘의 거사를 위해 정말 많은 것을 준비했다.
그녀는 지셀과 해럴드에 관한 생각을 일단 머릿속에서 털어내고 베르나프에게 물었다.
“다른 가신들은?”
“문제없습니다. 위치는 전부 확보했고, 그 가족들 또한 감시 중입니다.”
“좋아, 이제 시간만 기다리면 되겠네. 준비는 다 됐지?”
베르나프가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호위단 기사와 병사들 모두 준비됐습니다.”
뒤이어 회색의 로브를 입은,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이 고개를 숙였다.
“준비됐습니다.”
그는 바로 예전에 지셀을 습격했던 살쾡이 밀매단의 단주, 칼레브였다.
“우리 애들도 다 됐슴다!”
유독 덩치가 크고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크게 웃으며 외쳤다.
그는 예전에 북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유명한 산적이자 ‘무자비한 살육자’라 불리는 울칸이었다.
그는 거대한 강철 곤봉을 들고 있었는데, 그걸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고약한 취미가 있었다.
악티움 상단의 상단주 콘라드가 다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상단 무장병, 준비 끝났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단체의 수장들이 고개를 숙이며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모두 아멜리아가 오래전부터 포섭하고 키워 온 자들이었다.
아멜리아는 그들을 둘러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처음 목표를 정했을 때부터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준비해 왔다.
원래는 조금 더 확실히 준비하려고 했지만, 지셀 때문에 거사를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날뛰며 상황이 복잡해진 탓에, 해럴드가 짰던 북부 통합 계획도 다 망가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쁘진 않아.’
계획이란 건 결국 이정표일 뿐이다. 상황이 바뀜에 따라 계획도 달라지는 법이다.
중요한 건 결국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조금 걱정이 됐던 걸까? 베르나프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시작하시면 이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멜리아가 천천히 눈을 뜨며 답했다.
“알아.”
그녀는 그저 야망과 욕심 때문에 이번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멜리아의 측근들은 그녀가 마음속 깊이 품은 뜻을 알고 있었다.
“레이폴드를 얻은 뒤에도 힘드실 겁니다. 북부의 영주들과 귀족들은 아가씨를 레이폴드 백작으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왕국의 오랜 역사에서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이런 일은 자주 있었어. 이런 일을 한 여자가 없었을 뿐이지.”
“예.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은 아가씨를 희대의 악녀라고, 마녀라고 욕할 겁니다. 아가씨께서 지금까지 쌓아 온 명성과 평판도 모두 잃게 될 거고요.”
“상관없어. 다른 사람의 평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악명이 쌓일수록 세상 전부가 우리의 적이 될 겁니다. 우리는 평생 외로운 싸움을 하게 되겠죠. 그저 다른 영주,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입견과도 싸워야 합니다. 어쩌면…… 이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야.”
“지금이라도 멈추시면……. 아가씨는 대영주의 딸로, 품격 있고 우아한 귀족으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여생을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떠한 걱정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는 새장 안에 갇힌 새로 살고 싶지 않아.”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 곱게 죽지는 못할 겁니다.”
“아니, 우리는 반드시 성공한다.”
아멜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대범한 그녀라도 이런 큰일을 앞두고서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잠시 마음을 다스리며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지금의 자신이 있게 한 모든 일을.
― 뭐? 영지민들에게 식량을 더 베풀라고? 그래야 영지가 더 잘 살 수 있다고? 으하하핫! 계집 주제에 당돌한 말을 지껄이는구나. 어디서 제왕학이라도 훔쳐 배운 것이냐?
― 잘 들어라. 영지민들은 개돼지나 마찬가지다. 그저 굶기지 않고 목숨만 붙여 놓으면 된다. 그게 우리 가문과 영지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 여자가 정치는 무슨 정치란 말이냐? 시건방지게 굴지 말고 다른 영애들처럼 결혼 준비나 해라. 넌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 가문 간의 동맹을 공고하게 다지는 게 아가씨의 역할입니다. 아가씨는 그저 시집만 잘 가시면 됩니다. 쓸데없는 책들은 이제 그만 읽으십시오.
― 농노들이 많을수록 우리 영지는 부강해집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무슨 권리를 더 늘려 주겠다는 겁니까? 이 정도만 해도 북부의 다른 영지들보다 잘 사는 편입니다. 관대한 처사지요.
― 우리는 이미 대영지입니다.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 아가씨, 그런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마십시오. 괜한 소란을 일으키지 마시라는 겁니다. 아가씨는 여자입니다. 가문의 후계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왜 그 말이 그토록 사무치게 들렸던 걸까?
왜 모두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왜 다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던 걸까?
― 공작가에 충성해라. 그러면 레이폴드의 주인이 되게 해 주겠다.
― 평생 호의호식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쓸데없는 소리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마라.
― 잊지 마라, 아멜리아. 넌 한낱 귀족가의 영애일 뿐이다. 우리가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신을 밀어주는 공작가마저도 그렇게 말했다. 그 생각에 이르자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아니다라…….”
“네? 무엇이 말씀입니까?”
뜬금없는 말에 옆에 있던 베르나프가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런 것들이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끼이익…….
그들이 모여 있던 회장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아멜리아를 모시는 하녀장이 들어왔다.
“아, 아가씨…….”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하녀장은 그간 살면서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을 보아 왔다. 하지만 지금 모여 있는 자들처럼 무서운 사람들은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는 깔끔하고, 누군가는 지저분하고, 누군가는 험상궂고, 누군가는 서늘하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모두가 똑같았다.
오늘 밤, 이 영지를 피로 물들이겠다는 결의.
하녀장은 눈을 꼭 감고,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연회가…… 시작됐습니다.”
그 말에 아멜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완전히 마음을 다잡은 그녀의 입에서, 곧 지독히도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품격 있는 명예, 불멸의 충성, 가문의 영광과 혈연, 이것들은 내 안에서 모든 가치를 잃었다. 이제부터 오직 나의 대의를 위해서만 움직일 것이다. 그 앞에는 신분의 고하도 중요하지 않고, 선한 자와 악한 자도 없으며, 세상을 지탱하는 제도와 관습들마저 무의미하다.”
잠깐 숨을 고른 그녀가 다시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 어떤 존재라도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모두 부수고 죽이고 불태울 것이다. 명심해라. 앞으로 나의 대의만이 유일한 정의고 너희들이 목숨을 걸고 따라야 할 목표다.”
비상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도 비상식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 괴물이 되기로 했다.
모든 걸 짓밟고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새롭게 만들 것이다.
이 왕국을 전부 불태워서라도.
아멜리아의 확고한 결심을 듣자마자 베르나프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가씨를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도 똑같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아멜리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는 확고한 신념에 가득 찬 목소리로, 거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내가 모든 걸 차지할 시간이다.”
* * *
냐앙.
회색빛의 늘씬한 고양이, 바스테트가 짙은 어둠을 헤치며 레이폴드의 영주성을 향해 걸어갔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바스테트가 지나갈 때마다 두려움에 찬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
고양이를 보고 무서워한 게 아니라,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겁을 먹은 것이다.
냐앙.
고양이가 지나갈 때마다 한 명씩 한 명씩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거리에 서 있다가 합류하는 자도 있었고, 어느 저택에서 나오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가지각색이었다. 회색 로브를 걸친 자들도 있었고 산적 같은 차림새를 한 자들도 있었다. 정규군인 듯 제대로 무장을 갖춘 기사와 병사들도 함께 했다.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밤의 거리를 밝히는 횃불들도 같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몇 명 되지 않던 무리는 하나둘 수가 늘어 어느새 수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무리의 가장 앞에서 그들을 이끄는 자는 바로 아멜리아였다.
도도하게 걷던 고양이는 영주성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바로 뒤에 있던 제 주인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정지!”
영주성 앞을 지키던 경비대장이 크게 외쳤다.
오늘은 중요한 연회의 날이다. 미리 허락받지 않은 병력은 절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많은 병력이 나타나다니, 어떻게 된 상황인지 경비대장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지? 이만한 병력이 어떻게 영주성 근처에 모여 있었던 거지? 치안대는 도대체 뭘 한 거야?’
이렇게 많은 병력이 영주성 코앞까지 오는 동안 치안대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거 같았다.
경비대장은 가장 앞에 선 자의 얼굴을 보고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아가씨, 최소한의 호위를 제외한 무장 병력은 성에 들일 수 없습니다. 어서 병력을 해산시키시고 연회에 참석하시지요.”
아멜리아는 경비대장의 요구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우아하게 손을 앞으로 뻗으며 한 마디 던졌을 뿐이다.
“치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