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221화 (221/269)

221화 일을 몇 가지나 처리한 거야? (3)

북방 요새에 사신으로 온 자는, 예전에 페르디움 지원품의 운송을 맡았던 앤디 쉐어 남작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왕실의 전언을 전하러 왔습니다.”

즈발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 또 무슨 일이오? 왕실에서 왜 나를…….”

사람만 찾아오면 아들놈이 사고라도 쳤을까 봐 괜히 깜짝깜짝 놀란다. 얼마 전 전쟁 소식을 들은 경험 때문에 그런 증상은 더 심해졌다.

불안해하는 즈발터를 보며 쉐어 남작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부터 후작으로 승작하셨습니다. 감축드립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즈발터는 살짝 넋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후작? 내가?”

“네, 그렇습니다. 물론 변경을 지키기 위한 권한과 임무는 이전과 같을 것입니다.”

“왜…… 갑자기…….”

딱히 큰 공을 세운 것도 없는데 승작되었단다. 그러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쉐어 남작은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명분이야 그간 고생한 데 대한 보답이라지만, 아들 덕분에 승작되었다는 속뜻은 즈발터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지셀이…… 백작이 되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이제 펜리스 백작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사고뭉치가 이제는 당당한 고위 귀족이 되었단다. 사신까지 왔으니 진짜일 텐데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페르디움의 사정이 열악한 탓에 제대로 지원해 주지도 못했는데 전부 제힘으로 얻어 냈으니, 아버지로서 감격스럽기도 했다.

즈발터는 넋이 나간 채로 간단한 승작식을 진행했다. 왕실의 인정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짜…… 후작이라고? 내가? 우리 가문이?’

몇십 년을 북부의 가난한 백작으로 살아왔다. 자신뿐만 아니라 선조들도 그랬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고 있었다.

이름뿐인 후작이라지만 그게 어디인가? 이런 게 하나씩 쌓이며 권위가 커지는 것이다.

즈발터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잔소리쟁이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제 아들이 아무래도 가문의 영광이 될 것만 같습니다.’

즈발터가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얼떨떨하게 서 있기만 하자, 기사단장인 란돌프가 옆에서 크게 외쳤다.

“이제 페르디움 후작님이시다!”

“와아아아아!”

기사들과 병사들이 요새가 떠나가도록 함성을 내질렀다.

오랜 시간 영지민들을 지키며 고생한 영주님이 드디어 인정받은 것만 같았다. 모두가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요새 기쁜 소식이 연달아 들려 왔다. 영지의 빚도 갚았고 영주님은 승작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가능한 게 누구 덕분인지도 다 알고 있었다.

한 기사가 검을 들고 크게 외쳤다.

“페르디움 후작가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기사들도 검을 뽑아 높이 들었다. 병사들도 창을 치켜들며 한마음으로 외쳤다.

“페르디움 후작가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북방 요새도 축제의 분위기에 빠져 버렸다. 페르디움 영지에도 곧 소식이 들어가 축제를 즐길 것이다.

이런 날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정신을 차린 즈발터는 모두에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최소한의 경계 병력만 남기고 오랜만에 연회를 즐기겠다! 아껴 뒀던 고기와 술을 잔뜩 풀 테니 배부르게 먹고 마시자!”

“와아아아!”

병사들이 다시 환호했다. 특히 기사들은 더욱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수련과 전투를 반복하다 보니 요새 몸이 좀 허해지긴 했다. 이럴 때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는다면 정말 힘이 날 것이다.

모두가 환호하는 그때, 행정관 하나가 급하게 다가와 즈발터에게 속삭였다.

“영주님, 저희 고기 없습니다.”

“뭐? 왜? 왜 없는데?”

“진작에 다 떨어졌습니다. 요새 가뭄 때문에 고기도 귀한 거 아시지 않습니까?”

“……아, 그래? 조금 남은 줄 알았지.”

“기사단장님이 그 조금 남은 거 시간 날 때마다 몰래 다 먹었습니다. 빵만 먹으니 항상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요. 술도 혼자 거의 다 먹었습니다.”

“저 새끼가?”

즈발터가 란돌프를 노려보았다. 란돌프는 그것도 모르고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쥐어패고 싶은 걸 참으며 즈발터는 모두에게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기가 다 떨어졌다고 한다! 어떤 새끼가 혼자 몰래 다 처먹…… 아니다, 일단 오늘은 빵과 수프로 먹고 다음에 꼭 구해 주겠다!”

“에이…….”

기사와 병사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 주제에 무슨 고기야.

빚도 다 갚고 식량도 많고 후작가인데도…… 여전히 뭔가 안타까운 영지였다.

* * *

지셀은 돌아오자마자 피오테를 불렀다.

피오테는 오자마자 살짝 눈치를 보며 물었다.

“교단에서…… 저 안 찾았나요?”

“음, 찾긴 찾았는데 상황이 조금 달라졌어.”

“무슨 상황이요?”

“일단 이거부터 받아.”

지셀은 다짜고짜 성물을 피오테에게 넘겼다.

반지를 받은 피오테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이게 뭔가요?”

“반지, 이름은 쥬아나의 가호.”

“그게 뭔데요?”

“쥬아나 교단의 성물이야. 내가 포리스코 주교한테 선물로 받아 왔어.”

“으악!”

피오테는 깜짝 놀라 반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자신 같은 말단 사제는 함부로 성물을 만질 수 없다.

사제 교육을 받을 때 딱 한 번 성물 보관소를 구경한 게 전부였다.

“이, 이걸…… 왜 저한테 주시나요? 이, 이런 건 제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허락받은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대신 다른 사람한테는 성물이라고 얘기하지 마. 포리스코 주교만 알고 있는 거니까.”

제대로 얘기를 안 해 주니 피오테가 사정을 알 리가 없다. 몇 번이나 거부했지만 지셀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어디 주거나 그러면 안 돼. 꼭 계속 끼고 다녀. 절대 몸에서 떨어뜨려 놓지 마. 알겠지?”

“네…….”

그냥 선물이라 하면 필요할 때 어려운 사람한테 줘 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셀은 처음부터 성물인 걸 밝히고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거듭 강조했다.

피오테는 조심스레 반지를 손에 쥐고 다시 지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교단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음.”

지셀은 품에서 영구 발령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발령장을 본 피오테는 순간 표정이 멍해지더니 곧 고개를 숙였다. 내용만 봐서는 꼭 교단에서 자신을 버린 거 같았기 때문이다.

성물까지 준 건 여기에 평생 있으라는 무언의 압력 같기도 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고 싶으면 가도 좋아. 안전하게 호위도 붙여 줄게.”

“네?”

피오테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악마 대장은 강제로 자신을 붙잡고 기어코 영구 발령장까지 받아 왔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도 좋다니? 거기에 호위까지 붙여 준다고?

“농담…… 이시죠?”

“아니, 진담이야. 내가 굳이 발령장까지 받아 온 건 네가 편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다. 자유로운 상태여야 진짜 선택을 할 수 있으니까.”

“선택이요?”

“그래, 무슨 삶을 살지 선택하는 건 스스로의 몫이거든.”

지셀은 진심이었다. 길리언을 얻을 때도 그랬고, 클로드에게도 떠날 기회를 주었었다.

카오르와 용병들에게도 기사가 되는 선택을 강제하지 않았다. 드워프들과 엘프들에게도 10년 뒤 자유를 약속했다.

용병으로 살아온 그는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피오테도 스스로 선택하기를 원했다.

비록 처음에는 돈값을 핑계 삼아 강제로 잡아 두었지만, 피오테는 이미 돈값을 차고 넘치게 했다.

그리고 최측근으로서 계속 함께할 자들은 억지로 붙잡으면 안 된다. 앞으로 그가 상대할 적은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 피오테가 떠난다고 하면 포리스코에게 다른 사제를 몇 명 보내 달라고 해야지.’

아쉽겠지만 피오테에겐 피오테의 삶이 있다. 원한다면 이제 보내 줄 때였다.

성물은 그간 고생한 것에 대한 선물이었다. 포리스코에게 편지 한 장만 쓰면 입 다물고 모른 척할 테니 문제는 없었다.

피오테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발령장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마음에 물었다.

‘정말? 정말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을까?’

매일같이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이 들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기회가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지금껏 기다려 왔던 때가 왔으니, 고민할 것 없이 웃으며 돌아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걸까?

‘내가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이 더 힘들어질 거야.’

저번에도 그런 마음 때문에 섣불리 돌아가지 못했다. 자신이 이 영지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래야 해? 나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어떤 사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힘들게 살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교단에서 살아온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이 정도면 됐다.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도 자신의 인생이 있다.

동정심에, 안타까움에 계속 남아 있으면 끝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더 정이 들고 아프기 전에…… 이쯤에서 끝내는 게 나았다.

피오테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간…… 감사했습…….”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글썽거리는 눈물을 참고 말을 이으려 할 때, 어렸을 때부터 매일 읽었던 경전의 글귀들이 생각났다.

[힘들고 어려운 자들을 돕는 것은 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

[너는 가장 작은 자가 되어 섬기는 자가 되리라.]

[그리하여 영원히 자비와 진리와 의로운 길을 따르리니.]

‘아…….’

피오테의 머릿속에 그간 봤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굶고 있는 자들, 아파하는 자들, 절망에 빠져 힘겨워하던 자들. 처음 봤을 때는 분명 카발디 영지의 모두가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굶는 자들은 없었다. 아파하는 자들도 그 수가 줄었다. 힘겨워하던 자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앞에 있는 영주가, 영주를 따르는 가신들이, 모두가 힘을 합쳐 영지를 바꿔 가고 있었다.

‘그게 설사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닐지라도.’

피오테가 본 지셀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선과 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오히려 혼돈에 가까운 사람.

하지만 그의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자신의 힘이 꼭 필요했다.

‘아아……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고 있었구나.’

그제야 피오테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떠나려고 할 때 느꼈던 불편한 감정의 정체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숨을 한번 크게 내쉰 피오테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어요.”

“응?”

“지금까지 제 마음이 왜 불편했는지 알았어요.”

그 말에 지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집에 못 가서 불편한 게 아니었나?

피오테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언제 교단에서 저를 찾아올까, 저를 부를까 걱정되었던 거예요. 그걸 모르고 그냥 힘이 들어서 불편한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이걸 보고, 제 진짜 마음을 알게 됐어요.”

“진짜…… 마음?”

피오테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이곳에 계속 남고 싶어요. 이곳에 남아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요. 그게 여신의 뜻을 진정으로 펼치는 일이고, 여신께서 제게 신성력을 주신 이유일 테니까요.”

“…….”

지셀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에는 단지 마음이 여려서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진실로 사람들을 위해 남으려는 거 같았다.

이런 사제는 전생에서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지셀은 반신반의하며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그간 지내봐서 알겠지만, 우리 영지는 일도 많고 무척이나 힘들어. 너도 몇 번이나 코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잖아? 사람들을 계속 돕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동안 신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어요. 신전 밖에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힘들게 살고 있는지 실감하지 못했어요.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어요.”

“돌아가면 다른 사제들처럼 깨끗한 곳에서 좋은 것만 먹으며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어.”

피오테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소수의 귀족을 위해서만 살고 싶지 않아요. 그건 여신의 뜻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편하게 지낼 수 있는데, 그러기 싫다고?”

이 시대의 사제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클로드가 들었다면 미쳤냐고 발차기부터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피오테는 마치 기도하듯이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으며, 진심을 담아 자신의 뜻을 전했다.

“네, 저는 가장 높은 분과 함께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니까요.”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피오테의 몸에서 은은한 신성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홍빛 머리카락 중 일부가 서서히 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지셀은 할 말을 잃었다. 며칠 전 보고 온 포리스코와는…… 아니, 그간 본 어떤 사제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태도였다. 아예 종족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진짜 성자는 여기서 태어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