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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210화 (210/269)

210화 난 진짜 평화주의자인데. (3)

아스콘의 애원에도 지셀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아스콘은 서서히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내가 왜 여기서 맞고 있는 걸까?’

꿈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고통도 점점 옅어졌다.

그는 기쁘게 그 현상을 받아들였다.

‘아아, 잘됐다. 이제 안 아파지고 있어. 그럼, 그렇지. 아무리 잘 패도 사람이 이 정도 맞았으면 기절해야지. 후훗, 결국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고!’

정신을 잃어 가는 아스콘의 눈앞에 멋진 중년의 남자 엘프가 나타났다.

‘할아버지!’

어릴 적 초상화로만 봤던 할아버지였다. 한 100년 전쯤에 돌아가셨다던가?

‘내가 할아버지를 닮아서 잘생긴 거라니까. 후후훗.’

눈앞에 나타난 엘프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이리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아, 지금 갑니다. 할아버지.’

아스콘의 의식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면 모든 게 편해질 거 같았다.

어느 순간 할아버지의 뒤에, 마치 세상을 뒤덮을 듯한 거대하고 푸른 나무가 나타났다.

‘드디어 세계수와 하나가 될 때가 왔어.’

아스콘은 기쁜 마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의 영혼은 엘프들이 섬기는 세계수의 품에 안겨 안식을 취할 것이다.

그때, 갑자기 세상이 검붉게 물들며 모든 것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아스콘의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였다.

“정신 차려야지? 어딜 가려고?”

번쩍!

“우아아아악! 할아버지!”

영혼이 쏙 뽑히는 듯한 고통에 아스콘이 눈을 번쩍 떴다. 할아버지고 세계수고 다 사라져 버렸다.

여전히 개같이 맞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분명 기절할 거 같았는데 이렇게 정신이 바짝 들다니!

이거 진짜 답이 없다.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정신을 잃고 싶어도 못 잃는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얌전히 사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갑자기 커지는 생존 욕구에 아스콘은 스스로도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제발 살려 주세요…… 미친 영주님아…….”

그래도 지셀은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끝없이 울리던 아스콘의 비명도 잦아들고 별들이 반짝일 즈음, 드디어 지셀의 주먹이 멈췄다.

“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너무 손맛이 좋아서 몰입했잖아? 역시 엘프……. 아니, 인간이지.”

아스콘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훌쩍거렸다. 왜 기절을 안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죽지도 않고 기절도 안 하고 계속 고통만 받는다? 이건 진짜 수명이 긴 엘프들에게 최악의 형벌이었다.

“대표도 하고 병사도 하고 협조도 하면 되잖아……요. 말로 하지 왜 때려……요. 끄흑.”

“음, 내가 잠시 새 치료법을 실험하는 데 집중해서 멈추는 걸 깜빡했네. 미안하다.”

그 말에 엘프들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종일 팬 게 그냥 깜빡해서란다. 거기다 사람 몸 가지고 실험했다는 것도 인정해 버렸다.

다른 엘프들도 귀족들에게 몇 번 개기고 편하게 생활해 본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귀족들도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팔아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여기서도 그런 식으로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저 새끼 성질 건드리면 안 되겠다. 진짜 미친 새끼다.’

느슨했던 엘프들의 정신에 긴장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기강이 바로 잡힌 듯하자 지셀이 아스콘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부터 인간 할 거지? 새롭게 태어나는 거 맞지?”

아스콘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눈을 꾹 감고 답했다.

“네, 저는 귀만 뾰족한 인간입니다. 귀도 떼어 버리고 싶어.”

종족의 정체성도 버렸다. 버려야 산다. 눈앞에 있는 인간이 종족을 바꾸라면 바꿔야 한다.

“분노조절장애도 치료가 다 됐나? 그거 안 좋은 거라 꼭 치료해야 하거든.”

그 물음에 아스콘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저는 오늘부터 분노조절장인입니다. 이제 더 치료할 필요 없습니다.”

지셀의 지도 아래, 아스콘은 병을 고치고 종족까지 바꾸며 새롭게 태어났다.

그것도 마음껏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까지 얻으며 말이다.

* * *

엘프들의 기강을 바로잡은 지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영지에 없던 새로운 병종을 만들려면 시간이 걸린다. 당장 힘든 훈련을 시키기에는 엘프들의 체력이 너무 저질이었다.

최소한의 체력은 키워 놔야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음, 누구한테 체력 단련을 맡겨야 하지? 다들 바쁘니 마땅한 사람이 없네.”

길리언은 이미 기사들의 훈련과 관리를 도맡고 있다. 카오르는 맡겨 봤자 대충 하고 농땡이를 칠 놈이다.

최대한 빠르게 진심으로 운동을 시킬 자가 필요했다. 고민에 빠진 지셀에게 길리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든한테 맡겨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든?”

“네, 다른 건 몰라도 근육을 키우겠다고 운동은 가장 열심히 하는 놈입니다. 기초적인 건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 겁니다.”

“흠, 나쁘진 않겠군.”

다른 건 몰라도 운동 하나만큼은 열심히 한 게 고든이다. 다른 용병들이 평소에 술 마시고 놀 때도 그는 운동을 쉬지 않았다.

‘근손실’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죄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든이 운동할 때 옆에서 같이하기만 해도 체력은 많이 좋아질 것이다.

“실전 근육을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기초 운동 정도는 충분히 가르칠 수 있겠네. 좋아, 고든에게 맡겨 보지.”

결정을 내린 지셀은 바로 고든을 찾아갔다.

요새는 기사들도 한창 수련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죽기 싫으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식 시간에는 술도 안 마시고 다들 잠자고 쉬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고든은 휴식 시간도 줄여 가며 운동에 힘을 썼다. 마나 연공이나 검술 훈련만으로는 근육을 크게 키울 수가 없었으니까.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연공법을 배울 때 빠진 근육도 순식간에 되찾았다.

그에게 큰 근육은 인생의 목표이자 최고의 자부심이었다.

“어? 고든이 없네?”

그가 항상 근육 운동을 하던 연무장에 고든이 없었다. 웬일로 쉬나 싶어 의아해하며 지셀은 기사들의 숙소로 찾아갔다.

“엇? 영주님이 무슨 일입니까?”

고든은 조금 피곤한 안색으로 지셀을 맞이했다. 평소보다 체구가 조금 더 작아진 거 같았다.

잠깐 그를 훑어본 지셀이 물었다.

“뭐야? 근손실 온다면서 하루도 운동을 쉬지 않더니 오늘은 쉬고 있네? 근육도 조금 줄어 있는 거 같은데? 요새 많이 피곤한가?”

그러자 고든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 이제 운동 많이 안 합니다. 바쁘거든요.”

“왜? 근손실 안 무서워? 뭐가 바쁜데?”

“글을 배우니 세상이 달라 보여서요. 그래서 글을 좀 쓰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글손실’이 오거든요.”

“허, 네가 글을 쓴다고? 무슨 글을 쓰는데?”

“문학 소설을 하나 쓰고 있습니다. 고전을 바탕으로 제가 창작하는 건데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고 인생의 진리를 깨우쳐 주는 내용이죠. 후훗.”

고든이 매끈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 보면 역사적인 대문호라도 강림한 듯한 모양새였다.

“와…….”

그런 고든을 바라보며 지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 글을 쓴다고?

문학이 어쩌고 고전이 어쩌고 하는 걸 보면 그간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글만 가르쳤을 뿐인데 진짜 사람 인생 하나 제대로 바뀌었구나!’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길리언도 조금은 놀란 기색으로 고든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고든은 다시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완성은 안 됐는데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영주님의 문학적 안목도 조금 궁금해서요. 의견이 있으면 주셔도 됩니다.”

뭔가 말투도 조금 건방져진 거 같다. 지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든이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몇 번 휘적거리더니 작은 책 하나를 꺼냈다.

‘저 새끼는 왜 항상 저기서 뭔가를 꺼내는 거지? 아니, 어떻게 저기에 다 들어가는 거지? 아공간 주머니라도 하나 달아 놨나?’

지셀은 찝찝한 기색을 보이며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표지의 제목을 본 순간 잠깐 몸이 굳고 말았다.

[투명 소드마스터]

“……제목이 굉장하네.”

“후훗, 내용은 더 굉장하죠. 어서 빨리 읽어 보시죠.”

“아니…… 지금 좀 바쁘니 나중에 읽어 볼게. 그런데 마스터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네. 투명한 게 큰 의미는 없을 텐데.”

“네? 그게 뭔 소리예요? 투명하면 안 보이는데요? 그럼 존나 센 거잖아요.”

“투명해도 기척을 감지하기 때문에 소용없어. 그 정도 경지에서는 안 보이는 건 별문제가 안 돼. 이건 개연성이 조금 부족…….”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든이 발끈하며 답했다.

“이 투명 마스터는 기척도 안 느껴집니다! 기척도 투명해지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절대 못 느낍니다! 그런 설정이라고요! 개연성은 무슨!”

“……그래.”

만든 사람이 그렇다는데 할 말이 없다. 지셀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안 보이는데 기척도 없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마나의 영역을 만들어서 가둔 뒤에 이질감을 잡아 내는 쪽으로……. 엄청나게 많은 마나가 필요하겠지만……. 잠깐, 다른 방법도 있을 거 같은데?’

정말 이런 존재가 있다면 무시무시할 것이다. 그런 자를 만나면 어떻게 싸워야 할까?

지셀의 머릿속에 뭔가 새로운 방법과 깨달음이 올 듯 말 듯 하고 있었다.

싸움을 남들 못지않게 좋아하고 호승심도 넘치는 게 지셀이다. 투명하다고 손도 못 쓰고 당하면 엄청 억울할 것이다. 그런 건 절대 못 참는다.

머릿속에서 가상의 적을 만들어 싸우려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니, 지금 한심하게 이게 뭔 짓이야? 무슨 투명 소드마스터야! 이딴 게 어디 있어?’

때려치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미련이 남았다.

머릿속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듯했다. 조금만 파고들면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지셀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흠, 시간 날 때 이 소설을 보면서 한번 가상 훈련을 해 봐야겠네. 잘하면 새로운 마나 운용 방법을 찾을 거 같아. 재미있겠어.’

놀거리를 하나 찾은 지셀은 책을 챙기고 말을 이었다.

“일단 너한테 새로운 임무를 하나 맡기려고 해.”

“네? 무슨 임무요? 저 수련하고 글 쓰느라 바쁜데……. 하루라도 쉬면 ‘글손실’이…….”

“엘프들의 체력 훈련 교관. 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 시키고.”

“엇? 저 할래요! 하겠습니다!”

고든은 바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기사가 되긴 했지만 딱히 영지 내에서 직책을 맡은 게 아니다.

이런 걸 하나 받아야 어깨도 더 펴고 다니고 잘난 척할 수 있다. 그리고 영주의 성격상 무언가 일을 더 맡으면 보수도 더 줄 것이다.

솔직히 그간 길리언이 기사들을 굴리는 걸 보며 부러워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굴리면 저 꼰대보다 더 잘 굴릴 수 있는데!’

그런 야망을 품고 있던 고든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엘프들이면 막 정령 쓰고 그런 거 아닙니까? 체력 훈련 힘들게 해도 돼요?”

“정령은 무슨…….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놈들이니까 확실하게 굴려.”

엘프라면 누구나 높은 정령 친화력을 자랑한다. 고든이 엘프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령을 떠올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온 엘프들은 술과 연초에 찌들어서 자연이라고는 구경도 못 했으니, 이미 그 능력을 잃어도 한참 전에 잃었을 것이다.

지셀은 고든에게 주먹을 들어 보여 주며 경고했다.

“괜히 엘프들 미모에 홀려서 제대로 안 하면 알지? 네가 특별 훈련에 들어갈 줄 알아.”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고든이 콧김까지 내뿜으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곧 엘프들이 연무장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를 처음 가르치게 된 고든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외쳤다.

“내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훈련 교관이 된 고든이다! 이 영지에서 영주님 다음으로 강한 남자니까 나를 믿고 따르면 된다!”

엘프들은 죽을상을 지었다. 놀고먹는 게 업이었던 그들은 정말 체력 훈련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반대해 줘야 할 대표, 아스콘은 이미 영혼이 빠져나갔는지 줄곧 멍한 표정이었다.

눈치 없는 고든은 그런 분위기도 모르고 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 알겠지! 대답 안 해?”

“네에…….”

“목소리가 그게 뭐야! 크게 해! 무조건 크게 하라고! 악! 악! 이렇게 크게 해!”

“악!”

“그래! 그렇게 기합을 담아서 하란 말이야!”

고든은 너무 신이 났다. 누군가 자기 말에 따르는 건 엄청난 쾌감을 주었다.

“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가볍게 팔 굽혀 펴기 100개만 하자! 자세는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따라 하면 된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뭐해! 빨리 따라 해!”

무식한 놈답게 상대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보여 주기에만 바빴다.

엘프들은 엉거주춤 고든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나아…….”

“두우울…….”

“세에……. 못하겠어!”

대부분의 엘프들이 10개도 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가녀린 그들에게는 팔 굽혀 펴기도 너무나 고된 운동이었다.

고든은 무척이나 속이 답답해졌다.

“뭐야! 왜 100개도 못하는 건데! 젠장! 이 쓸모없는 것들! 일어나! 일단 그러면 달리기부터 한다! 100바퀴만 돌자!”

억지로 일으켜 세워 같이 달렸다. 그런데 2바퀴째부터 쓰러지는 엘프들이 속출했다.

“야이! 이 쓸모없는 것들아아아아! 길리언 영감은 우리를 더 심하게 굴린다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한다!”

고든은 마음만 급해서 쉼 없이 화를 냈다.

처음으로 무언가 일을 맡았다. 이제야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못 하고 잘릴까 봐 걱정부터 앞섰다.

엘프들도 마찬가지다. 이따위 걸 계속한다고 생각하니 미칠 거 같았다. 게다가 저 새끼는 숫자를 100밖에 모르는 거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주저앉은 엘프들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고든에게 은근한 유혹을 던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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