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난 진짜 평화주의자인데. (2)
뭔가 이상함을 느낀 아스콘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 진짜 영주님 말 안 통하네. 돈 아까워서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무슨 허세를 그렇게 부립니까? 그래서 뭐 내가 대표가 되고 이끌고 가면 다음엔 뭐 하려고요? 우리는 노는 걸 제일 잘하는데.”
“너희들은 이제 병사가 될 거야.”
“……?”
엘프들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몸값이 얼마인데 병사로 쓰겠다는 말인가?
아스콘도 잘못 들었다는 듯 웃으면서 다시 물었다.
“우리가…… 뭐가 된다고요?”
“영지의 자랑스러운 병사.”
“우리 몸값을 알면서도 그딴 걸 시킨다고?”
말이 더 짧아졌다. 지셀은 그래도 세상 착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그리고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니까, 오늘부터 당분간 술과 연초는 끊고 체력 단련에 전념하자.”
“무슨 체력 단련이야! 우리는 그딴 거 안 해!”
아스콘이 소리 지르자 다른 엘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놀고먹으면서 살았는데 갑자기 그런 걸 하라면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그리고 병사로 쓸 거면 뭐 하러 비싼 돈을 주고 엘프들을 사 왔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아스콘은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아하! 우리가 지금 말 안 들을 거 같으니까 그런 식으로 기 싸움을 하겠다, 그건가?”
“나는 시간 아깝게 그런 거 안 해.”
“그럼 왜 훈련이니 병사니 그딴 소리를 해? 엘프가 싸우는 거 본 적 있어요? 어? 우리는 그냥 놀고먹는 거에 특화된 종족이야. 그래서 다들 예쁘고 잘생긴 거라고.”
아름다우니까 놀고먹는다니,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하지만 외모에 설득되어 다들 그럴듯한 말이라고 수긍하고 말았다.
물론 지셀은 그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유흥가도 거의 없는 영지에 외모를 빌미로 놀고먹기만 하는 자들은 필요 없다.
그는 엘프들을 써먹을 특별한 병종을 계획해 둔 상태였다.
“엘프들도 훈련하기 나름이거든. 아주 잘 싸울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군사 훈련에 들어간다. 우리 한번 새롭게 태어나 보자고.”
“그리고 내가 그 웃기는 병사 놀이의 엘프 대표가 되는 거고?”
“그렇지. 너희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원해.”
“하, 시발! 영주님! 진짜 짜증 나서 죽겠네! 대표 안 한다니까! 왜 말귀를 쳐 못 알아들으시냐고요! 내가 노예라고 우습게 보여? 고귀한 내가 다른 인간 노예들하고 같아 보이냐고!”
“오…….”
아스콘의 발언이 드디어 완전히 선을 넘었다. 지셀은 사뭇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무례에도 지셀의 측근들은 나서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오히려 하늘을 보며 모른 척하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아스콘은 분노를 가득 담아 외쳤다.
“왜 인간들은 이따위인 거지? 무슨 엘프가 군사 훈련이냐고! 우리 싸움 존나 못하는데 미친 거 아냐? 아니, 그리고 내가 첫사랑에만 성공했으면 네놈 새끼만 한 손자가 있을 텐데 뭘 새롭게 태어나!”
“허…….”
아스콘의 욕을 들으며 지셀은 저도 모르게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웃어? 지금 내 말이 웃겨? 내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알아? 어? 일곱 번째야, 일곱 번째! 시발, 내가 분노조절장애가 있거든? 분조장 아스콘, 욕쟁이 아스콘이라고 하면 웬만한 귀족들이 다 알 정도라고! 귀족이면서 내 이름도 못 들어 봤어?”
‘들어 본 적은 없는데. 나중에 메리엘이나 로잘린한테 물어봐야겠다. 이 미친 엘프 새끼 알고 있냐고. 뭐? 분조장? 욕쟁이? 엘프 주제에 별명 실화냐?’
가만 보니 얼굴까지 벌게지며 소리 지르는 게 진짜 겁 없이 사는 놈 같긴 했다.
엘프 노예들이 다 이렇다지만, 이대로 엘프들이 원하는 대로 편하게 놀고먹게 해 주면 노예상한테 사기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지셀은 자신이 호구가 되는 건 무척이나 싫어했다.
‘하, 역시 사람은 좋은 말로 해서는 듣지를 않는구나. 넌 진심 뒤졌다. 난 정말 다른 종족이라서 잘 대해 주고 싶었는데……. 음? 다른 종족?’
자신은 종족 차별주의자도 아니고 비폭력 평화주의를 추구한다. 최대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산다 해서 세상에 만연한 종족 차별을 없앨 수는 없다. 사람들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지셀은 문득 몰려온 깨달음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 세상에 찌든 엘프면…… 이건 그냥 수명 길고 귀가 뾰족한 인간이잖아?’
그래, 상대방을 엘프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간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종족 평등이었다.
은연중에 품고 있던 종족 차별적 사고방식을 반성했다. 모든 종족은 이제 인간이다.
지셀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넌 오늘부터 인간이다. 귀가 뾰족한 인간.”
“뭐? 난 고귀한 엘프인데?”
“아니, 오늘부터 인간이다. 여기 있는 엘프들도 전부 인간으로 생각하겠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종족 평등이지!”
지셀이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자 측근들이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아스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시발? 이거 미친놈 아냐? 내가 왜 인간인데?”
“아냐, 넌 인간이야. 그리고 인간에겐 엘프와는 다른 대화 방식이 있다. 매우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지.”
엘프들은 긴 수명 때문에 대체로 성격이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도 오래 걸리고 변화도 늦을 수밖에 없다.
종족의 특성이니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천천히 마음을 열고 바뀌는 걸 기다려 줄 시간은 없었다.
지셀에게는 정말 엘프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답은 단 하나.
‘정신 개조’뿐이다.
지셀은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나에 대해서 아직 못 들은 거 같은데, 내가 왕국에서 유명한 의사야. 특히 분노조절장애 같은 걸 잘 치료하지. 그거야말로 내 전문이거든.”
“으하하하! 이 등신 같은 게 보자 보자 하니까, 뭐? 치료? 뭘 어떻게 치료할 건데! 난 원래 태생이 이런 놈이라고! 좋은 약이라도 있어?”
“처방은 약 대신 물리 치료로 진행하겠다.”
“뭐?”
“오해할까 봐 말해 두는 건데 절대 너에게 안 좋은 감정은 없다. 난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이건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널 치료해 주려는 거지.”
“갑자기 뭔 개소리를…….”
“이 꽉 깨물어라. 혀 나간다.”
퍼억!
“끄엑!”
지셀의 주먹이 움직임과 동시에 아스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퍼억! 퍼억! 퍼억!
“크억! 이 미친놈아! 몇 대 때린다고 내가 굴복할 거 같아? 크윽! 내가 몇십 년을 살면서 안 맞아 봤을 거 같냐고오! 이, 시발! 아아악!”
아스콘은 지셀에게 맞으면서도 쉴 새 없이 욕을 내뱉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성질을 고치려는 귀족들에게도 많이 맞아 봤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죽일 수도 없고 아예 병신으로 만들 수도 없으니 체벌도 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손 두발 다 든 귀족들은 아스콘을 다시 팔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 한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라! 크윽! 날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더 화나게 할 뿐이다!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게 아니거든!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야! 크으으윽!”
어차피 후유증이 남지 않을 선에서 끝날 걸 알기에 겁먹을 이유가 없다. 저러다가 지치면 다시 팔 게 뻔했다.
엘프들이 두려워하는 건 이상 취향을 가진 진짜 미친놈한테 걸리는 것뿐이다. 그놈들은 정말 아까워하면서도 괴롭히다 죽이니까.
하지만 대부분은 돈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그리고 오랜 노예 생활을 거친 엘프들은 그런 놈들을 구분하는데 눈썰미가 아주 뛰어났다.
‘크윽! 너도 돈이 아까우니까 이렇게 패기만 하는 거겠지. 내가 노예로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데 그 정도도 파악 못 하겠냐? 진짜 잔인한 놈이었으면 벌써 본보기로 몇 놈 죽였겠지.’
아스콘은 자신의 승리를 예감했다. 역시 인간은 다 똑같다. 진짜 미친놈만 아니면 적당히 패다가 다시 팔아 버릴 것이다.
하지만 아스콘과 엘프들은, 그들이 지금껏 접한 자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미친놈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퍼억! 퍼억! 퍼억!
‘크으윽! 뭐지? 왜 갈수록 아파지지? 아니, 이놈은 왜 지치지도 않지? 언제까지 때릴 거지? 아악!’
사람이면 적당히 패다가 지치거나 분이 풀리면 멈춰야 한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영주란 놈은 묵묵하게 자신의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맞았으면 이미 병신이 되거나 죽었어야 하는 거 아냐? 왜 아프기만 하고 몸이 멀쩡하지? 아악! 너무 아프다!’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아스콘도 그렇다.
그는 한두 번만 개기면 앞으로의 생활이 편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더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은 정말 처음이었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도 않고 그냥 아프기만 했다.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맞을 때마다 뾰족한 고통이 몰려오며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아스콘은 괴로워하며 물었다.
“시, 시발! 언제까지 때릴 거야! 크억!”
묵묵하게 패던 지셀이 답했다.
“적극적으로 내 일에 협조할 때까지. 그러니까 좋게 좋게 얘기할 때 협조했어야지.”
“이러다가 내가 죽거나 망가지면 돈 날리는 거야! 엄청 손해 보는 거라고!”
“내 돈 걱정은 하지 마. 안 죽게 깔끔히 치료할 수 있거든. 내가 제일 잘하는 게 그런 거야.”
“조, 좆 까! 절대 협조 안 해! 할 수 있으면 해 봐! 누구 수명이 더 긴가 보자! 크윽!”
“중증 환자네. 그런 승부 나도 좋아해.”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스콘은 꿋꿋하게 버텼다. 아니, 버티려고 했다.
“도련님, 식사 시간이에요.”
사용인들이 후다닥 간단한 음식들을 쟁반에 담아와 옆에 서자, 벨린다가 옆에서 지셀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둘 다 실력이 실력인지라 움직이면서도 잘 건네고 잘 받았다.
지셀은 한 손으로 아스콘을 패면서 다른 손으로 음식을 받아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로웰이 다가와서 서류 몇 개를 넘겼다.
“영주님, 이 부분 결재가 필요합니다.”
지셀이 대충 훑어보더니, 이번에도 한 손으로 아스콘을 패면서 다른 손으로 사인을 해 주었다.
엘프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할 거 다 하면서도 팬다고?’
‘그리고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해?’
‘여기……. 죄다 미친놈들 아냐?’
가만 보니 다들 정상이 아니다. 저런 상황에서도 총관이라는 놈은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웬디가 옆에서 클로드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총관님, 이제 그만 가셔야 해요. 일이 많이 밀렸습니다.”
“잠깐만, 지금 세기의 예술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제목은 ‘엘프 종족의 종말이 도래했다!’”
괴상한 악마한테 엘프들이 밟히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와중에 마법사들과 드워프들은 아스콘이 언제까지 버틸지 내기를 하고 있었다.
영주 뒤에 서 있는 백발의 건장한 남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그냥 나무토막 같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정상인 자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끝까지 버티려던 아스콘은 그런 모습들을 보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놈…….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잘못 걸렸다. 이러다가 진짜 평생 좆 된다. 주변에 있는 새끼들도 보통 놈들이 아니다.’
얼마나 맞았는지도 모른다. 구경하던 엘프들도 점점 얼굴빛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서로 원하는 걸 취하는 게 엘프들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저렇게 패는데 아프기만 하고 멀쩡하다고? 할 일 다 하면서 계속 팬다고?
이러면 진짜 곤란해진다.
조금 더 맞은 아스콘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그만! 내가 졌다! 그만! 병사 할게! 하면 되잖아! 대화로! 문명인답게 대화로 풀자!”
퍼억! 퍼억! 퍼억!
그래도 지셀은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아스콘을 패면서 겸사겸사 마나를 운용하는 수련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이렇게 움직여서 패 보면 어떨까?’
“케에에엑!”
사실 지셀의 머릿속은 이미 마나를 어떻게 운용하는 게 좋을지에 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스콘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아, 이게 더 효과가 좋은가?’
퍼어억!
“으에에엑!”
아스콘은 미칠 거 같았다. 맞을 때마다 분명 몸에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한번 속을 헤집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겉은 멀쩡하고 속으로는 골병이 들게 하는, 고급 중의 고급 고문 기술이었다.
“잠깐만 멈춰 주세요! 살려 달라고!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요!”
결국 아스콘은 졌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는 분노가 절로 조절되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