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우리의 힘을 보여 줄 시간이다. (1)
지셀의 행동으로 당황한 것은 친왕파와 공작파의 고위 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당황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로잘린을 믿고 그녀의 상단에 엄청난 금액을 투자한 귀족들이었다.
“전쟁이라니! 그러면 화장품 생산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펜리스 남작이 지면 우리가 투자한 돈은 전부 날리는 거잖아요!”
“화장품 기술도 결국 공작가가 가져갈 게 분명합니다!”
이들은 매일 같이 모여 현 사태에 관해 걱정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개입하지 말라는 브랜포드 후작의 엄명이 있었기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답답한 마음에 로잘린에게 하소연했지만, 그녀 또한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그들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으으, 전쟁이라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다니! 진짜 미친 거 아냐?’
사실 로잘린이야말로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미칠 거 같은 처지였다.
자신만만하게 투자자들을 모았는데 망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금전적인 손해를 떠나서, 후작가의 권위는 물론이고 자신의 신용까지 날아갈 판이 되었으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큰 금액을 투자한 메리엘도 연일 로잘린에게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
“어떻게 하지? 펜리스 남작이 지면 손해가 엄청날 거야.”
“……이기길 기도해야죠.”
“예전에도 전쟁 한 번 이긴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기지 않을까? 내 촉이 그래.”
사실 촉이 아니라 희망 사항에 가까웠지만, 두 사람 모두 그 부분은 차마 지적하지 못했다.
“……하아, 솔직히 모르겠네요.”
로잘린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알려진 정보를 기반으로 비교해 보자면, 객관적인 전력과 명성은 카발디 백작이 한참 위다.
지셀이 식량을 팔아 병력을 구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카발디 백작을 이길 정도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메리엘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야 식량이라도 쌓아 놔서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만, 다른 귀족들은 아니야. 일단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달래 줘야 해.”
“그래야겠죠. 안 그러면 난리가 날 테니까요.”
두 사람에게도 지금 상황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투자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화장품에 투자한 귀족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연회를 빙자한 ‘투자 피해자들의 모임’에 매일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다 접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몸을 숨기거나 피하면 정말 끝장날 게 분명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의 권위가 강해 아직까진 다들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했다.
그저 자신들끼리 연회장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걱정을 쏟아 낼 뿐이었다.
“어떡하죠? 저는 3천 골드나 넣었단 말이에요! 펜리스 남작이 지면 큰일 나요!”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맘 편해요.”
“진짜 내 돈이 아니어서 그래요!”
“……예?”
남의 돈까지 끌어온 탓에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걱정만 한다고 답이 나옵니까? 희망을 품고 힘을 내 봅시다!”
“그 말이 옳습니다! 저희 다 같이 영차영차 해 보죠! 영!”
“차!”
“영!”
“영차고 나발이고 저희 다 좆 된 거 같습니다만…….”
물론 마음을 비운 사람도 없는 건 아니었다.
“자자,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그거 다 몸에 안 좋아요.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가정을 돌아보고 일상생활을 돌아보고 그전에 누리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닥쳐.”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와장창!
마음을 비운 사람과 분노한 사람과의 다툼도 끝이 없었다.
술병과 술잔이 연회장 여기저기서 날아다녔다.
그러던 중, 누가 불을 냈는지, 아니면 그저 초가 떨어져 일어난 사고인지 연회장 한쪽 구석에서 불길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이다! 불이야!”
“모두 피하세요! 화재입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한 귀족이 물었다.
“호재인가요?”
“화재예요! 정신 차리세요!”
매일 같이 이런 난장판이 이어지니 메리엘과 로잘린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로잘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메리엘에게 물었다.
“혹시 현금 좀 남는 거 있으세요?”
“뭐? 나 식량 사느라 다 썼어! 더 넣을 돈 없어!”
메리엘이 기겁하자 로잘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더 투자하라는 게 아니라……. 실력 있는 사람이라도 몇 명 좀 사서 전쟁터에 보내려고요.”
“왜? 카발디 백작을 암살이라도 하려고? 그게 되겠어?”
“그런 게 아니라, 전쟁에서 질 거 같으면 펜리스 남작이라도 바로 구해 와야죠. 가능하면 사제도 하나 같이 보내고요.”
“쓸 만한 용병이야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사제는 힘들지 않을까?”
신전은 마탑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참여할 수가 없다. 법을 떠나서 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전쟁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도 오직 이교도와 사특한 것들에 대한 싸움만 허락할 뿐이었다.
애초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들의 수도 무척 적기에, 시골 영지에는 사제도 없이 교리를 전파하기 위한 소수의 전도사만이 머무는 형편이었다.
로잘린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현금이 있는지 물어본 거예요. 기부금을 좀 주면서 지나가는 길에 구했다고는 식으로 포장해 달라고 하면 받아 줄 테니까요.”
“으음, 그래. 우기면 될 거 같기도……. 하지만 후작님이 알면 곤란해질 텐데?”
“그러니까……. 상황을 지켜보다가 남작이 질 거 같고 위험해지면 구해 주는 거죠.”
전쟁 중에 끼어들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상황이라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사제가 끼어들 수는 있다.
비록 그게 귀족들이나 쓸 수 있는 편법이라도.
“직접 전쟁에 개입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우리는……. 그냥 전쟁에 진 귀족을 구해 줬을 뿐이에요. 설사 펜리스 남작이 항복하지 않아도 우리 쪽에서 대리할 수 있으니까요.”
로잘린은 일단 지셀이 패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짰다. 괜찮은 실력자들을 보내 어떻게든 지셀의 목숨만은 붙여 놓으려는 계획이었다.
위험한 상황이면 일단 지셀을 구해 놓고 후견인의 자격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 된다. 브랜포드 후작가의 이름을 판다면 카발디 백작도 무작정 덤벼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냥 후작가에서 살면 되잖아? 어쩌면 데릴사위로…….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그런 이상한 놈과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화장품 기술은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 외에도 후작가의 권위, 자신의 신용과 명성, 상단이 보게 될 피해까지 생각하면 무조건 지셀은 살려야 했다.
메리엘도 로잘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타이밍만 잘 잡는다면 전쟁이 끝났다는 핑계로 중재가 가능할 터였다.
“그, 그래. 하지만 그러려면 정말로 실력 있는 자들을 구해야 하는데, 꽤 많은 돈이 들 거야. 거기에 사제까지 구해야 하잖아? 다들 현금 아니면 안 받을 거라고.”
위험한 일이니 대금은 전부 현금으로 받을 게 뻔하다. 언제든 몸을 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제들은 괜히 엄한 거 받고 구설에 오를까 봐 언제나 현금을 선호했다.
메리엘이 조심스레 지적했지만, 단단히 마음먹은 로잘린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련해야죠. 펜리스 남작이 죽으면 우리는 진짜 더 큰 손해를 볼 테니까요.”
“알았어. 나도 최대한 융통해 볼게.”
그렇게 두 사람은 정말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 구출 및 암살(?) 전문가 열 명과 사제 한 명을 전쟁터로 보냈다.
눈치 잘 보고 끼어들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 * *
화살에 묶여 있던 선전 포고문을 읽고 카발디 백작은 이를 갈았다.
지셀이 내건 전쟁의 명분은 단순했다.
― 핍박받고 있는 나의 ‘소중한’ 영지민들을 되찾고 카발디 백작을 벌하겠노라.
예전 디갈드 백작령에 살던 영지민 중에는 영주의 폭정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간 자들이 꽤 많았다.
지셀은 펜리스를 차지하자마자, 주변 영주들에게 도망친 영지민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었다.
당연히 영주들은 무시했다. 알아서 일꾼들이 굴러들어 왔는데 그걸 누가 돌려준다는 말인가?
다들 파악이 안 된다, 모르는 일이다, 그런 적 없다 등등의 핑계를 대며 송환을 거부했다.
카발디 백작도 주변에서 도망쳐 나오는 자들을 죄다 잡아다 철광산에서 일을 시키고 있었다.
어차피 허가 없이 영지를 떠난 죄인들이니 죽든 말든 노예처럼 부리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을 명분으로 삼을 줄이야.
“이 건방진 새끼, 감히 이딴 걸 명분으로 들이밀다니! 내가 그리도 우습게 보였단 말인가?”
지셀도 그 이후로 항의하거나 요청한 적이 없었기에 잊고 있었다. 힘도 없는 애송이가 그럼 그렇지, 하고 별생각 없이 넘어갔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주변 영주들에게 언제든지 전쟁을 걸 수 있도록 빌미를 먼저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설마 이런 걸 다 예측하고 요청했던 건가? 아니, 그건 말도 안 되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억지 명분을 만든 거겠지.”
카발디 백작은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처음에 대군을 보고 기겁하긴 했지만 사실 상황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밀어 버리고 펜리스를 점령하면 쉽게 식량을 구할 수 있다.
물론 나가서 싸우기는 상대방의 머릿수가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설사 이겨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뿐이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저놈도 그걸 아니까 포위만 하고 공성을 시도하지 않는 거겠지.”
펜리스군은 공성 병기조차 가져오지 않았다.
강력한 무장병을 포함한 카발디군이 성벽을 끼고 싸운다면 저쪽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포위만 하고 식량이 떨어져 이쪽이 굶어 죽기를 바라는 게 분명했다.
카발디 백작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전쟁의 패배 따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자존심이 상했을 뿐이다. 저런 놈이 자신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주었다.
“내가 영주 자리에는 오를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핏덩이 놈이……. 저따위 얕은수로 나를 도모하려 하다니!”
얼마나 자신을 얕보았으면 공성 병기도 없이 기다릴 생각만 했을까?
“후…… 이 굴욕은 제대로 갚아 줘야겠군. 저놈 아비한테도 말이야.”
카발디 백작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후계자를 잘못 키운 죄를 명분 삼아 아예 페르디움까지 짓밟을 생각이었다. 자신을 우습게 보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다들 굶고 있는 탓에 날이 갈수록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우리 영지의 소식을 듣는 대로 데스몬드 백작이 움직이겠지.”
이번에는 카발디 영지에 소홀하게 굴기는 했지만, 데스몬드 백작은 절대 이곳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철광석을 수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작가도 분명 친왕파와 협상에 들어갔을 것이다.
카발디 백작은 친왕파가 절대 이번 일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멍청한 놈. 요새 명성을 조금 쌓았다고 한심한 짓만 골라 하는구나. 정말 저따위 방법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자신은 북부의 강자이자 공작가의 비호를 받는 귀족이며, 대영주인 데스몬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친왕파의 고위 귀족도 함부로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미친놈은 그것도 모르고 그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쳐들어온 게 분명했다.
“도박 수만 둘 줄 알지, 정치고 전쟁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로군.”
자신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데스몬드에서 지원군이 오면 손쉽게 저놈들을 박살 낼 수 있을 테니까.
공작가가 비호해 주기도 할 테니 친왕파도 끼어들지 못할 게 분명했다.
“네놈의 운도 여기까지다. 반드시, 반드시 네놈과 네놈 아비까지 피눈물을 흘리게 해 줄 테다.”
카발디 백작은 분노를 억누르며 기다렸다.
저 애송이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다짐하면서.
* * *
카발디 백작이 이를 갈며 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 펜리스군의 분위기는 점점 더 여유로워졌다.
특히 기사들은 부러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허세까지 부렸다.
“아, 이번에 몸 좀 풀어 보나 했는데. 마나를 익힌 나의 검이 무서운가 보지?”
“저놈들 성에 콕 박혀서 나오지를 않네. 완전히 꼬리 만 개 아니냐? 하긴, 우리가 좀 강하긴 하지. 크크큭.”
“그냥 이렇게 기다리기만 해도 이기는 거잖아? 이거 완전 개꿀인데? 으하하하!”
적들은 식량이 없어 오래 버틸 수 없다. 싸우러 나오고 싶어도 이쪽 병력이 더 많다.
분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는 상황일 게 분명했다.
그런 사실이 기사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자, 병사들 사이에도 느긋한 분위기가 퍼졌다.
갑작스럽게 끌려와 긴장했던 병사들도 안도감에 안색이 밝아졌다.
싸우지도 않고 전쟁에서 이긴다? 이런 건 절대 못 참지.
“이야, 우리 영주님이 정말 좋은 시기를 잡았어.”
“나도 이상한 영주님이라는 소문은 들었는데, 사실 되게 똑똑하신 분 아냐?”
“그렇지! 전쟁에서 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분인데 엄청나게 뛰어난 분이시지!”
안 싸워도 되니 칭찬이 절로 나온다. 몸도 편하니 너무 좋다.
거기에 총관인 클로드가 빈틈없이 보급을 보내주고 있으니 배도 곯지 않았다.
“이런 전쟁이라면 몇 번이든 하지!”
병사들은 연일 지셀을 칭송하기 바빴다.
강제로 끌려온 드워프와 마법사들도 천막 안에서 편히 쉬면서 여유를 즐겼다.
“아, 뭐야. 괜히 겁먹었네. 이럴 거면 우리는 뭐 하러 데리고 온 거지?”
“저쪽에서 항복하면 뭐 할 게 있나 보지.”
“어휴, 일도 안 하고 오랜만에 쉬니까 너무 좋다. 그렇지?”
과다한 업무에서 갑자기 해방된 드워프와 마법사들은 연신 웃음꽃을 피웠다.
며칠간 편히 쉬다 보니 전쟁터도 꽤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모두가 만족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고 있을 때, 며칠 내내 적의 성만 바라보고 있던 지셀이 갑자기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우리는 땅굴을 판다.”
그 말에 모두가 머릿속에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왜요?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이기는데 그런 짓을 왜 해요?’
아무래도 헛소리 주기가 돌아온 모양이다.
영주가 또 이상한 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