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검증은 충분히 됐습니다. (3)
욕망에 빠진 사람은 때로 정확한 예감을 무시하고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 즈발터와 란돌프가 그랬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한 상황 앞에서는 경험도, 본능에 따른 직감도 아무 소용 없었다.
두 사람은 신이 나서 바로 기사들을 소집했다.
“근래에 지셀이 작은 깨달음을 얻어 가문의 마나 연공법을 개량했다고 한다. 이전에 쓰던 방식보다 더 효과가 좋다고 하니 다 같이 수련해 보도록 하자.”
즈발터의 말에 기사들은 웅성거리며 불안해하는 기색을 띠었다.
대공자가 제법 강하다는 건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워낙 기행이 심하고 파격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인지라, 그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마나 연공은 조금만 흐름이 뒤틀려도 큰 곤경을 치르는 섬세한 분야다.
그런 걸 저 막 나가는 대공자가 개량했다니 불안부터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사들의 불안감을 느낀 란돌프가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영주님과 내가 충분히 검토한 사항이다! 안전하게 수련을 진행할 생각이니 전혀 겁먹을 필요 없다!”
그제야 기사들은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주와 기사단장이 검토했다면 믿을 만하다. 이것이 바로 신용의 힘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기사는 영주와 기사단장의 장담도 믿지 않았다.
바로 마수의 숲 경비대장인 스코반이었다.
‘뭐? 대공자가 개량했다고? 아니, 그 인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걸 익혀 보겠다고? 다들 미친 거 아냐? 학습 능력이 없어?’
그는 호메른의 명령에 따라, 군수 물자를 보급할 겸, 지셀이 숲 하나를 들어먹었다는 소식도 전달할 겸 북방 요새에 와 있던 참이었다.
요새에 도착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란돌프가 이왕 온 김에 경계 근무 좀 서고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이곳에 죽치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 기사가 부족한 영지다 보니 다들 이런 식으로 보직과 상관없이 이런저런 일을 강제로 맡곤 했기에 당시엔 얌전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설마 그사이에 지셀의 음험한 거동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대공자님이 개량했다고 했으니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겠지. 그런데 분명 뭔가 반작용이 있을 거야.’
스코반은 페르디움의 기사들 중 지셀과 가장 많이 엮였던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체감했던 그는, 분명 지셀이 던지고 간 마나 연공법도 평범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다른 사람 다 익히고 문제점이 해결된 뒤에 익혀도 늦지 않아. 난 빠진다!’
결심을 한 스코반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영주님! 저는 이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영지에 기사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더 검증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대답은 즈발터가 아니라 란돌프에게서 나왔다.
“야, 너 마수의 숲 경비한답시고 맨날 빈둥빈둥 놀잖아. 가긴 어딜 가. 네가 이거 익히고 돌아가야 영지에 남은 기사들한테 전수할 거 아냐. 아니, 그리고 내가 검증했다는데 뭔 검증이 더 필요해? 까라면 까, 이 새끼야.”
스코반은 바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란돌프는 지셀처럼 큰 사고만 안 쳤다 뿐이지, 성질 더럽고 말이 안 통하기로는 지셀과 막상막하인 사람이다.
길 가는 데 산이 있어 방해된다 싶으면 기사들한테 삽 한 자루만 쥐여 주고 산을 깎게 할 정도로 저돌적이고 무식하다.
그런 사람이 저리 말하니 도망가기는 글렀다.
스코반은 울상을 지은 채 다른 기사들과 함께 지셀표 마나 연공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익힌 마나 연공법은 다 제각각이었다.
페르디움의 마나 연공법을 익힌 자도 있었고, 자신의 가문이나 스승을 통해 다른 것을 익힌 자도 있었다.
하지만 지셀은 기존에 익힌 마나 연공법을 개량된 마나 연공법으로 쉽게 바꾸는 방법까지 책자에 설명해 두었다.
그 방법을 따르니 개인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새로운 마나 연공법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오오, 이거 제법 괜찮잖아?’
‘기존 마나 연공법과 충돌하지 않고 이렇게 쉽게 갈아탈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나?’
‘확실히 마나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돼.’
새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효과가 확실하게 눈에 보였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조금씩 수련의 강도를 올려 갔다.
익히는 재미가 있으니 손을 떼기 어려웠다. 특히 전보다 파괴력이 월등하게 강해진 것이 보이니 수련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다.
‘아, 강해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참냐고. 저 새끼보다 내가 더 강해져야지.’
강함이야말로 기사의 미덕이다. 한번 경쟁이 붙자 그 속도는 더욱더 빨라져 갔다.
다들 미친 듯이 새로운 마나 연공법을 수련하니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즈발터와 란돌프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다들 이렇게 수련에 빠진 게 얼마 만인가? 지셀이 아주 큰 일을 해냈어. 정말 효과가 있을 줄이야. 대견스럽구나.”
“크흐흐, 형님! 저는 야만인들하고 한번 붙고 싶어서 벌써 몸이 근질거립니다. 이놈들 요새 왜 안 들어오지?”
두 사람은 이미 상급의 기사라 발전 속도가 조금 더디긴 했다. 하지만 조금씩 벽을 허물고 있는 것이 느껴지니 그 정도로도 만족스러웠다.
아예 막힌 것과 길이 보이는 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으니까.
그렇게 다들 미친 듯이 수련에 전념한 지 한 달째가 되던 날.
실력이 가장 부족했던 몇몇 기사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에에엑!”
“쿨럭!”
마나를 사용하면 할수록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기사들이 늘어났다.
조금 쉬면 괜찮아졌지만, 수련을 멈추면 쌓인 마나가 강제로 몸 밖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렇게 되니 다시 피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마나를 소모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마치 폭발하는 듯한 강력한 힘을 동반했기에 몸이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마나 소모를 막으려 해도 제대로 제어조차 되지 않으니 종국에는 모든 기사들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기사들이 전부 쓰러지자 북방 요새는 난리가 났다.
안절부절못하는 즈발터에게 란돌프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안색도 즈발터와 마찬가지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형님……. 우리가 지셀 그놈한테 속은 거 같습니다.”
“속다니? 뭘 속았단 말이냐?”
어리둥절해하는 즈발터에게 란돌프가 자신의 추측을 말해 주었다.
“이놈이 마나 연공법에 수작질을 부린 게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죽이려고요!”
“우리를 죽인다고? 대체 왜?”
“우리가 다 죽어야 그놈이 페르디움 영지를 차지할 거 아닙니까! 명분을 손에 쥔 후계자는 그놈밖에 없으니까요! 이 패륜아 새끼!”
즈발터는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이유였다.
방법도 완벽했다. 독살도 아니고 죄다 스스로 수련을 하다가 죽으면 완전 범죄나 마찬가지였다.
피눈물을 흘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약간 믿었던(?) 아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절망하던 즈발터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괜찮잖아?”
괜찮다고는 해도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다. 마나를 강력하게 방출하면 속이 진탕되고 입가에 피가 한 줄기 정도는 흘렀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문제라 할 만한 게 없었다.
‘내상 문제는 그저 갑작스러운 마나 상승에 의한 반동 정도일 수도 있는 거지.’
즈발터는 정말로 마나 연공법이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도 확실히 조금이나마 강해지고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란돌프는 즈발터와 생각이 달랐다.
“우리는 상급 기사지 않습니까! 다른 기사들보다 마나 양도 많고 더 강하니까 아직 버티고 있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도 쓰러질 겁니다!”
란돌프의 절규에 즈발터는 반박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무리 권력이 중요하다지만 가문의 기사들까지 다 죽일 생각을 하다니!
‘어차피 물려받을 영지인데 그걸 못 기다린다는 말이냐! 아아,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 여보, 곧 당신을 보러 갈 거 같소.’
하지만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건방진 아들놈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한다.
바로 모든 병력을 모아 펜리스 영지에 정의의 철퇴를 내리쳐…….
“영주님! 영주님!”
그때, 가신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서신을 건넸다.
“이게 무엇인가?”
“대공자가 보내온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이니 바로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놈이 선전 포고까지 했다는 말이냐!”
“아뇨,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저도 아직 무슨 내용인지 모릅니다.”
즈발터는 바로 지셀이 보내온 서신을 확인했다. 시선이 내려갈수록 그의 표정도 점차 기묘해졌다.
거기에는 지금 사태를 예측이라도 한 듯, 마나 연공법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이 적혀 있었다.
요약하자면 마나를 열심히 쌓아서 일정 경지를 넘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새 다들 육체 수련을 게을리하는데,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고 싶으면 육체 단련도 병행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죽기 싫으면 육체와 마나 모두 죽어라 수련을 해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끄으응! 그러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즈발터가 투덜거리며 시선을 다음 문장으로 옮겼다.
[미리 설명했다면 아무도 개량된 연공법을 배우지 않으려고 했겠죠. 빠르게 강해져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투덜거림에 답하기로 하는 듯한 문장에 즈발터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젠장! 다들 일어나라! 죽기 싫으면 정말 죽어라 수련해야 해! 안 그러면 진짜 죽는다! 란돌프 너도 일어나! 울지 말고, 이 새끼야!”
언제나 근엄하게 행동하던 즈발터도 마음이 급하니 말이 험하게 나왔다.
아프다고 누워만 있으면 진짜로 약해져서 죽는다. 고약해도 이렇게 고약한 마나 연공법은 생전 처음 보았다.
지셀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여전히 속에서 열이 끓어올랐다.
이제 북방 요새의 기사들은 죽어라 수련하면서 피곤해진 몸으로 야만인들까지 상대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세에 다시 없을 극한의 수련 환경에 빠져 버린 것이다.
스코반은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어쩐지 존나 하기 싫더라……. 그러니까 내가 엮이지 말자고 했잖아…….’
안타깝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었다.
* * *
북방 요새에서 난리가 났던 그때, 펜리스 영지는 내기 결과를 확인하느라 시끄러웠다.
영지의 가신들이 하나둘 시연 장소로 모이기 시작했다.
총관인 클로드는 괜히 손톱을 깨물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옆에 서 있는 웬디에게 물었다.
“불가능하겠지? 보통 마나를 익히려면 얼마나 걸려?”
“천재가 아니면 최소 몇 년은 걸립니다.”
“그렇지? 그런데 용병들이나 새로 온 놈들 중에 천재는 없었잖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 맞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영주님이 그간 한 일은 전부 비상식적이었습니다.”
클로드도 바로 그래서 불안했다.
지셀은 언제나 비상식적인 일을 해내서 상식적인 사람들을 멍청이로 만들었다.
클로드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이번엔 정말 불가능할 거야.’
중간중간 슬쩍 기사들을 확인해 본 바로는 다들 병자처럼 맛이 가 있었다. 분명 무리한 수련 때문에 몸이 상한 게 분명했다.
가신들이 모두 모이고 마지막으로 지셀까지 시연장에 참석했다.
지셀은 여유로운 태도로 모두를 둘러본 뒤 손을 들고 선언했다.
“총관과의 약속대로 기사들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겠다. 이 시간 이후로는 출정에 반대하는 의견은 받지 않겠으니 그리 알도록. 기사들을 들여라.”
지셀의 말에 그간 수련을 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시연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을 본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허, 이럴 수가…….”
“어떻게 저런 상태로…….”
멋있어서 놀란 게 아니다. 웬 해골들이 잔뜩 들어오니 놀란 것이다.
기사들은 모두 초췌하고 피골이 상접한 모양새였다. 오며 가며 가끔 봐서 상태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상태가 더 심각해진 거 같았다.
지셀은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자, 총관이 호명해서 확인하도록.”
기사와 무기를 직접 선정해서 시연시키는 역할은 클로드가 맡기로 했다.
워낙 의심이 많은 놈이라 지셀도 흔쾌히 그것을 허락했다.
클로드는 신중하게 고민하더니 그나마 확실하게 아는 놈을 불렀다.
그가 아는 한, 고든은 몸은 좋지만 마나 연공법을 빠르게 이해할 능력은 없었다.
“고든! 고든이 나와서 시연을 해라!”
이름이 불리자 웬 비쩍 마른 대머리가 비틀거리며 앞에 나섰다.
클로드는 대머리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뭐야? 너 말고 고든 나오라니까? 근육 빵빵한 오줌싸개 고든 말이야!”
“제가 고든인데요…….”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니 고든이 맞았다.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찾던 클로드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몸이 왜 그래?”
고든은 울먹이며 말했다.
“몸이 너무 아파서 근손실이 왔어요…….”
“…….”
동정하는 눈빛을 내비치던 클로드는 고든에게 검 하나를 넘겼다.
“이걸로 저기 있는 것을 베어 봐라.”
클로드가 가리킨 곳에는 이번 내기에 쓰려고 일부러 만든, 길고 두꺼운 철 주괴가 하나 놓여 있었다.
시연장에 있는 모두가 잔뜩 긴장해서 숨을 죽이고 고든을 주시했다.
그는 검을 들고 철괴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흡!”
고든이 정신을 집중하자 그가 든 검신에 희미한 푸른 빛이 서렸다.
그리고 검날이 단번에 철괴를 내리쳤다.
카가가가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