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3)
“으하하하!”
갈바릭은 크게 웃었다.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지셀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보시오, 영주. 아직 젊어서 잘 모르나 본데, 설계도가 없는 개념은 망상에 불과할 뿐이오. 구현하더라도 쓰기 어려운 물건 또한 마찬가지지.”
갈바릭의 말에 다른 드워프들도 웃었다.
“맞아, 귀족들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바라는 것만 많다니까.”
“어떤 귀족은 약초의 약효를 뽑아내는 도구를 만들어 달라고 하기도 했지. 그냥 포션이나 사서 쓰라고 했어. 내가 무슨 연금술사야?”
“내가 있던 곳의 영주는 땅이 좁은데 거주지를 늘릴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더라고. 아니, 내가 무슨 신이야? 땅을 어떻게 늘려.”
“수확량을 늘려 보겠다고 마법으로 움직이는 쟁기를 만들어 달라던 귀족도 있었지. 아니, 그런 걸 만들어서 뭐 하냐고. 애초에 땅하고 종자가 형편이 없는데.”
드워프들은 이전에 겪었던 귀족들을 까 내리며 혀를 찼다.
갈바릭은 지셀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쓸모없는 물건을 만드는 걸 무척 싫어하오. 영주가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장난감 수준이겠지.”
갈바릭이 말을 마치자 주변에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들 눈만 깜빡이며 갈바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콜록.”
한 기사가 소리 죽여 내뱉은 기침 소리를 제외하면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응에 갈바릭은 조금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왜? 왜 다들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내 말이 이상해? 아, 여기 진짜 이상한 영지네.”
지셀은 그런 갈바릭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인간들하고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장인이니 예술혼이니 읊어 대면서 정작 사고방식은 인간보다 더 꽉 막혔네. 그런 상상력으로 작품을 만들 수는 있어?”
“뭐요?”
“뭐, 이해해. 매일 같은 일만 하면 무의식중에 그 정도를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하게 되거든.”
“지금 무슨 말을…….”
“하지만 그래서야 그냥 손재주 좋은 기술자에 불과하잖아?”
“감히 우리를 모욕하다니!”
드워프들은 분노했다. 어떤 종족도 자신들의 기술은 따라올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노예의 신분임에도, 누구도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눈앞의 젊은 영주는 진심으로 자신들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시끄럽다, 이것들아! 대표는 나야!”
버럭 소리를 질러 드워프들을 잠재운 갈바릭은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의 자존심을 건들지 마시오. 그래 봤자 영주에게 좋을 게 없소이다.”
실제로 드워프들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한 종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노예 신분은 받아들였지만 하찮은 대우만큼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쓸 만한 병장기라도 얻고 싶으면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할 것이다.’
드워프들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셀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따라와, 재미있는 걸 보여 줄게.”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친 드워프들은 머뭇거리다 지셀을 따라갔다.
지셀이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거대한 공방이었다.
“이건……!”
공방에 도착한 드워프들은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향긋한 냄새와 약초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공방을 가득 채운 거대한 기구들 사이로, 흰색의 작업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화장품을 만드는 공방이다. 정확히는 피부 미용 크림이지.”
“화장품?”
지셀의 말에 드워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품이 뭔지는 안다. 귀족들이 식사보다 더 신경 써서 챙기는 사치품의 일종이다.
어떻게 이런 시골 영지에서 그런 고급 상품을 만들고 있다는 말인가?
의아해하는 드워프들에게 지셀이 설명을 이어 갔다.
“우리 영지의 화장품은 왕국에서 최고로 꼽히지. 지금 수도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 엄청난 매출로 너희들을 사 온 거고.”
“뭐……. 돈 많은 거 자랑하려고 보여 주는 거요?”
“응.”
“…….”
“쯧쯧, 완전히 머리가 굳었네. 잘 봐라. 저 도구들을 이용해서 어떻게 화장품을 만들고 있는지. 비밀이지만 특별히 보여 준다.”
그제야 드워프들은 정신을 차리고 공방 안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화장품 설비를 뜯어보던 드워프들의 낯빛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자도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지?”
“정말 약초의 효능을 엄청나게 끌어내고 있잖아!”
“이게 정말 되는 거였어?”
드워프들은 제작에 있어서는 신에 비견되기도 하는 종족이다.
잠깐 설비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어떤 효과를 내는지 금세 파악할 수가 있었다.
중간중간 새겨진 마법진들의 역할도 설비의 구조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귀족들 밑에서 일하는 동안 마법사들과도 많은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흥분한 드워프들은 곧 한데 모여앉아 토론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렇게 순간적으로 열을 가하면 유효 성분이 파괴되는 부작용은 최대한 줄이면서 농축액을 만들 수 있어. 불순물은 따로 처리하는 건가?”
“여과기는 조금 아쉽군. 구멍을 지금보다 좁게 만드는 대신 여러 개를 뚫으면 효과가 더 좋을 거 같은데.”
“여기서 순간적으로 냉각을 시켜서 이런 제형을 만드는 거로군! 설비는 조악하지만, 발상은 정말 아름다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떠들던 드워프들은 동시에 지셀을 보며 외쳤다.
“아니, 이런 게 진짜 있네?”
“누구요! 누가 이런 생각을 한 거요!”
“제발 만나게 해 주시오! 이걸 만든 천재를 만나게 해 달란 말이오! 이 영지에 있는 게 맞소?”
드워프들의 진심이 빚어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지셀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갈바릭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떠듬거렸다.
“영주가…… 이걸 만들었다고?”
“그래, 바로 이 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지.”
거짓말은 아니다. 미래에서 베껴 온 지식이지만 어쨌든 지셀의 머릿속에서 나오긴 했으니까.
그의 당당한 태도에 드워프들은 완전히 설득당했다.
드워프 중 몇 명이 상기된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이거 내가 개량 좀 하게 해 주시오!”
“조금만 손을 보면 지금보다 몇 배나 더 효율이 높아지게 개량할 수 있소이다!”
“영주님! 보기만 해도 내 속이 미칠 거 같소이다! 제발!”
드워프들은 답답해했다. 왜 이런 뛰어난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설비는 이따위로 만족하고 있다는 말인가!
의욕이 넘치는 드워프들을 보며 지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나 보네. 아주 좋은 자세들이야. 지금보다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다는 거지?”
“그럼! 맡겨만 주시오! 최소 두 배 이상은 나오게 해 드리겠소이다!”
“그런데……. 아직 일할 마음이 안 드는 사람도 있는 거 같네.”
모두가 자존심을 굽힌 건 아니었다.
갈바릭을 비롯해 드워프들의 절반 정도는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들도 공방의 설비들을 보고 속으로는 감탄하긴 했지만, 영주와의 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셀은 그들을 보고 피식 웃더니 다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따라와, 다른 것도 보여 줄게.”
지셀이 그들을 이끌고 향한 곳은 최근에 지은 공동 주택 단지였다.
건축에 관심이 있던 몇 명의 드워프들이 곳곳을 구경하다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집이 진짜 있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단순한 탑상형 주택이 아니잖아?”
지금의 공동 주택에는 특별히 뛰어난 기술이 들어가지 않았다. ‘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정관념을 비틀었을 뿐이다.
그들은 다시 집을 두고 토론을 시작했다.
“이 부분은 대리석으로 만들면 더 낫지 않겠어? 그러면 내구성과 예술성이…….”
“난방을 벽난로로 하는 것보다는 곳곳에 열기가 퍼질 수 있게 내장재를 바꿔서…….”
“배수관은 이것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바꿀 수 있어!”
드워프들에게 그간 잊고 있었던 영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거다, 이런 자극이 필요했다.
실컷 토론을 하던 그들은 지셀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거 우리가 더 개량할 수 있게 해 줘!”
이미 눈이 돌아간 드워프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갈바릭은 떠듬거리며 물었다.
“이, 이것도 영주가 생각한 것이오?”
“그럼, 바로 이 몸이 만든 것이지.”
“도,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그들이 놀라는 건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건 상상을 실제로 구현한 점이다.
선구자는 그래서 역사에 남고 오래도록 그 이름이 회자되는 것이다.
지셀은 씨익 웃으며 다시 손짓했다.
“따라와, 다른 것도 보여 줄게.”
이번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대규모 농장이었다. 이미 한 번 수확을 한 뒤였지만 벌써 밀들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우, 우와아!”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 밀밭을 보며 드워프들은 입을 쩍 벌렸다.
밀밭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뿐인가? 밀 하나하나의 크기가 기존의 것을 몇 배나 뛰어넘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 척박하다고 소문난 북부의 땅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지셀은 손가락으로 지평선을 따라 그으며 말했다.
“이 밀은 일 년에 최소 세 번 이상 수확할 수 있어. 곧 수확기니, 식량이 얼마나 생산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눈앞에 증거가 펼쳐져 있으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갈바릭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도…… 영주가 한 것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대충 룬스톤을 이용해서 종자를 개량하고 지력을 키운 거야. 중요한 건 이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거 아니겠어?”
끄덕끄덕.
드워프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사실 농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 특별한 공학적 기술이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없었던 개념을 떠올린 것, 그리고 그 상상을 현실에 구현해 낸 능력은 감탄할 만했다.
화장품과 공동 주택, 농사까지. 이걸 전부 한 사람이 만들어 냈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생활과 인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발명이었다.
그런 것을 이미 몇 개나 만든 사람이니, 앞으로 새로운 발명품을 또 얼마나 많이 생각해 낼 수 있겠는가.
드워프들은 주먹을 꾹 쥐었다. 오래도록 창작욕을 누르고 있었던 그들의 마음에 지셀의 발명품들이 불씨를 댕긴 것이다.
만약에 이런 작업에 처음부터 같이 참여했으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지셀은 흥분으로 콧구멍까지 벌렁거리는 드워프들을 보며 말했다.
“어때? 내 머릿속에는 이거 말고도 대단한 계획들이 아주 많아. 실생활에 필요하고, 구현도 가능한 것들이지. 그걸 제대로 만들어 줄 사람들이 필요해서 너희를 데리고 온 거야. 나랑 같이 일해 볼 생각 있어?”
지셀의 말은 그간 창작욕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던 드워프들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그들의 고민에 결정타를 날렸다.
“내가 알고 있는, 남들이 모르는 지식과 기술도 알려 줄 수 있어.”
지셀은 갈바릭이 넘어올 거라 확신했다. 그가 겪었던 갈바릭은 기술이라면 환장하는 드워프였으니까. 지금이라고 다르진 않을 터였다.
대답은 즉시 나왔다.
“하겠소!”
갈바릭을 비롯한 드워프들은 호기롭게 외쳤다. 새로운 기술을 알려 준다는데, 더 이상 뻗대 봐야 의미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자 본능이었다.
갈바릭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제발 알려 주시오! 영주가 원한다면 노예라도 되겠소!”
“……너희들은 이미 노예인데.”
“말이 그렇다는 거요! 말이! 진심으로 영주가 하는 일에 함께하겠소!”
“10년간 전폭적으로 협조한다는 거지?”
“물론! 대신 영주도 약속을 지키시오!”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우리를 뭐로 보고! 드워프는 한번 약속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는 종족인 걸 모른단 말이오?”
갈바릭의 호언장담을 들은 지셀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좋아. 열심히 해 주면 나도 약속대로 10년 후 자유롭게 풀어 주도록 하지.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우리도 잘 부탁하오!”
갈바릭이 지셀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펜리스 사람들은 드워프들을 불쌍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