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우리 한번 잘해 보자고! (1)
“멍청한 놈.”
아멜리아는 해럴드의 서신을 받자마자 이를 갈았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적절한 때를 포착하는 것도 능력이다.
해럴드는 분명 유능한 사람이지만, 특유의 신중함이 지금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지금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위르겐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베르나프, 넌 어떻게 생각해? 베르나프?”
서신을 노려보던 아멜리아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베르나프는 황홀해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이마를 짚고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사실 베르나프가 본래부터 이렇게 돌대가리였던 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오히려 총명한 편이었다.
하지만 요새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산다.
어떻게 보면 아멜리아의 잘못이나 마찬가지였다. 계획은 다 그녀가 짜고, 베르나프는 아멜리아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게 했으니까.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진 뒤로 베르나프는 시도 때도 없이 아멜리아의 얼굴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좋아서 그런다는데 차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베르나프!”
냐앙!
“네? 넵!”
아멜리아와 바스테트의 호통에 베르나프가 깜짝 정신을 차리고 침을 닦았다.
아멜리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빠르게 말했다.
“해럴드가 멍청하게 굴고 있으니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겠어.”
“데스몬드 백작은 자신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걸 무척 싫어하지 않습니까? 이쪽에서 마음대로 움직였다간 성공하더라도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허락을 하게 해야지.”
“어떻게요?”
“해럴드에게 거짓 정보를 보낼 거야. 아버지가 병력을 다 모으면 그때는 정말로 손을 쓸 수가 없어. 그자도 시기는 대충 예상하고 있을 테니, 아슬아슬할 때 거짓 정보를 보내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걸.”
“아하, 그러면 똥줄이 타서 더 말리지는 못하겠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 그리고…….”
아멜리아는 서늘한 눈빛을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성공한 뒤에는 해럴드를 건너뛰고 공작가와 직접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겠어.”
그 말에 베르나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해럴드는 언제나 아멜리아를 무시하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서로 간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일단 같은 편이고 뒤에 공작가가 있으니 전쟁까지 갈 일은 없겠지만, 정치적으로 그를 제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뭔가 생각해 둔 방법이 있는 듯했다.
베르나프는 무슨 계획이 있는지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금세 관뒀다.
‘들어 봤자 머리만 아프고 일만 많아지겠지?’
그가 모른 척 입을 닫고 있자 아멜리아가 다른 보고서를 주워 들고 물었다.
“지셀 쪽과 거래는 별문제 없지?”
악티움 상단에서 지셀과 거래해도 괜찮을지 물어봤을 때, 아멜리아는 큰 고민 없이 허락했다.
지금은 지셀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반란을 성공시키고 상단을 키우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녀는 필요하다면 적과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멜리아는 별생각 없이 확인차 물은 것이었으나, 베르나프는 조금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네, 예상대로 식량과 자재,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그쪽에서 자꾸 가격을 1골드씩 깎는다고 합니다.”
“뭐? 1골드? 몇백 골드가 아니고?”
“네, 1골드요.”
“왜?”
“모릅니다. 그냥 무작정 깎아 달라고 한답니다. 그것도 딱 1골드만.”
“…….”
아멜리아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새끼가 지금 나 약 올리는 건가?’
사실 이번 일은 클로드가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벌인 짓이었지만, 아멜리아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한 영지에 미친놈이 그렇게 잔뜩 몰려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일단 내버려 둬. 그리고 수도로 사람을 보내서 지셀의 화장품을 몇 개 구해 와.”
“네? 그걸…… 왜요?”
“어떤지 좀 보려고. 효과가 좋다고 하니 나도 한번 써 보게.”
아멜리아도 지셀에 대한 공작가의 평가와 수도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다.
그놈을 생각할 때마다 열이 뻗치지만, 지셀이 이제는 브랜포드 후작까지 등에 업을 정도로 거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능력이 있는 놈인 줄 알았다면 2만 골드가 아니라 20만 골드라도 줬을 텐데. 짜증 나는 놈이지만 아깝긴 하단 말이야.”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아멜리아의 발언에 베르나프가 살짝 불안해하며 물었다.
“그러면……. 혹시 뭐 다시 약혼이라도 진행할 생각이신가요?”
아멜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어 내는 사람이다.
지셀을 정말 아까워한다면 약혼을 다시 제안할 수도 있었다.
불안감이 절절 흐르는 베르나프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피식 웃었다.
저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내보이기도 쉽지 않을 텐데.
“됐어. 능력이 있어도 재수 없는 놈인 건 사실이니까. 난 내 앞에서 그렇게 뻗대는 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잠깐 침묵한 아멜리아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굳이 그런 놈 때문에 내 사람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겠지.”
그 말에 베르나프는 얼굴이 활짝 폈다. 괜히 또 심장이 벌렁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가끔가다 겨우 듣는 말이지만, ‘내 사람’이라는 말은 왠지 자신에게만 특별히 해 주는 말 같았다.
아멜리아는 자리에 앉아, 바스테트를 품에 안고 와인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뭐 해? 어서 움직여. 거사 준비는 실수 없이 확실히 하도록 하고.”
“넵! 알겠습니다!”
베르나프는 상기된 얼굴로 군례를 취한 뒤 물러났다.
신이 나서 떠나는 그를 보며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좋을까? 참……. 바스테트, 너는 어떠니?”
냐앙.
바스테트도 그녀의 품에 머리를 비비며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아멜리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음미했다.
* * *
수습 기사들의 기초를 잡아 준 지셀은 숨 고를 틈도 없이 클로드를 닦달했다.
다음으로 계획한 일을 진행하려면 한시가 급했다.
“노예상들은 아직 연락이 없나? 어떻게 된 거야? 그놈들 내 돈 먹고 튄 거 아냐?”
“아, 어제도 물어보셨잖아요. 시간이 더 걸린다고 따로 전갈도 왔다니까요. 아무래도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거겠죠.”
이종족 노예는 단 한 명만 데리고 움직여도 비용이 많이 든다.
그들을 노리는 산적들과 영주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하나만 뺏으면 큰돈을 만질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노예상들도 노예를 호위하는 데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셀이 요구한 이종족 노예는 한두 명도 아니었다.
수많은 지부에서 모아 와야 하는 만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드워프들만 빠르게 모아서 먼저 보내라고 신신당부했잖아. 다른 노예들은 다 뒤로 미뤄서라도.”
“그건……. 휴. 신용이 생명줄인 사람들인데 잘 오고 있겠죠. 곧 도착할 겁니다.”
클로드는 투덜거리는 지셀에게 한마디 하려다 꾹 참고 그를 달랬다.
“사람 보내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고 최대한 빨리 오라고 다그쳐. 시간 없다.”
“에휴, 알겠습니다.”
지셀에게 한껏 면박을 받은 클로드가 힘없이 물러났다.
“내일 또 물어봐야겠다.”
지셀은 씨익 웃고선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는 영지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수련을 빼놓지 않았다.
적들의 실력을 알기에,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쿠웅!
“후욱, 후욱.”
무거운 갑옷으로 중무장한 지셀이 검을 들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이 갑옷은 그가 특별히 주문한 것으로, 보통 갑옷보다 훨씬 두껍게 통짜 강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라 그 무게만 수백 킬로그램에 이른다.
드르르르륵.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셀의 몸 곳곳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 쇠사슬 끝에는 각기 무거운 추가 매달려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움직이기는커녕 무게에 짓눌려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의 무게를 온몸에 감아 놓고, 그 상태로 검술을 수련하는 것이다.
쿠웅!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방이 울리며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셀은 온몸을 압박하는 무게를 느끼며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검을 한번 휘두를 때도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않는다.
그것은 수련이 아니라 그저 몸을 혹사하는 짓일 뿐이다
스으윽.
손끝의 움직임까지 신경 쓰며 가장 최적의 위치로 흔들림 없이 검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 동작이 끝나면 다음 동작을 이어 하고,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 동작을 수십, 수백 번씩 반복한다.
보통 사람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수련 방법이지만 지셀에게는 언제나 해 왔던 일과였다.
그는 이런 노력으로 자신의 재능을 뛰어넘고 한계를 돌파했다.
‘다시 한번.’
드드드득.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몰려온다. 근육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버텨라!’
지셀은 이를 악물고 참아 내었다.
근육이 찢어지고 회복되는 과정에서 더 질기고 단단하게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회귀 후 새로 얻은 재생력 덕분에 어지간한 상처는 순식간에 나았다.
즉, 지금 이 순간에도 지셀의 육체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상처가 크고 많아질수록 소모되는 마나의 양도 커졌지만, 지셀은 피로한 몸이 회복하는 동안 영지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훈련을 병행했다.
재생력만 믿고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몸이 망가질 것을 알기에, 지셀은 항상 아슬아슬한 지점까지만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은 언제, 어디서 멈춰야 가장 효과가 좋은지 본능적으로 알려 주었다.
‘조금만 더.’
그러나 비록 효과는 확실할지언정, 어지간한 근성과 정신력으로는 해낼 수 없는 고통의 수련이었다.
멈추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지셀은 강해져야 하는 이유를 상기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전생에는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을 견뎌 냈다.
그리고 지금은.
소중한 것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를 노리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할 적은 해럴드 데스몬드.
북부의 패권을 쥐려면 그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도 북부를 손에 넣기 위해 지셀을 노릴 것이고.
해럴드는 당장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 더욱더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멜리아 레이폴드도, 지셀을 노리고 있을 터였다.
‘아멜리아야말로 북부 제패의 가장 중요한 변수, 양날의 검이지.’
잠재력만으로 따지면 해럴드보다 더 위험한 적일지도 모르지만, 당장 없앨 수도 없었다. 지금 아멜리아를 노리는 건 오히려 손해니까.
적들의 시선을 그쪽에 잡아 놓고 시간을 버는 것이 우선이었다.
‘치울 수 없다면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전생에 레이폴드를 짓밟았을 때, 우연히 아멜리아의 야망과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 점을 잘만 이용한다면 차후의 판세에 큰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녀를 없애는 건 그다음의 일이다.
‘적들이 그 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설령 그들을 해치운다 해도 그 뒤에는 더 위험한 놈들이 도사리고 있다.
일단은 델파인 공작가.
왕국 최고의 세력인 공작가 파벌 또한 지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적이었다.
라울과 발자크 백작은 자신을 위험 요소로 판단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이던.
전생에 대륙 7강에 올랐던, 또 다른 대륙 7강인 용병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도 언젠가 지셀을 찾아올 것이다.
그가 ‘우리’라고 지칭했던 미지의 강자들과 함께.
‘하루라도 빨리 전생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이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카발디 백작령을 차지하고 철광석을 얻는 것 또한 그들과 계속 싸우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일일 뿐이었다.
‘내가 강해져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어.’
그래서 지셀은 이 고통스러운 수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셀이 쓰는 마나 연공법은 폭발적인 위력을 자랑한다. 불안정한 탓에 통제할 수 있는 양이 적다는 단점은, 블러드 퓌톤의 독을 섭취한 덕분에 크게 완화되었다.
이제는 폭발하는 힘을 버틸 수 있도록 육체를 단련할 차례였다.
“후우우!”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른다.
한계에 이른 근육이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쯤 해야겠군.’
지셀이 검을 내려놓고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재생력이 금세 발휘되어 찢어진 근육들이 회복되었다.
그는 고통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면서도 내심 혀를 찼다.
전생의 용병왕 시절에 마법사까지 초빙해 만들었던 전용 수련 공간이 새삼 아쉬워졌다.
아예 공간 자체를 무겁게 해서 전신의 근육을 자극하는 방식을 이용하면 지금보다 훨씬 수련 효율이 높아질 텐데.
‘나중에 바네사에게 부탁해서 광범위 중력 마법이라도 깔아야겠어.’
그렇게 클로드를 닦달하고, 근육을 찢고, 서류를 정리하고, 다시 클로드를 닦달하기를 며칠.
마침내 지셀이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드워프들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