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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66화 (166/269)

166화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5)

수습 기사들은 마나 로드를 강제로 뚫는 고통에 시달리며 매일매일 초췌해져 갔다.

그들은 왜 영주가 유출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이걸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가르쳐.’

‘이런 식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어.’

‘할 줄 알아도 자칫하면 상대방이 죽어 버릴 거야.’

마나 로드가 강제로 만들어졌으니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이론은 모른 채 몸으로만 익힌 셈이었다.

수습 기사들이 초췌해지는 만큼 지셀의 안색도 거무죽죽해졌다. 그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역시 한 번에 해치우는 건 쉽지 않아.’

거칠게 뚫는 거 같아도 지셀 나름대로는 수습 기사들이 죽지 않게 마나를 세심히 조절하고 있었다.

전생과 비교하면 마나 양도 현저하게 적은 탓에, 그 많은 인원을 다 관리하려면 마나 낭비도 없도록 신경 써야 했다.

그런 짓을 매일같이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하고 있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일정을 더 늘려야 하나?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어 버리겠네.’

오죽했으면 지셀도 중간에 포기할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셀은 전생을 떠올리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시간 끌어서 좋을 건 없어. 하루하루가 목숨 빚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전생과 같은 후회를 반복할 수는 없다. 지셀은 이를 악물고 수습 기사들의 마나 로드를 뚫는 것에 집중했다.

이런 지셀의 각오는 말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로 풍겨 나왔다.

수습 기사들은 영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동조되어 같이 이를 악물고 버텨 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그들의 눈빛은 잘 벼린 칼날과도 같이 날카로워졌다.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느끼는 사람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기초적인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지셀은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통이 끝났음을 알렸다.

“지금까지 잘 버텼다. 이제 죽을 거 같은 고통은 끝이다. 앞으로 마나 집속진을 이용해 마나를 쌓고 움직이는 법을 알려주겠다.”

“이야아아아!”

수습 기사들은 환호부터 내질렀다.

몇 번을 반복해도, 몸속을 헤집는 고통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독기를 품고 버티긴 했지만, 솔직히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이제 그런 고통이 끝났다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수습 기사들은 본격적으로 마나 집속진을 이용해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야, 드디어 마나 집속진에 들어와 보네.”

“와, 마나가 정말 엄청나게 느껴지잖아?”

아무리 마나 로드가 생겼다 해도, 마나를 처음 다루는 사람이 마나를 흡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마나 집속진의 어마어마한 힘 덕분에 수습 기사들은 숨만 쉬어도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짜야, 진짜로 내 몸이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어!’

‘고생 끝! 이제 행복 시작이구나!’

다들 마나 집속진에 앉아 헤실헤실 웃었다. 웃음을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됐는데 이걸 어떻게 참냐고.’

수습 기사들은 지셀에게 마나를 통제하고 발산하는 법도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아직은 마나를 다루기가 쉽지 않지만, 지셀이 몸에 새겨 준 마나 로드를 따라 조금씩 움직여 보기도 했다.

조금 지겹기는 해도 전날까지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이건 천국이었다.

‘난 영주님을 믿고 있었다니까. 다 계획이 있으셨던 거지.’

‘어휴, 내 믿음이 부족했네.’

언제 영주를 욕했냐는 듯, 다들 속으로 지셀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원래 기억이라는 게 그렇다. 아무리 고통스러웠어도, 그 고통이 지나고 난 뒤 보상이 좋으면 다 추억으로 남는 법이다.

모두는 앞으로도 이 행복이 지속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수습 기사들은 실제로 마나를 사용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다. 마나를 느끼고 쌓는다 해도 사용할 줄 모르면 의미가 없다. 고든! 앞으로 나와 지금까지 배운 대로 마나를 사용해 봐라.”

지셀의 말에 고든이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그리고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걸 토대로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아! 이런 기분이었구나!’

고든은 마나가 온몸으로 퍼지자 황홀경에 빠졌다.

마나 양은 겨우 쥐똥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육체가 강철같이 단단해지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무엇이든 부술 수 있고 무엇이든 막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신세계!

‘이게 마나지! 지금의 나는 무적이다! 카오르 그 새끼도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내친김에 고든은 모든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 강력함을 더욱더 확실히 느끼고 싶었다.

파아아악!

“오오오! 고든이 저런 기세를 내뿜다니!”

고든의 기세가 커질수록, 다른 수습 기사들도 빨리 해 보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우에에엑! 케에에엑!”

쥐똥만 한 마나를 전부 소모한 고든이 피를 엄청나게 토하며 주저앉았다.

“……?”

다들 당황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셀은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좋아! 잘했다! 바로 그렇게 쓰는 거야! 어때? 강력함이 막 느껴지지?”

고든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지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기? 영주님? 저 지금 아픈데요? 저 피 토했는데요? 힘이 다 빠져 버렸는데요?”

“아, 그건 원래 그런 거야.”

“……원래 그렇다고요?”

“일종의 부작용이야. 가진 마나보다 더 강력한 힘을 내는 대신에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고 할까? 마나를 폭발시키는 방식이거든.”

“부작용……이요? 설마, 마나 쓸 때마다 계속 피를 토하고 쓰러져요?”

“응, 그래도 걱정하지 마. 전부 다 소모해야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데 열심히 수련하고 더 강해지면 괜찮아져.”

“아, 나중에 괜찮아지는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지셀의 말에 고든도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찝찝함이 느껴져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열심히 수련 안 하고 강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셀이 먼 산을 보듯 시선을 돌리며 읊었다.

“이미 몸에 쌓인 마나가 계속 폭발하려고 하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소모될 거야. 그게 반복되면 결국 생명력까지 전부 빨려서 죽는 거지.”

“…… 죽는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그걸 통제할 정도로 빨리 강해져야겠지? 강해질수록 마나를 쓸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난다. 그 말은 즉 수명도 같이 늘어난다는 거지.”

“무, 무슨 그런 해괴한 마나 연공법이 다 있습니까?! 이거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 아니었어요?”

“페르디움 연공법을 기본으로 내가 개량한 거지. 그나마 이건 너희들도 쉽게 익힐 수 있게 부작용을 조금 줄인 거야. 마나가 그렇게 심하게 폭발하는 건 아니거든.”

“아……. 그렇구나. 약한 놈은 죽어 버리는 게 그나마 부작용을 줄인 거구나. 으허허허!”

고든이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다. 구경하던 수습 기사들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헛웃음을 흘리던 고든이 참다못해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처음엔 그런 말 없었잖아요! 이거 사기 계약 아닙니까? 당장 물러 주십쇼!”

지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와, 너 예전에는 자주 사기당했다더니, 이제 글도 배우고 많이 달라졌구나. 계약을 물러 달라니. 너 많이 변했어.”

“으아아아! 뭔 소리예요! 그냥 안 배운 걸로 할 테니까 취소해 달라고요!”

“아, 아무리 나라도 취소는 못 해. 그냥 수련 열심히 해서 얼른 경지를 높이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살고 싶으면 다들 지금보다 강해져야 할 거야.”

고든을 비롯한 수습 기사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런 미친 마나 연공법을 만든 거야?’

‘하긴, 애초에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지. 그걸 까먹었던 우리 죄다, 우리 죄.’

지금까지 영주와 측근들만 정신없이 바빴다면, 이제 수습 기사들도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펜리스 기사단은 문자 그대로 강한 놈만 살아남는 기사단이 되었다.

제명에 죽고 싶으면 진짜 죽어라 수련해서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 * *

데스몬드 백작, 해럴드는 집무실 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셀과의 전쟁에서 잃은 전력을 다시 정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인 탓에,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공작가에서 온 서신의 내용이 유독 그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놈이 브랜포드 후작을 후견인으로 두고, 친왕파에 들어갔다고? 브리반트 대신 지원까지 받기로 했다니…….”

그가 지셀에 대해 마지막으로 받았던 보고 내용은 영지를 뒤집어엎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첩자들이 전부 색출되고 펜리스 영지가 봉쇄되어 한동안 그쪽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지셀이 어느 날 갑자기 수도에 나타나더니 화장품을 팔고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설마 망나니 주제에 무슨 일을 벌일 수 있을까 싶어 무시하고 있었는데, 친왕파에 들어갔을 줄이야.

해럴드는 혀를 차며 서신을 노려보다가, 옆에 있던 부관에게 물었다.

“공작가에서는 지셀을 레이폴드의 기사단장 위르겐과 동급으로 취급하라고 했다. 이 정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저도 믿을 수는 없지만, 공작가에서 아무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해럴드는 양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위르겐은 왕국 전역을 통틀어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괜히 북부 제일의 기사라 불리며 대영지인 레이폴드의 기사단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아니다.

만약 공작가의 평가가 맞는다면 빅토르가 지셀에게 당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셀, 지셀! 이 망할 새끼 때문에!”

공작가는 지셀에 대한 경고만 한 게 아니다.

왜 이런 인물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냐는 질책과 함께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도 함께 보냈다.

실패 없이 승승장구만 하던 해럴드의 인생에 처음으로 겪는 수치였다.

지셀 하나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펜리스 영지에 쳐들어가고 싶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해럴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레이폴드 백작 쪽의 움직임은 어떻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역시 이쪽을 노리는 거겠지. 무슨 명분을 들먹일 건지도 예상되나?”

“페르디움을 공격한 데 대해, 페르디움의 동맹으로서 징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울 것으로 보입니다. 적법한 명분도 없는 저희 쪽에서 제대로 절차도 밟지 않고 몰래 공격한 건 문제라고 주장할 듯합니다.”

“미친 새끼.”

정작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페르디움을 모른 척한 주제에 뒤늦게 동맹이라고 들먹이는 꼴이 역겨웠다.

애초에 해럴드도, 자신이 디갈드를 도왔다는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병력을 나눠서 잠입시켰다 하더라도, 그만한 대군이 움직였다. 상세히 조사하면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의는 승자의 것이니까. 빅토르가 이겼다면 의혹은 의혹으로만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레이폴드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이빨을 드러냈다.

해럴드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하필 이럴 때 움직이기 시작하다니.”

부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아멜리아의 반란을 서둘러야 합니다.”

“끄응…….”

해럴드는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부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이미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아멜리아에게 많은 자금과 수십 명의 기사들까지 지원한 상황이었다.

자칫 반란 전에 레이폴드 백작이 데스몬드에 전쟁을 걸면, 그 엄청난 자원들이 모조리 공중분해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해럴드는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위르겐, 위르겐을 상대할 자가 없어. 빅토르만 있었어도…….”

북부제일검이라 불리는 레이폴드의 기사단장 위르겐. 그를 상대하기 위해 키워 왔던 빅토르가 지난 전쟁에서 죽고 말았다.

위르겐을 정면에서 상대할 자가 없으니, 반란을 일으켜도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번에 아멜리아의 반란마저도 실패하면, 해럴드의 목은 레이폴드가 아니라 공작가에 의해 날아갈 것이다.

가뜩이나 성격이 신중한 편인데 자신의 목숨까지 걸려 있으니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부관도 그가 주저하는 이유를 알기에 최대한 객관적인 어조로 보고를 이어 갔다.

“예측하기로는 두세 달이면 레이폴드 쪽에서 전쟁 준비가 끝날 듯합니다.”

“시간이 촉박한 건 안다. 하지만 실패하면 더 위험해. 아멜리아에게는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라.”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북부에 흩어져 있는 휘하 단체를 모두 소집해 두었으니 허가만 떨어지면 바로 움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해럴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멜리아가 똑똑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모든 판세를 읽고 예측한 듯이 움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흥, 여전히 눈치는 빠른 계집이군.”

“그렇지 않아도 아멜리아 쪽에서 전언이 있었습니다.”

“뭔가?”

“만약 위르겐 때문에 고민이라면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날짜만 잡아 달라고 합니다.”

부관의 말에 해럴드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가장 중요한 일을 신경 쓰지 말라니?

자신의 고민을 감히 아멜리아 따위가 넘겨짚었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쯧…….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아주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힘이 좀 생겼다고 간이 부은 건가? 건방진 년.”

“아무래도 아멜리아 쪽도 급한 모양입니다. 레이폴드 백작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마어마한 병력을 거느리게 될 테니까요.”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아멜리아가 빈 성을 점령해 봤자 소용이 없다.

레이폴드 백작이 대군을 끌고 돌아오기만 해도 낙엽처럼 쓸려 나갈 테니까.

해럴드도 아멜리아가 초조해하는 이유는 이해했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섣불리 도박을 걸 수는 없었다.

아멜리아야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가 실패하면 자신의 목도 달아난다.

“까불지 말고 기다리라고 전해라. 내 허락 없이 움직이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펜리스 영지에 들어갈 다음 이주민들 사이에 첩자들을 섞어 넣어라. 그쪽도 아예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되겠어. 기회가 되는 대로 영지에서 하는 일들을 방해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펜리스 영지가 영지를 봉쇄하는 바람에 외부인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수천의 이주민에 섞여 있는 첩자들까지 모두 솎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부관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해럴드는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요새 갈수록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지셀……. 지셀 페르디움.”

그놈 때문에 모든 계획이 꼬일 대로 꼬여 버렸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짓밟아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해럴드와 아멜리아의 발은 레이폴드에 묶여 있고, 다른 영주들을 움직이고 싶어도 친왕파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기 어려웠다.

한 마디로 운 하나는 타고난 놈이었다.

“운 좋은 놈. 여유를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놔라. 레이폴드만 정리하면 다음은 네 차례다.”

그놈은 겨우 잠깐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죽을 운명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속이 끓어올라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기다려라. 그간 나댔던 걸 반드시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시선을 내리깐 해럴드의 두 눈에서 기필코 지셀을 죽이겠다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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