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1)
브랜포드 후작과 대화를 마친 뒤, 지셀과 일행들은 집사를 따라 로잘린을 찾아갔다.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후작저 곳곳에 병사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었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힐긋대던 벨린다가 지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도련님!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일이 왜 이렇게 커졌냐고요!”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딸의 증상을 치료해 줄 테니 원하는 걸 들어 달라니.
누가 들어도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원래 이런 사람이긴 했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아. 왕국 최고의 권력가에게 강매라니!’
귀족들 중에도 성질 더러운 자들은 사용인들이 작은 실수 하나만 해도 목을 날리곤 한다.
권력이 강한 귀족일수록 더욱더 잔인하게 구는 편이다.
‘마탑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돼. 적어도 마법사들은 함부로 귀족을 죽이려 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브랜포드 후작은 마탑처럼 지셀의 도움이 아쉬운 처지가 아니었다.
‘으으, 요새 별일이 없어서 너무 쉽게 마음을 놓았어.’
최근 지셀이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매번 승승장구하다 보니,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안일하게 넘긴 게 화근이었다.
‘일단 후작가에 찾아오기 전에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말렸어야 했는데!’
벨린다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길리언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숨기며 퇴로를 확인했다.
“일이 잘못될 거 같으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앞장서서 길을 내겠습니다.”
모두의 걱정에도 지셀은 그저 웃기만 했다.
여전히 자신만만한 지셀의 미소를 보고 다들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언제나처럼 어떻게든 성공하길 비는 수밖에.
클로드는 일이 잘못되면 후작의 딸을 인질로 삼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후작 성격을 보아하니 안 통할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납치를 하려면 납치 대상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이야 워낙 유명해서 다른 왕국 사람인 클로드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작 영애, 로잘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클로드는 옆에 가는 집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아가씨는 어떤 분이신가요?”
“북부에서 오셔서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수도에서는 예전에 꽤나 유명하셨습니다.”
“뭘로요?”
클로드가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설마 뭐 검술이나 마법 이런 건 아니겠지? 그러면 인질로 잡기 힘들어진다.
집사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셨습니다. 본가로 돌아가신 후작 부인을 대신해서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직접 챙기셨지요.”
“그냥 집안일 말고 다른 건 안 하셨고요?”
집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호통을 쳤다.
“어허, 후작가의 행사를 단순한 집안일이라 치부하시다니요! 한 영지의 총관이란 분이, 귀족가를 관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십니까!”
“아…… 죄송…….”
클로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웅얼거렸다. 집사가 그를 노려보다 설명을 이어 갔다.
“크흠, 어쨌든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를 후원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집사는 자랑스러워하며 로잘린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씨에 대해 말하자면…….”
지셀의 측근들은 집사의 설명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개 개인이 하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붙은 직함이 많았다.
‘카르데니아 직물공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석공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목수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조각가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유리 공예 길드 후원자.’
‘카르데니아 자연철학 협회 후원자.’
‘카르데니아 천문학 협회 후원자.’
‘상냥한 귀부인들의 독서 토론회 (전)부회장.’
‘상냥한 귀부인들의 차 품평회 (전)부회장.’
……등등.
자연학과 문학, 예술, 철학 단체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지분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야는 지대했다.
병에 걸린 뒤에도 여전히 후원을 멈추지 않고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클로드는 입을 꾹 다물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지금 치료하러 가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거지. 잘못되면 진짜 다 죽겠는데?’
집사는 이뿐만이 아니라는 듯 열정 넘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성격은 또 어떻습니까? 항상 차분하시고 누구에게나 상냥하시고 마음씨도 너무 곱고 여리셔서 험한 말 한 번 입에 안 올리는 분이셨습니다.”
“마음씨가 고우시다니,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클로드는 눈을 빛냈다. 그런 성격이라면 실수를 해도 살려 줄지 모른다.
“그럼요. 수도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주기적으로 생필품을 베풀고 계십니다. 병 때문에 칩거만 안 하셨다면 지금쯤 더 많은 일을 하고 계셨을 겁니다.”
지셀의 측근들은 어느새 집사의 말에 홀려 감탄만 내뱉고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인 브랜포드 후작 못지않게 큰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지셀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표정이 심드렁했다.
아니, 아예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집사의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클로드는 그를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가끔가다 보이는 저 허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가씨의 성격이 좋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벨린다도 다소 마음이 놓였는지 조금 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곧 결혼하신다고 들은 거 같은데 맞나요? 몸이 편찮으신데도 진행할 예정이셨나 봐요?”
브랜포드 후작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들은 수도 없었다.
조만간 후작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문도 이미 수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지셀의 일행들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벨란다의 물음에 집사는 조금 불쾌해하며 답했다.
“솔직히 건강 문제만 아니었어도 그런 가문과 혼담이 오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상대 공자님은 수도에서도 유명한 한량인데……. 크흠, 내가 무슨 말을.”
“아,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결혼을 하시는 건가요?”
“아니,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집사는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클로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좋은 분이시라니, 남편분과도 잘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훌륭한 분이 계신 건 후작가의 큰 복입니다. 하하하.”
쉬지 않고 칭찬을 이어 가던 집사는 그 말에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예전에는 그러셨죠.”
“……?”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클로드가 다시 묻기도 전에 일행은 로잘린의 방 앞에 도착했다.
똑똑.
집사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아직 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목소리를 들은 클로드는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감정을 억누르는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증오와 원한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한데. 목소리가 왜 저래?’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클로드뿐만이 아니었다.
지셀 또한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집사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헛기침을 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후작님의 명령으로 아가씨의 피부를 봐 줄 사람이 왔습니다. 펜리스 남작이라고 합니다.”
“……돌려보내.”
그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집사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후작이 지셀에게 치료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이 저택에서 그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당사자인 로잘린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집사는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했다.
“후작님의 명입니다.”
“……돌아가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문을 열겠습니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네? 대체 뭘 조심…….”
집사는 눈을 꼭 감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날려 문 뒤로 숨었다.
뒤따라온 사용인들도 집사의 뒤로 후다닥 붙었다.
휘리리릭!
문이 열리자마자 어두운 방 안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엥?”
지셀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정면에서 날아오던 물건은 지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 바로 뒤에 있는 클로드에게 향했다.
“으헉!”
클로드는 깜짝 놀라며 눈을 감았다. 다행히 옆에 있던 웬디가 날아오던 물건을 빠르게 낚아챘다.
“촛대?”
웬디의 손에는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촛대가 들려 있었다.
만약 날아오는 걸 그대로 얼굴에 맞았다면 클로드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마음씨가 여리고 곱다며?’
성격이 좋기는커녕, 인간성마저 의심될 정도로 폭력적인 인사법이었다.
귀족가의 영애들은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이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욕을 먹이는 일이니까.
그런데 후작가의 여식이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집사는 민망한 듯 연신 헛기침을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흠흠, 원래는 이러시는 분이 아닌데…… 요새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지셔서…….”
‘문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피했던 걸 보면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사용인들도 집사의 뒤에 바짝 붙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집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려고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방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돌아가라고 했잖아! 또 무슨 치료야!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휘리리릭!
어두운 공간에서 뭔가가 자꾸 날아온다.
촛대, 책, 컵, 그릇, 액자, 도자기, 향로 등등 무게가 있는 물건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집사와 사용인들은 여전히 문 옆에 붙어서 피해 있는 상황. 날아오는 물건들은 전부 지셀 일행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날아오는 족족 다 피하거나 쳐 냈다.
곧 방 안에서 당황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 뭐야? 뭐냐고! 죽고 싶어? 찢어 죽이기 전에 당장 안 꺼져? 집사, 뭐 해! 병사들 불러와!”
험한 말은 한 번도 안 해 봤다던 사람 입에서, 찢어 죽인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욕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절대 아니었다.
“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지셀은 정말 당황하고 말았다.
전생에 본 기록에는 로잘린 브랜포드가 이렇게 성질이 더러웠다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놀란 이유는 다르지만, 일행들도 지셀과 똑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탁.
집사는 은근슬쩍 문을 다시 닫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가씨께 잠시 열을 식힐 시간을 드려야겠습니다.”
클로드가 더 참지 못하고 따졌다.
“아니, 아가씨 성격도 좋고 마음씨도 좋으신 분이라면서요! 험한 말도 안 한다면서요!”
“……예전에 그랬다는 거죠.”
“뭐라고요?”
“병이 들기 전에는 정말 천사나 다름없는 분이셨습니다. 믿으십시오.”
“와…… 어이가 없네.”
당당하게 말하는 집사의 모습이 유독 뻔뻔스러워 보였다. 클로드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성격이 저렇게 지랄 같은데도, 모시는 아가씨라고 무작정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잠시 후 방 안이 잠잠해졌다. 집사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좀 진정하셨을 겁니다.”
끼익…….
집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지셀 일행은 그제야 안심하고 방 안의 상황을 조심스레 살폈다.
방 안에는 한 여자가 어둠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옷은 후작가의 딸이라는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평상복이었다.
얼굴에는 피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면을 뒤집어쓰고, 손에도 장갑을 꼈다.
복도의 불빛이 열린 문을 통해 가면을 비추었다.
그 가면의 틈 사이로, 사람들을 노려보는 매서운 눈빛이 새어 나왔다.
꿀꺽.
모두는 마른침만 삼킬 뿐 섣불리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로잘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깔렸다.
“돌아가. 다 죽여 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