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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26화 (126/269)

126화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2)

“뭐?”

브랜포드 후작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찡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석상처럼 굳어 입만 뻐금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던 후작가의 집사마저도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감히 후작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다니!

왕국의 이인자인 재상도 저렇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권력자들도 넌지시 그 의중을 비칠 뿐.

후작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뭔가를 요구하는 미친놈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몸을 완전히 돌려 지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보거라.”

지셀도 당당하게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후작님은 왕국에서 그 위세가 높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성공하면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주실 만하지 않습니까.”

“감히 네까짓 놈이 내 딸의 약점을 빌미로 거래를 하겠다는 것이냐?”

“네, 후작님에게는 제 부탁 하나 들어주는 정도야 어려울 거 없지 않습니까?”

맞다, 어려울 건 없다. 아마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딸을 빌미로 자신에게 거래를 거는 꼴을 봐줄 수는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의 눈에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장사치다운 제안이지만, 계산은 못 하는 모양이구나. 고작 딸을 치료해 주는 정도로 내게 대가를 요구하다니. 설마 그게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느냐?”

살얼음 같은 목소리에도 지셀은 개의치 않았다.

“네,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도 못 지킨다면 권력이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놈!”

도발이나 다를 바 없는 말에 다들 경악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직 브랜포드 후작의 노성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벨린다가 창백한 표정으로 지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 사람 무섭기로 유명한 후작인 거 알잖아요! 왜 자꾸 시비를 걸어요!’

클로드도 반대쪽 소매를 잡아당겼다.

‘제발 그만해, 미친놈아…….’

눈에서 식은땀이 눈물처럼 흘렀다.

하지만 지셀은 두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소매를 휙 잡아 빼며 말했다.

“아, 놔 봐. 후작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로 치료를 포기하실 겁니까?”

지셀은 허리를 당당하게 펴고 브랜포드 후작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이거 참…… 정말 미친놈인가?’

브랜포드 후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황당한 상황을 마주하니 화조차 순간 식어 버렸다.

도발도 이런 도발이 없다.

후작이 권력을 쥔 뒤로 이렇게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인 건 처음이었다.

“크크큭.”

브랜포드 후작은 입매를 비틀며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좋다. 한번 해 봐라. 만약 성공한다면, 네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하지만…….”

그가 싸늘한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대가는 그리 싸지 않다. 네 목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지. 무게를 더 얹어야겠다.”

“뭐든 말씀하시지요.”

브랜포드 후작이 씹듯이 내뱉었다.

“네 가문을 걸어라.”

지셀을 따라온 자들은 얼굴이 모두 창백해졌다.

후작의 말이 주위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가문을 걸라는 말은, 지셀이 실패하면 페르디움 전체를 망가트리겠다는 뜻이다.

지셀 혼자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뭐가 문제냐는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정도는 해야 후작님 쪽과 균형이 맞겠군요. 그렇게 하시죠.”

브랜포드 후작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지?”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후작가에서도 일 년이 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보름 만에 해결하겠다고?

브랜포드 후작은 실소를 참으며 집사를 돌아보았다.

“집사.”

“네.”

“왕실의 재무관에게 보름 뒤에 페르디움의 지원을 끊을 준비를 하라 일러라.”

왕이 아님에도 후작은 마치 자신이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었다.

강대한 기반이 있는 대영주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 자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집사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이런 일은 익숙했다.

살벌한 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관장.”

이번에는 갑옷을 입은 덩치 좋은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네, 후작 각하.”

“수도에 있는 펜리스 남작의 저택을 포위해라. 이 시간 이후로 모든 자의 출입을 금한다.”

“알겠습니다.”

“이곳에 온 펜리스 남작과 수하들도 보름 동안 일체 외출을 금지한다. 보름 후 결과를 보고 처형 여부를 결정하겠다.”

벨린다와 클로드는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별생각 없이 찾아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왕실에서 움직인다면 변방의 영주인 펜리스와 페르디움 따위는 순식간에 박살 날 것이다.

그리고 주요 인물들도 모두 줄줄이 생선 엮듯이 끌려가 목이 달아날 게 뻔했다.

‘저 미친 인간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클로드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차마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건 지금 장난이 아니다. 평소처럼 주접을 떨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용히 지셀의 뒤에 서 있기만 하던 길리언도 눈을 내리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수도를 탈출할 방법도 찾아 둬야겠군.’

지셀은 수하들이 속으로 전전긍긍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브랜포드 후작만 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후작은 겁먹은 시늉조차 하지 않는 그를 보며 건조하게 내뱉었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지셀 페르디움.”

* * *

지셀의 저택이 후작가의 병력에 포위당하게 되면서, 화장품 판매도 중지되었다.

겁을 먹은 귀족가의 하인들은 항의도 못 하고 돌아갔다.

소식을 들은 귀족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가뜩이나 요새 물량이 점점 부족해진다는 소문이 돌아 마음이 급한데, 어떤 놈이 감히 귀족들의 행사에 훼방을 놓는단 말인가?

수도에서 힘깨나 쓴다는 귀족들이 직접 저택을 찾아갔다.

“너희들 뭐야? 누가 보냈어? 당장 문 안 열어?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한 귀족이 저택을 둘러싼 병사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저택을 포위하고 있던 기사는 귀족들이 화를 내는 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포효하는 사자가 그려진 브랜포드 후작가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을 뿐.

“…….”

그제야 깃발에 수놓인 문장을 확인한 귀족들은 당황해 입을 꾹 다물었다.

저택을 막은 게 브랜포드 후작가인 줄 알았다면 오자마자 소리부터 지르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귀족들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작님께서 남작에게 볼일이 있으셨구먼. 수고들 하시게.”

그러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귀족들까지 자리를 뜨고 난 뒤, 저택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대지 않았다.

지셀과 브랜포드 후작의 내기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귀족들은 하나같이 혀를 찼다.

지방에서 올라온 촌놈이 겁도 없이 후작에게 시비를 걸다니.

후작의 성정으로는, 지셀이 실패했다간 바로 목을 날려 버릴 터였다.

귀족들은 지셀이 도박에 성공하기를 빌었다. 딱히 그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효과 좋은 화장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메리엘은 지셀과 사업으로 엮여 있는 만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니, 걔는 도대체 왜 그랬대? 차라리 나를 통해서 말을 전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지셀은 메리엘을 통해 여러 귀족을 소개받으면서 나름대로 인맥도 쌓았다.

그녀가 후견인 비슷한 노릇을 하며 지셀의 뒤를 봐준 것이다.

하지만 메리엘이 아무리 수도에서 위세가 높다 해도 브랜포드 후작에게 비할 수는 없었다.

“끄응, 그 사람은 진짜 바늘 하나도 안 들어갈 사람인데. 겁도 없이 무슨 짓이람?”

수도 귀부인들을 죄다 동원한다면 어찌어찌 지셀 하나 정도는 살려 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메리엘이 브랜포드 후작에게 정치적으로 빚을 지게 되는 셈이다.

귀족들의 거래란 그런 법이니까.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손톱만 깨물다가 문득 문제를 깨닫고 남은 화장품을 확인했다.

“다섯 개밖에 안 남았잖아?”

지셀이 선물로 줬던 화장품은 처음 홍보할 때 여기저기 뿌리며 생색을 내는 데 다 썼다. 이제 남은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서는 하녀들에게 웃돈을 주고 남은 화장품을 모두 사들였다.

이런 일은 수도 여기저기서 비슷하게 일어났다.

판매가 완전히 막혀 버리자 다른 귀족들도 하녀들이 쓰다 만 화장품을 구하느라 바빴다.

수도가 이렇게 지셀과 화장품 때문에 들썩이는 동안, 카오르는 뜬금없이 저택 안에 갇힌 채 이만 갈고 있었다.

“젠장, 답답해 미치겠네.”

평소 성질대로였다면 바로 포위한 병력을 들이받고 빠져나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뻔했기 때문이다.

“그 꼴통 영주가 또 사고를 친 게 분명해.”

그는 용병들 관리에 저택 경비까지 맡고 있어서 이번에는 지셀과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꽤 오래 곁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 십중팔구는 영주 탓이었다.

“이번에는 유독 심각하긴 한데.”

카오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택을 막아선 병력은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저런 실력 있는 자들이 저택을 포위한 걸 보면, 지금 영주도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을 터였다.

용병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기까지 쳐들어온 걸 보면 대장이 또 사고를 친 모양인데요. 구하러 갈까요?”

“쓰읍, 구하긴 뭘 구해? 너 쟤들 상대로 빠져나갈 자신은 있냐?”

“그건 아니지만…….”

“아직은 괜찮을걸. 쟤들도 바로 안 쳐들어오고 저기서 그냥 보고만 있는데 뭘. 그리고…… 그 인간이 이렇게 순순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이미 당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는 소리지. 이렇게 되면 이유는 둘 중 하나야. 하나는 그 인간도 그냥 얻어터질 정도로 상대가 강하거나…….”

“다른 하나는요?”

“꼴통 영주가 상대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당해 주고 있는 거지.”

“아하.”

나름 지셀과 오래 함께한 카오르는 제법 진실에 가까운 추론을 해 냈다.

하지만 추론은 추론일 뿐.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대비를 하긴 해야 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음…….”

팔짱까지 끼고 한참을 고민하던 카오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술이나 마시자.”

“네?”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아, 몰라. 생각 많이 하니까 머리 아파. 영주야 뭐 알아서 잘하겠지. 무슨 일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용병들은 카오르의 말에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일단 술이나 마시면서 다음 계획을 구상해 보죠!”

“나도 찬성이야! 우리까지 당장 머리 아플 필요는 없잖아?”

“뭐 수틀리면 밖에 있는 놈들 다 때려잡고 도망가면 되겠지! 으하하하!”

용병들은 그냥 오늘을 즐기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들이 수레 한가득 술통을 싣고 저택에 들어갔다.

후작가의 기사는 그 꼴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공격당할지도 모르는데 술이나 퍼마시면서 논다고? 미친놈들인가?’

후작가에서 보낸 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저택에서는 성대한 술 잔치가 열렸다.

카오르는 술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오늘의 걱정은 누가 해결해 준다?”

“내일의 나!”

“내일의 걱정은 누가 해결해 준다?”

“모레의 나!”

“그러면 걱정은 일단 내일로 미루고…… 영주의 무사 귀환을 위하여!”

“위하여!”

걱정 없는 사나이들이 낄낄대며 술잔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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