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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22화 (122/269)

122화 장사 좀 하러 왔지. (3)

“귀족이 아니라 사용인들한테 보낸다고요?”

“어, 펜리스 남작이라고 크게 써서 보내.”

“아…… 아하? 알겠습니다.”

클로드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심쩍은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벨린다가 끼어들었다.

“아니, 뭐예요? 뭔데요? 설명 좀 해 줘요. 총관님은 알아들은 거 맞아요?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건 아니죠?”

대놓고 그를 무시하는 발언에 클로드는 바로 발끈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이론 아카데미 수석 출신에, 영지 총관 업무까지 전부 처리하는 제가 그렇게 멍청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흥, 매일 도련님한테 당하는 주제에.”

“그건 영주님이 상식을 벗어난 분이라 그런 거고요!”

클로드가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하지만 벨린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클로드가 그러든지 말든지, 지셀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셀이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벨린다도 내가 처음에 화장품 줄 때는 기뻐했잖아. 어디 제품이냐고, 비싼 거 아니냐면서.”

“그……랬죠.”

“그런데 왜 나중에는 거절했어?”

“그야 당연히 도련님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런 거 배운 적도 없으면서……. 아, 그렇구나!”

벨린다가 그제야 지셀의 말뜻을 깨닫고 감탄했다.

펜리스 성 사람들은 그가 약학이나 연금술 같은 분야에 무지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 그가 만들었다는 화장품도 믿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

“사용인 중에는 귀족 이름을 달고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믿는 사람이 한둘은 있을 거야.”

“여기 사람들은 도련님이 누구인지 모르니까요.”

“그렇지.”

어차피 화장품을 받은 사람 모두가 쓰지는 않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써서 효과를 본다면 금세 소문이 퍼질 것이다. 펜리스 영지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1차 화장품 테스트의 일등 공신, 길리언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기사를 잡으려면 말을 먼저 잡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공략하기 쉬운 주변 인물들부터 포섭하겠다니,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그런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네.”

지셀이 멋쩍은 듯 목뒤를 슥슥 쓸어내렸다.

“듣고 보니까 당연한 말인데, 제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사용인들하고 제일 많이 붙어 있는 사람은 저인데.”

벨린다가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나를 못 믿어서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일일이 설명하는 거 싫어해. 어차피 말해 봤자 안 믿더라고.”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사람들은 입을 딱 다물었다.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만 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클로드가 혀를 찼다.

“쯧쯧쯧, 마지막까지 영주님 곁을 지켜야 할 가신들이 영주님 말을 못 믿고 하는 일마다 의심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래서야 영지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알포이처럼 굴지 마세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일 의심 많은 놈한테 저런 말을 들으니 굉장히 열이 뻗친다.

하지만 지셀이 설명하기도 전에 의도를 알아차린 사람이 클로드밖에 없으니,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이 노려보자 클로드는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어 보이며 말했다.

“지능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클로드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상품은 예쁘게 포장해서 귀족가에 보내겠습니다.”

“그렇지. 귀족이라고 전부 다 챙길 필요는 없고, 잘나가는 사람 위주로 골라서 보내.”

“그러면 귀족들한테는 무슨 선물을 보낼까요? 아예 안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귀족들을 무시하고 사용인들에게만 선물을 보내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아무거나 하나라도 쥐여 줘야 명분이 서는 법이었다.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수도에 와서 인사드린다는 핑계로 적당히 만드라고라 뿌리나 하나 사서 보내.”

“……만드라고라 뿌리요?”

“응. 굳이 더 좋은 거 보낼 필요 없잖아? 내 이름하고, 우리 상단에서 화장품을 보냈다는 것만 알리면 되니까. 최대한 싼 놈으로 보내라.”

클로드는 난감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만드라고라 뿌리는 자양강장제로 유명하긴 하지만, 수도의 귀족들에게 선물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아무리 귀족들의 환심을 살 필요는 없다고 해도…… 뒤에서 무슨 말이 돌지 걱정되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그러면 서신에는 뭐라고 쓸까요? 뭐 쓰고 싶은 말 있으세요?”

“이 몸, 수도에 등장.”

“……제가 알아서 잘 써서 보내겠습니다.”

지셀이 혀를 차며 답했다.

“그래, 그 정도는 이제 좀 알아서 해라. 내가 편지 글줄까지 하나하나 생각하리?”

“알겠다고요.”

클로드는 투덜거리면서도 정성껏 서신과 선물을 준비했다.

선물을 보낸 뒤에는 입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일행이 수도를 구경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동안, 지셀은 혼자 저택 안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슬슬 효과를 본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은 지셀이 그저 화장품을 팔아 돈을 벌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틀린 건 아니지만, 지셀이 노리는 건 그저 돈뿐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리려나…….’

까악! 까악!

지셀은 까마귀들을 향해 모이를 휙 흩뿌렸다. 정원에 있는 까마귀들이 지셀이 던져 준 모이를 받아먹겠다고 푸드덕거리며 소란을 피웠다.

* * *

에일즈버 백작은 수도의 권세가 중 한 명이다.

높은 직책을 맡았다든가 다스리는 영지가 큰 건 아니었지만, 대대로 많은 귀족가와 혈연을 이어 온 덕분에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사업체, 인맥들도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힘이었다.

그런 그에게 잘 보이겠다고 선물을 보내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따로 시간을 내어 목록을 정리해 둬야 할 정도였다.

“다음은…… 펜리스 남작?”

“네, 수도에 처음 왔다고 인사차 보냈답니다.”

“흠, 그래.”

에일즈버 백작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뜯어보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

문장 하나하나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어찌나 고급스럽게 자신을 칭송하는지 마치 황제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허어, 데리고 있는 문장관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아니면 직접 쓴 건가? 어쨌든 대단한 글줄이로다. 기특한지고, 허허허.”

이렇게 되자 선물이 무엇일지 기대가 된다.

무슨 제국의 황제를 대하는 듯한 공경과 예를 표했으니 그 선물도 범상치 않을 게 분명했다.

기대가 잔뜩 섞인 얼굴로 그가 하인을 재촉했다.

“어서, 어서 뭔지 열어 보아라.”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니 직접 열어 볼 수는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인이 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목갑에는 다 말라비틀어진 만드라고라 뿌리 하나가 다소곳하게 누워 있었다.

“……만드라고라? 달랑 그거 하나야?”

“예, 예. 이거 하나입니다.”

에일즈버 백작은 당황스러워하며 급하게 손짓했다.

“가져와 봐. 그거 가져와 봐.”

그는 만드라고라 뿌리를 들어서 이리저리 살폈다. 빈 목갑도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정말 그것뿐이었다.

“에라이! 입만 산 놈이었구나! 이 새끼 이름 기억해 둬라! 이래서 돈 없는 시골 놈들은 안 된다니까!”

에일즈버 백작은 만드라고라 뿌리를 목갑째 휙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라도 좀 놀러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흉을 볼 생각이었다.

자리를 뜨는 그를 집사가 급히 붙잡았다.

“남작이 사용인들에게도 선물을 보냈는데 어떻게 할까요?”

“뭐? 뭔데. 풀뿌리라도 보냈어?”

“남작이 운용하는 상단에서 만든 미용 크림이라고 합니다.”

에일즈버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시골 상단 주제에 무슨 화장품 같은 고급 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사용인들에게 줬다는 걸 보니 과일 껍질이나 갈아 만든 싸구려가 분명했다.

“서민용 화장품인가? 그냥 알아서 나눠 줘. 버리고 싶으면 버려도 된다고 해라. 아, 저것도 필요한 사람은 갖다 쓰라고 해. 집사가 먹든가.”

“감사합니다!”

집사는 반색하며 웃었다. 백작에게는 싸구려 쓰레기지만, 평민들에게는 만드라고라 한 뿌리도 귀한 물건이었다.

에일즈버 백작은 몇 번 혀를 차고는 쌩하니 나가 버렸다.

그렇게 에일즈버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 지셀이 보낸 화장품이 지급되었다.

화장품 용기에는 펜리스 남작의 이름과 상단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대다수는 에일즈버 백작과 같은 이유로 의심스러워하며 쓰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은 대문짝만하게 새겨진 귀족의 이름에 호기심을 느끼고 조금씩 사용해 보았다.

지셀이 생각한 대로였다.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났을 무렵.

열심히 화장을 하던 메리엘 에일즈버 백작 부인이 새침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오늘따라 화장이 잘 안 먹네.”

얼굴에 바른 분이 오늘따라 유독 들뜨는 느낌이었다.

“세월은 어쩔 수가 없네. 늙고 싶지 않은데.”

하루하루 갈수록 피부 상태가 나빠진다.

좋다는 음식을 찾아 먹고 비싼 미용 제품들을 사다 쓰며 피부를 관리하고는 있지만, 갈수록 효과가 떨어졌다.

중년에 접어든 나이가 새삼 안타깝고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말이야.”

메리엘은 거울을 보며 아쉬워했다.

그녀는 지금도 왕국 최고의 미인이라면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젊은 시절에는 수많은 귀족가 자제들에게 청혼을 받았다. 그녀를 레이디로 모시겠다고 다투던 기사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메리엘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그녀는 왕국의 유행을 선도하는 귀부인 중의 귀부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나이가 들수록 탄력이 없어지는 피부와 조금씩 늘어나는 주름이 너무 신경 쓰였다.

“젊었을 적에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매끄럽게 빛이 났었는데. 하아…….”

주름을 가리려고 분칠을 진하게 하니 피부가 더 뻣뻣해지는 거 같았다.

“마나 연공법을 좀 쉬운 거라도 찾아서 배울 걸 그랬나? 그러면 젊음이 오래간다던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세월을 비켜 갈 수는 없었다.

메리엘은 속으로 혀를 차며 방을 나섰다.

“준비 다 됐지? 늦지 않게 지금 출발하자.”

오늘은 오랜만에 살롱에 참석하기로 했다.

메리엘이 아침부터 부단히 공을 들여 치장한 이유였다.

귀족의 사교 모임이란 보통 날붙이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옷차림과 화장, 손톱만 한 장신구까지 하나하나 살피며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다.

메리엘은 한 번도 그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다.

하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서려던 메리엘은 순간적으로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멈춰 섰다.

‘뭐지?’

그녀는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하녀들을 죽 훑어보았다.

곧 메리엘은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피부가…….’

대부분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귀족들처럼 관리할 수 없는 하녀들이 피부가 좋아 봤자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유독 몇 명의 피부가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좋아 보였다.

보통 피부의 탄력 같은 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가기 십상이지만, 메리엘의 눈길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메리엘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은 피부가 빛을 내고 있었다.

피곤에 찌들어 안색이 우중충한 다른 하녀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가장 피부가 촉촉해 보이는 하녀의 앞에 다가가 말했다.

“너.”

지목당한 하녀가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최근에 뭘 먹었는지, 어떻게 씻었는지, 언제 얼마나 잤는지 모두 말해 보아라. 피부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다른 이유가 있으면 그것도.”

아랫사람에게도 언제나 귀부인다운 우아하고 자비로운 태도를 보이던 메리엘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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