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21화 (121/269)

121화 장사 좀 하러 왔지. (2)

마뜩잖은 반응에 클로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화장품을 팔려면 귀족들하고 친해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난한 남작하고 친하게 지낼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리고,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귀족들이 믿고 쓰겠어? 아마 다 갖다 버릴걸. 너도 처음엔 쓰기 싫어했잖아.”

“그래도 귀족들에게 팔려면 일단 이런 게 있다고 알리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우리가 나서서 알리는 건 소용이 없어. 귀족들이 알아서 찾아오게 해야지. 일단 지낼 곳부터 구하자. 홍보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클로드가 찝찝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좀 들긴 하겠지만, 왕성 근처…… 중심가에 있는 건물을 사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심가?”

“네, 저택도 괜찮고요. 아니, 귀족들에게 고급 품목을 팔기에는 오히려 화려한 저택이 더 좋습니다.”

귀족들은 평민들이 드나드는 일반적인 상점에 절대 직접 찾아가지 않는다.

혹시 그런 곳에서 파는 물건이 필요하다면 하인을 보내서 사 온다.

비싸고 좋은 물건은 사교 모임에 나가듯 직접 만나서 거래하고.

“맞아요. 저택이든 상점이든, 귀족들만 상대할 거면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는 게 좋아요.”

벨린다도 옆에서 거들었다.

정론이었다. 하지만 지셀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이 동네에서 중심가에 좋은 저택을 구하려면 우리 영지의 1년 예산 정도는 써야 할걸? 여기 물가 비싼 거 몰라?”

클로드가 아쉬운 듯 입을 비죽이며 되물었다.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수도에 자리는 마련해야 하잖습니까.”

“당연히 정원이 있고 넓은 저택을 구해야지. 인원들도 묵고 수레도 보관해야 하니까. 싸면 더 좋고. 장소는 외곽 쪽으로 알아보면 될 거야.”

“그럼 물건은 어디서 파시려고요?”

“저택 산다니까. 물건이야 당분간은 거기서 팔아도 돼.”

“고급품을 파는 것치고는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 귀족들이 뭘 믿고 사 주겠어요.”

지셀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곧 돈다발 싸 들고 몰려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어휴, 돈도 많으신 분이 이럴 때는 또 엄청 짠돌이시라니까. 일단 매물이 있는지 알아보죠. 나중에 손님 안 와도 제 책임 아닙니다.”

다음 날부터 클로드는 괜찮은 저택을 찾아 왕도 전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왕성 근처 중심가는 가격도 엄청났지만, 애초에 매물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왕성을 중심으로 야금야금 범위를 넓혀 가던 클로드는, 결국 외곽에 있는 큰 저택 하나를 찾아냈다.

“원하시는 대로 싸고, 넓고, 정원이 딸린 크고 멋진 저택입니다요.”

중개업자는 실실 웃으며 눈앞에 있는 집을 설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넓긴 넓다. 정원도 있다. 저택도 높고 크다. 결정적으로 가격도 싸다.

문제는…… 저택 전체에서 마치 뱀파이어가 사는 집처럼 음침한 기운이 감돈다는 거였다.

정원의 꽃은 생명력을 모두 빨린 듯 회색빛으로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대낮인데도 주변에 빽빽한 나무 그림자에서 기분 나쁜 기운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벨린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개인을 바라보았다.

“이게 최선이에요?”

“넓고, 크고, 싼 집은 수도에 이거밖에 없어요.”

“아니, 대체 저택 상태가 왜 이 모양이에요?”

“하하, 사람 손을 안 타서 그럴 겁니다. 여기가 소문이 좀 안 좋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냥 소문일 뿐입니다. 별거 없어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있단다.

어쩐지 이렇게 큰 저택인데 주변에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인다 했더니.

벨린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외쳤다.

“도련님, 그냥 다른 데 찾아 봐요! 이런 데서 찝찝하게 어떻게 살아요! 자 봐야 피로만 쌓인다고요!”

벨린다의 말에 반응하듯 저택에서 까마귀 떼가 푸드덕거렸다.

까악! 까악!

“봐요, 쟤들도 제 말이 맞다잖아요!”

지셀은 벨린다가 반대하거나 말거나 주변을 꼼꼼하게 둘러본 뒤 중개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집으로 하지. 얼마야? 싸다며?”

“도련님! 이 집에서 잤다가는 마나가 다 빨려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럴 리가 있나. 뭐가 나와 봐야 언데드나 좀 나오겠지. 그냥 때려잡으면 되는 게 뭐가 무서워?”

지셀은 건들거리며 중개인을 툭툭 쳤다.

“왜 대답을 안 해? 얼마냐고.”

“아이고,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이 집이…… 원래 토지까지 합해서 천 골드는 가볍게 넘는 집입니다. 그래도 관리가 좀 안 된 걸 감안해서 그냥 딱 500골드에 드리겠습니다.”

중개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 애물단지를 팔게 된다는 생각에 속이 다 후련했다.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리는 걸 감안해서 과감하게 가격을 내려 불렀으니, 안 사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거저 주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뭐…… 팔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중개인은 미처 몰랐다.

지셀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200골드.”

“네?”

“200골드 아니면 안 사.”

지셀이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중개인은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건 안 됩니다! 세상에, 이런 저택을 200골드로 사겠다고요? 500골드도 진짜 많이 깎아 드린 겁니다!”

“저택이 크면 뭐 해, 어차피 안 팔리잖아. 그럼 다른 데다 팔든가.”

“아니, 그건……. 저희가 솔직히 다른 일이 바빠서 내버려 둔 거지, 팔려면 팔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밀어 버릴 수도 있고요. 못 할 거 같습니까?”

나름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중개인은 배짱을 부려 보았다.

물론 지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셀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못 한대?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 그런데 지금까지 안 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건……!”

“이미 안 좋은 소문이 퍼졌는데 저택을 허물려면 인부들한테 돈도 더 줘야겠지. 그렇게 해서 싹 밀어 버렸다 쳐도, 유령이 나온다고 소문난 땅인데 살 사람이 있긴 하겠어?”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 타산이 안 맞으니까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 둔 거 아냐?”

“그러니까……!”

속셈을 죄다 간파당한 중개인은 눈만 뒤룩뒤룩 굴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셀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아, 이 친구 말이 잘 안 통하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적당히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아니, 그래도 200골드는…….”

“음, 절실함이 덜하네. 알겠어. 우리 다른 데 보러 가자.”

지셀이 몸을 돌리자 일행도 미련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말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자, 잠시만요! 가격을 좀 더 깎아 드리겠습니다.”

중개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리치고 나서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느긋하게 뒤를 돌아본 지셀이 경고했다.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거야. 기회는 한 번뿐이야. 마음에 안 들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갈 테니까.”

“…….”

300골드를 부르려던 중개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호구 잡을 수 있을까 했더니 잡히게 생겼다.

중개인은 이 저택을 팔아 치우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귀족에게 잘 부탁드린다며 공짜로 넘기려고까지 해 봤지만, 정중하게 하지만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이 골치 아픈 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요즘은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최근 유난히 이마가 넓어진 것도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냥 팔자. 그러면 최소한 밤에 잠은 편히 자겠지!’

잠시 고민하던 중개인은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00골드에 팔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까악! 까악!

새 주인을 반기듯 까마귀들이 저택 상공을 빙빙 돌며 울어 댔다.

* * *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싸게 큰 저택을 사고 싶은 지셀과 빨리 팔아 버리고 싶은 중개인의 마음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벨린다와 클로드는 계약서를 쓰는 내내 지셀 뒤에서 한숨을 내쉬며 투덜댔다.

“도대체 왜 이런 집을 사는 거예요! 차라리 좀 작아도 마음 편한 집을 사야죠.”

“이런 집에 누가 물건을 사러 오겠습니까?”

지셀은 사람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해맑게 웃었다.

“괜찮다니까. 그런 거 다 미신이고 헛소문이야. 이 가격에 이렇게 크고 넓은 저택을 살 수 있을 거 같아? 아껴 살아야지.”

“아휴, 도련님 고집을 누가 말려요.”

“자, 일단 들어가 보자.”

지셀이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아아아악!

비명 같은 소리에 클로드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놈의 집은 문이 열리는 소리도 소름 끼친다.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엄청 넓잖아? 청소랑 수리만 좀 하면 되겠는데? 적당히 꾸미면 정말 괜찮……”

“으아악! 저거! 저거 뭐야! 괴물이다!”

“꺄아아악! 공격해! 공격!”

갑자기 벨린다와 클로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 씨! 깜짝이야! 뭐야?”

지셀이 짜증을 내자, 클로드가 로비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법석을 떨었다.

어둠 속에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무언가가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얹었던 지셀이 그걸 자세히 뜯어보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뭐야, 그냥 갑옷이잖아.”

낡은 갑옷 위에 풍성한 먼지떨이가 걸려 있었다. 어두운 구석에 있으니 절묘하게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제야 괴물의 정체를 확인한 다른 일행도 안심하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자, 지낼 곳이 생겼으니 이제 청소랑 수리부터 하자. 인부들도 구해 보고. 집 안에 있는 까마귀 새끼들도 다 내쫓고.”

까악?

지셀의 명령에,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인부를 구하러 나갔던 용병 몇 명이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돌아왔다.

“인부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워낙 널리 퍼져 있다 보니, 웃돈을 준다 해도 인부들이 오려고 하질 않았다.

정말 돈이 급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들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 자재를 사다가 용병들과 사용인들을 시켜 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지셀을 따라온 인원이 많았던 덕에 저택 수리는 사흘 만에 끝이 났다.

물론 다른 귀족 저택처럼 화려하고 멋지게 꾸민 건 아니었다.

그저 당장 머물 수 있도록 생활용품을 채워 넣고 청소만 깨끗하게 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음침한 분위기가 훨씬 덜해졌다.

회색빛으로 변해 버린 정원까지 싹 갈아엎으면 유령 저택이라는 이미지도 완전히 사라질 테지만, 정원 관리는 내부와는 달리 짧은 기간 안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원은 나중에 정비하자고. 저놈들도 그때 같이 손을 써 보지. 당분간은 저놈들하고 같이 살아야겠네.”

까악! 까악!

안타깝게도 까마귀들을 전부 내쫓지는 못했다.

안에 살던 놈들을 모두 내쫓고 창을 새로 달자 저택 안에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쫓겨난 놈들이 그대로 정원에 자리 잡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적당히 사람 살 만한 구색은 갖췄으니 이제 화장품 홍보를 시작하자. 빨리빨리 팔아야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연회도 참석 안 하신다면서요.”

“수도에 있는 귀족 저택마다 선물로 쫘악 돌리자고.”

“……화장품을요?”

“응.”

“허허…….”

클로드가 버럭 고함을 지르려다 간신히 참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냥 선물로 돌리면 홍보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클로드가 참지 못하고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써 달라고 사정을 해도 쓸까 말까인데, 선물로 준다고 쓰겠냐고요! 찝찝해서 그냥 버리지!”

“귀족들은 당연히 그렇겠지.”

“그걸 아시는 분이!”

지셀이 턱을 쓰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귀족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한테 보낼 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