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내가 다 먹는 게 낫다. (2)
“그, 그냥 노예 계약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어이, 이놈 풀어 줘.”
간수가 다가와 잠겨 있던 문을 열어 주었다.
클로드는 드디어 일을 시킬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우리 화끈하게 해 보자고, 브로.”
“대체 뭘 화끈하게…….”
로웰은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는 클로드를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자꾸 소름이 쫙쫙 돋는 게, 이 사람하고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 * *
펜리스 영지로 돌아가는 길. 로웰은 지셀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듣고 조금 안심했다.
‘마지막 기회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줘야 해.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는 자기 능력을 보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었다.
그걸 들은 클로드는 로웰의 방대한 지식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지민을 수탈하는 법, 범죄 조직을 이용하는 법, 돈놀이를 하는 법, 심지어는 다른 귀족을 이용하고 파산시키는 법까지.
세상 모든 편법과 악행을 다 꿰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도 가끔 요령을 부리긴 하지만, 로웰 정도는 아니었다.
“와, 너 진짜 쓰레기구나. 너 같은 놈은 처음 봐. 진정한 적폐가 이런 거구나.”
클로드의 말에 로웰은 자랑스러운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디갈드에서 쓰레기란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영지민들에게서 많은 돈을 긁어낼수록 영주의 마음에 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짜내겠습니다.”
“……이 영지는 진짜 정상인 놈이 없다니까.”
클로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은 지셀이 디갈드처럼 영지를 운영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셀이 클로드에게 웃으며 경고했다.
“정신 교육 제대로 해야 할 거다. 같이 목 날아가기 싫으면 말이야.”
“……네.”
클로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정신머리는 좀 나간 것 같지만, 영지 운영을 해 봤던 놈이니까. 경력자는 환영이다.
머릿속에 가득한 적폐를 깨끗하게 씻어 내고 잘 가르치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자기 문제가 뭔지 전혀 깨닫지 못한 로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일을 맡으면 돈을 쭉쭉 뽑아내야지. 저 괴물 같은 인간도 한번 돈맛을 보면 태도가 달라질 거야.’
로웰은 자신만만하게 지셀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펜리스 영지에 도착한 순간 박살이 나고 말았다.
“뭐, 뭐야? 영지가 왜 이럽니까? 여기 펜리스 영지 맞습니까? 다른 영지 아닙니까?”
지금 상단이 와 있는 건가? 그것도 성문 앞에 줄지어 들어간다고?
저건 뭐야? 왜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척 봐도 새로 지은 듯한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영지민들의 분위기는 또 왜 이렇게 밝은 건지.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로웰은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고 영지를 둘러보느라 바빴다.
디갈드가 고향인 그에게 이런 광경은 무척이나 어색하고 생소했다.
놀라고 있는 로웰의 어깨를 툭툭 치며 클로드가 거만하게 으스댔다.
“모두 이 몸의 작품이지.”
“아, 만지지 마시고요……. 정말입니까? 총관님이 이렇게 발전시켰다고요?”
로웰이 너무 호들갑을 떠니 조금 민망해진 클로드가 소심하게 정정했다.
“이 몸과 영주님의 작품이다.”
영지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 건 지셀의 자금력과 추진력 덕분이다.
아무리 뻔뻔한 클로드라도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뒷생각 안 하고 일만 벌이는 영주님 뒤치다꺼리한 건 나지.’
그러니 영지가 발전한 데에는 자기 지분도 반 정도는 있다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영지가……. 어떻게 이런…….”
로웰은 넋이 나간 채 영지를 둘러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피죽도 제대로 못 먹고 자라 고생만 했다.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 글을 익히고 공부를 했다.
훌륭한 행정관이 되어 굶는 사람이 없는 영지를 만들고 싶었다.
분명 그런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평민으로서는 제법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영주가 마음먹지 않는다면 영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로웰은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기 위해 영주가 원하는 대로 일해 왔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왜 이렇게 넋이 나가 있어? 오랜만에 와 보니까 어때?”
상념에 잠겨 있던 로웰은 지셀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놀라 고개를 저었다.
“노, 놀랍습니다. 이곳이 이렇게 활기차게 바뀌다니…….”
그는 백작령 전체 운영을 맡았던 시기에 이곳에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는 그야말로 악마와 다를 게 없었다.
참다못해 도망가는 경우는 차라리 양반이었다. 삶을 포기해 떠날 생각조차 못 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랬던 곳이 단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변하다니.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다. 예전처럼 영지를 관리하려 했다가는 바로 목을 베겠다.”
지셀이 로웰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로웰은 긴장한 듯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디갈드 백작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네게 죄가 없는 건 아니다. 앞으로 영지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오히려 바라던 일이다. 로웰은 언제나 이런 영지에서 일하기를 꿈꿔 왔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무서워서 나쁜 짓을 할래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로웰을 뜯어보던 지셀이 클로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쓸 생각이지?”
클로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시원시원하게 내뱉었다.
“일단 나쁜 짓은 두루 꿰고 있는 것 같으니 첩보관 자리에 올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행정부 서기관도 겸해서 제 업무를 보조하게 하고요.”
첩보관은 잔머리가 잘 돌아가고, 범죄자들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야 한다.
그야말로 로웰이 적임자였다.
대부분의 업무를 해 봤다고 하니, 조금만 영지 사정에 맞게 가르치면 될 것이다.
그 정도만 맡겨도 클로드로서는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갈드 백작 밑에서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던 놈이었으니 그쪽은 더 잘 알겠네. 클로드 말대로 하자.”
“감사합니다!”
로웰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번에는 진짜 열심히, 제대로 살아 보기로.
“당분간은 우리 영지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봉쇄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지셀은 농작물의 싹이 트기 전에 영지를 한번 싹 청소했다.
첩자들을 솎아 내고 상단들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꼭 필요한 외부 인력은 돈을 더 주겠다고 달래 가며 반쯤 구금시켜 두었다.
새로운 경작지에 아예 벽을 치고 영지민들을 모아 경계를 세워 두기까지 했다.
“숨길 수 있을 만큼 숨기는 게 낫겠지.”
데스몬드에서도 아멜리아를 지원하느라 지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것이 봉쇄령과 맞물려 영지의 정보는 물샐틈없이 차단되었다.
지셀은 클로드에게도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곧 1차 목표로 세운 물량이 준비될 거야. 보름 정도 뒤에 출발할 거니까 그 전에 기존 업무가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이놈 잘 교육해 놔. 필요한 자재들도 미리 준비해 놓고.”
“알겠습니다. 야, 빨리 가자. 너 할 거 많아.”
클로드가 로웰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괜히 친한 척을 했다.
내기 건으로 마법사들과도 사이가 틀어져서 주위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제법 똘똘한 놈이 밑에 들어오니 조금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우, 왜 자꾸 달라붙으시는데요.”
“달라붙긴 누가 달라붙어. 좀 친하게 지내자는 거지. 괜히 예민하게 구니까 수상하네. 너 뭐 숨기는 거 있냐?”
“아, 그런 거 없습니다. 찝찝해서 그렇지.”
티격태격하며 떠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지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지가 커질수록 다뤄야 하는 정보의 양도 방대해진다.
언젠가는 전속으로 정보 관리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클로드가 그 부분을 잘 포착했다.
제대로 써먹으려면 잘 가르쳐야겠지만, 그거야 클로드가 알아서 할 일이고.
‘잘못 가르치면 자기만 더 피곤해지는 거지, 뭐. 사람도 붙여 줬겠다, 일을 좀 더 시켜 볼까.’
클로드가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지셀도 발걸음을 돌렸다.
수도에 가기 전에 처리해 둬야 하는 일이 아직도 잔뜩 남아 있었다.
* * *
클로드는 보름이 다 되기도 전에 지셀을 찾아왔다. 얼굴에는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셀이 먼저 말했다.
“돈 떨어졌지?”
“돈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 어? 알고 계셨습니까?”
“흠, 그럴 때지. 걱정하지 마. 화장품만 팔리기 시작하면 금방 해결될 거야.”
“그 전에 돈이 똑 떨어질 거 같은데요?”
“그때까지는 룬스톤을 캐다 팔면 되지.”
클로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지금 당장 쓸 돈이 없다니까요. 룬스톤을 캐 와도 현금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셔야죠. 진행 중인 사업 중에 몇 개는 잠깐 멈추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수도에 가는 걸 조금 늦추든가요.”
“싫은데?”
클로드는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싫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일을 시키려고요?”
“잠깐 따라와.”
“……왜요? 때리시려는 건 아니죠?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습니까.”
“돈 줄게.”
“네?”
클로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돈을 준다는 말에 얌전히 지셀을 따라갔다.
이미 돈 관리는 전부 자신에게 넘겼는데, 대체 돈이 어디서 난 걸까?
지셀은 자신의 집무실에 딸린 개인 창고로 클로드를 데리고 갔다.
창고는 큰 옷장과 궤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돈 주신다더니……. 옷 자랑 하려고 데리고 오셨어요?”
지셀은 경계하듯 방 안을 슥 둘러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야, 너 이거 우리 아버지한테는 비밀이다. 소문나면 죽을 각오 해.”
말을 끝내자마자 지셀이 옷장과 궤짝을 활짝 열었다.
휘황찬란한 보석과 값나가는 장식품, 금화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일단 절반만 가져가. 그 정도면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거야. 상단들 많이 오니까 이건 현금화도 쉽잖아?”
재화로 가득 찬 방을 둘러보던 클로드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 도대체 이게 뭡니까? 언제 이렇게 돈을 꼬불쳐 두셨어요?”
클로드가 알기로 지셀은 룬스톤 외에 자금줄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부자인 건 맞지만, 이렇게 큰돈을 뒷주머니로 모아 둘 방법은 없었다.
지셀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이건 전리품이야. 디갈드 백작하고 그 휘하 가신들 개인 재산.”
“……네? 전리품이요?”
“점령한 날 아예 영지를 싹 털었거든. 가신들 저택하고 창고까지 다 뒤져서 긁어 왔어. 비상금으로 쓰려고.”
“미, 미친…….”
클로드는 순간 머리가 띵해져서 비틀거렸다.
지셀이 왜 소문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지 이해가 갔다.
창고 가득 쌓인 재물의 정당한 소유자는 지셀의 아버지, 즉 페르디움 백작이었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지셀은 어디까지나 영주가 아니라 일개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지금 지셀은 점령지의 재산을 몰래 빼돌렸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걸리면 사형인 거 아시죠?”
영주의 재산을 몰래 착복하는 건 반란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아무리 지셀이 소영주라고 해도 처벌을 완전히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셀은 클로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부라렸다. 어디 감히 그런 소리를 하냐는 눈빛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페르디움에 룬스톤을 얼마나 많이 줬는데. 뺏어 온 게 아니라 바꾼 거야, 바꾼 거. 세상에 룬스톤을 공짜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클로드는 헛웃음조차 짓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뛰는 클로드 위에 나는 지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