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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16화 (116/269)

116화 인생 한 번 더 걸어 볼까? (4)

바쁘게 지내다 보니 연회 날이 성큼 다가왔다.

지셀 또한 오늘 하루만큼은 일을 잊고 편히 쉬기로 했다.

“가끔은 마음 편하게 놀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지셀도 노는 걸 좋아한다.

용병왕 시절에는 귀찮은 일은 다 수하들에게 맡기고, 지셀은 재미있어 보이는 일만 골라서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으니 화끈하게 놀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쯧, 빨리 다 쓸어버려야 마음 편하게 쉬지.”

지셀은 투덜거리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연회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펜리스 성의 연회장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가신들과 사용인들의 수가 적은 편이라 연회를 여는 데에는 문제없었다.

몇몇 가신들이 품위가 떨어진다면서 사용인들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지셀은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

그는 놀 때는 다 같이 시끄럽게 놀아야 재미있다는 주의였다.

“나중에 아주 큰 광장을 만들어서 영지민들까지 다 모여도 재미있겠어.”

마음 같아서는 이번에도 영지민들까지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적은 영지라고 해도 영지민들을 전부 성내에 들일 수는 없었다.

지셀은 아쉬운 마음에 집집마다 술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공짜로 술과 고기를 얻게 된 영지민들도, 귀족들만 즐기던 연회를 직접 경험하게 된 사용인들도 기쁜 마음으로 영주를 칭송했다.

놀거리가 없는 가난한 영지다 보니 남녀노소 빼놓지 않고 모두 연회 날만을 기다렸다.

딱 한 무리만 제외하고 말이다.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연회장 구석에 모여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들은 낯빛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제발 한 명이라도…….”

“분명 부작용을 겪은 사람이 있을 거야.”

“하나라도 놓쳐선 안 돼. 반드시 찾아내서 무승부로 몰고 가야 한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혈안이 되어 부작용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언제나 이성과 합리를 추구한다던 사람들이 보일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불안하다는 뜻이었다.

‘여신께서 마왕은 보내 주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뾰루지 하나 정도는 보내 주셨을지도 몰라.’

클로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연회장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볼 속셈이었다.

* * *

기본적인 음식들의 세팅이 끝나고 급조된 악단이 자리를 잡을 때쯤, 지셀이 연회장에 들어왔다.

“아직 시작 안 했나? 그냥 대충 시작해. 노는데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원래 가장 높은 사람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만, 지셀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영주가 의자에 털썩 앉아 고기를 뜯기 시작하자 가신들이 당황해 외쳤다.

“어서 시작해라!”

악단이 급하게 곡을 연주했다.

삑! 삑! 삐익!

급히 모은 사람들이라 다들 실력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음정이나 겨우 제대로 맞추는 수준이었는데,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연주를 시작하니 그마저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덜컹!

문이 열리자마자 연회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귀족처럼 화려하게 꾸미진 않았지만 다들 나름대로 깨끗한 옷을 입고 한껏 신경을 쓴 티가 났다.

공통점을 한 가지 더 꼽자면, 모두 얼굴이 반짝반짝하게 윤이 난다는 점이었다.

“앗, 아아…….”

클로드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왠지 눈이 시큰한 건 틀림없이 조명 탓이다.

질 것 같아서 눈물이 난 게 아니다!

“아오…… 씨.”

클로드는 욕을 짓씹으면서, 연회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열심히 훑어보았다.

여기도 깨끗, 저기도 깨끗, 매끈매끈하다.

피부색과 주름에 따른 차이는 있어도 피부 상태가 나빠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상태가 안 좋은 것은 클로드 옆에서 다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마법사들 뿐이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을 즈음 지셀이 손을 들어 음악을 멈추었다.

솔직히 귀가 아파서 듣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바쁘게 돌아가는 영지의 일에 최선을 다해 주어 모두 고맙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 바쁠 테니 내일까지는 푹 쉬도록.”

참으로 담백한 연회사였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귀족답지 않게 허례허식이 없다는 건 이제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지셀은 클로드와 마법사들을 향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영지의 총관과 마법사들이 나와 내기를 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화장품 얘기가 나오자 사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드디어 승패가 뻔한 내기의 결과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화장품에 대한 평가는 아무래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겠지. 여기 있는 대부분이 모두 사용한 걸로 알고 있다.”

지셀은 의자에 기대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작용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내가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부작용이 있어도 누가 영주 앞에 나서겠는가?

다행스러운 점은 정말 부작용이 없었다는 점이다.

“딱 봐도 없는 거 같긴 하네. 내기의 결과 판정은 이곳에 있는 자들에게 맡기겠다. 모두 화장품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 보도록.”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다 하나둘씩 나섰다.

“정말 효과가 좋습니다. 이런 제품은 처음 봤습니다.”

“피부가 전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확실히 효과가 있는 거 같아요.”

“부작용도 없었습니다! 이건 완벽한 화장품입니다!”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되나요? 제발요!”

한두 사람이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자 곧 다들 왁자지껄 떠들며 화장품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제품의 성능이 확실하니 다음에는 못 구할 거 같다며 안타까워하는 반응도 많았다.

종국에는 화장품에 대한 칭송이 영주에 대한 칭송으로 변해 버렸다.

“정말 대단합니다! 새 농사법을 보여 주셨을 때도 경이로웠는데, 이런 제품까지 만드시다니요!”

“이건 정말 대박 날 겁니다! 우리 영지의 특산품이 될 거예요!”

“다른 것도 만들어 주세요! 이제 뭐든 다 믿을게요!”

칭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셀은 거만하게 늘어져 앉은 채 더 칭송하라는 듯 배부른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지쳐서 칭찬이 시들해질 즈음, 지셀은 클로드와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어때? 결과는 나온 거 같은데?”

“으, 으으…….”

클로드와 마법사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뾰루지 하나 난 사람이 없다니!

정말 효과가 있는 화장품을 만들 줄이야.

이제는 우길 수도 없었다.

클로드는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패배 선언을 기다리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클로드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이거 참, 어쩔 수가 없군요. 영주님이 또 성공할 줄이야.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워 온 겁니까?”

이유야 어쨌든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승부사’니까.

물론 개소리였다.

“좋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이제 20년 노예가 됐다.

뭐, 인생 걸고 도박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클로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패배를 인정하자 주변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20년 노예 생활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다니.

역시 펜리스 영지의 총관을 맡을 정도로 비범한 사람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클로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주먹을 살짝 알포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졌지만 잘 싸웠어. 그래도 정말 멋진 승부였어. 그렇지, 브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던 알포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패배를 인정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킥.”

알포이는 피식 웃고는 자기 주먹을 클로드의 주먹에 가져다…… 대려다가 갑자기 활짝 펼쳤다.

화르르륵!

알포이의 손바닥에서 불꽃이 넘실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으헉!”

기겁하는 클로드의 뒷덜미를 웬디가 빠르게 잡아당겼다.

얼굴이 타는 건 피했지만 덕분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헤이, 브로!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클로드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어, 어? 잠시만. 지금 공격하려고? 영주님 앞인데? 오늘은 즐거운 날이잖아!”

“죽인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상황이 심각해진 걸 깨달은 웬디가 잽싸게 클로드를 들고 연회장 밖으로 도망갔다.

아무리 그녀라도 마법사 스물여섯 명을 정면에서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잡아 죽여!”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우르르 그 뒤를 쫓아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지었다.

지셀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자,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놀아. 저놈들은 내가 잡으러 가 볼 테니까.”

영주까지 빠지게 되자 사람들은 마음 편히 연회를 즐겼다.

웬디는 연회를 놓치게 된 아쉬움에 속으로 투덜거리며 클로드를 업고 영지 곳곳으로 도망 다녔다.

“뛰어! 잡히면 죽는다!”

“닥치세요.”

분노에 찬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쉬지 않고 두 사람을 쫓았다.

그 추격전은 지셀이 개입해 모두를 제압한 뒤에야 겨우 끝이 났다.

* * *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20년 노예가 된 클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얻어맞고 왔는지 꼴이 엉망이었다.

“너는 문제가 없는 날이 없지? 그래, 이번엔 뭐가 문제냐?”

“화장품이 성공한 건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누구든 한번 써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하겠죠. 저도 몇 개 좀 주십시오. 안나한테 보내 주게요.”

“성공했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야?”

“대량으로 생산하기에는 재료 단가가 너무 비쌉니다. 그렇다고 소량으로 생산하면 속도가 느립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이 화장품에는 수많은 약재가 들어갔다.

그중 가장 비싼 건 ‘요정의 축복’이라 불리는 꽃이었다.

길리언의 딸을 치료할 때도 썼던,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꽃.

실제로 들어가는 건 아주 소량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작 단가가 만만치 않았다.

“괜찮아. 귀족들한테 더 비싸게 팔면 되니까. 어차피 그 제품은 귀족들이 주 수요층이다.”

“고급화 전략 좋죠. 그런데 그것도 귀족들이 사야 돈을 벌 거 아닙니까? 성의 사용인들도 거부했던 물건입니다. 길리언이야 충성심으로 쓴 거죠. 귀족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제 홍보를 해야지.”

“어떻게요? 여기는 시골 영지라 귀족들도 없습니다.”

지셀은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갈 거야.”

“네?”

“사교를 즐기는 귀족들은 죄다 수도에 모여 있잖아? 거기서 인맥을 쌓고 화장품을 팔아 봐야지.”

“하아……. 수도 귀족들은 깐깐하기로 유명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뭘 믿고 영주님 제품을 사겠어요?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손해만 보고 본전도 못 건질 겁니다.”

“강제로 바르게 하면 어때?”

“네?”

클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족한테 강제로 바르게 한다니, 가능한 일인가?

“한 보름 정도 납치해서 가둬 뒀다가 피부가 좋아지면 풀어 주는 거지.”

“미치셨어요?”

“그래도 피부 좋아지면 고마워하지 않을까?”

“고마워하긴 개……. 아니, 아닙니다. 일단 죽이고 나서 생각하지 않을까요. 뒤늦게 깨닫는 거죠. 어? 이거 독이 아니었네?”

“흐음, 역시 별로인가.”

“당연하죠. 제발 상식적으로 삽시다.”

사실 지셀도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확실히 문제가 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델파인 공작가만 한 명성이 없는 이상 귀족들에게 파는 건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어차피 제품은 꾸준히 만들어 둬야 하니까 재료는 계속 주문해.”

“끙…… 하긴 이런 걸 개발해 놓고 안 팔 수도 없죠.”

클로드도 판매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효과가 확실한 제품은 대륙 어디에도 없다.

역시 가장 좋은 건 수도의 귀족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왕국의 유행을 선도하는 자들이었으니까.

귀족들에게 팔리기 시작하면 엄청난 돈방석에 앉게 될 것이다.

처음 한두 사람만 써 준다면 말이다. 그러기만 하면 너도나도 돈을 싸 들고 찾아올 텐데, 그 처음이 문제였다.

“초반에는 잘 안 팔릴 게 뻔하니 입소문을 탈 때까지는 조금 적게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야, 일단 쟁여 놔. 누군가 써 주기만 하면 바로 엄청나게 팔릴 거야. 그때 가서 준비하려면 너무 오래 걸려.”

“그렇긴 합니다만……. 안 팔릴수록 적자가 심해집니다. 단가가 너무 비싸요.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본전도 못 건집니다. 보관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요.”

“괜찮아. 수도에 가서 직접 부딪쳐 보면 어떻게든 될 거야. 정 안 되면 방문 판매라도 해야지. 그렇게 파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판매 전략이 어질어질하네요.”

방문 판매고 뭐고, 시골 촌놈이 파는 화장품을 누가 사 줄지 의문이었다.

멀쩡히 화장품 홍보만 하면 몰라도, 지셀은 화장품 사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할 거 같았다.

이러다 소문나면 지셀만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의 체면까지 깎이게 생겼다.

“방문 판매는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보시죠. 그냥 귀족들과 친분을 쌓는 게 더 낫겠네요.”

“그 방법도 써 볼까 고민 중이긴 해. 하, 친구 사귀는 거 쉽지 않은데.”

“……그렇죠. 쉽지 않죠.”

클로드는 이번 일에는 내기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효과가 확실한 제품이니 언젠가는 입소문이 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 달라붙는 귀족도 생기고 친분도 생길 것이다.

다만 금방 그렇게 될 리 없으니, 그때까지 쌓일 재고로 손해를 볼 게 아까운 것뿐이었다.

“그러면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어느 정도 수량을 채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웬만큼 팔 수 있을 정도로 쌓이면 출발해야지. 테스트하는 중에도 계속 만들고 있었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휴, 알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좋은 친구 많이 사귀시고요. 어휴, 잘 팔렸으면 좋겠네.”

클로드는 기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수도에 갔다 오는 데만 해도 한 달이 걸린다.

홍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영주는 꽤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될 터였다.

클로드는 지셀이 없는 틈을 타 휴식도 좀 취하며 지친 심신을 달랠 생각이었다.

‘빨리 꺼져 주세요.’

하지만 지셀에게서 나온 대답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다녀오긴 뭘 다녀와? 너도 같이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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