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4)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그들도 영지에 널리 퍼진 소문을 들었다.
지셀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내기를 했다는 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클로드가 내기에서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후후후, 이 악귀 같은 놈이 드디어 개망신을 당하겠구나. 잘했어, 총관. 믿고 있었다고!’
알포이는 웃음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셀이 크게 망신을 당하게 생겼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클로드에게 좀 잘해 줄 걸 그랬다며 알포이는 속으로 낄낄댔다.
다른 마법사들도 안색이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직 바네사만이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알포이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지셀을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크흠,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영주가 됐으니 전처럼 반말을 지껄이며 까불지는 못했다.
마탑의 후계자라고 해도, 탑주나 장로처럼 귀족 대우를 받는 건 아니었으니까.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왜 부르긴, 마법을 쓸 일이 있으니까 불렀지.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신경 써서 해야 해.”
“소문은 들었습니다. 설마 마법으로 지력을 끌어올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뭐?”
지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포이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많은 개간지를 우리끼리만 처리하는 건 무립니다! 지력을 강제로 끌어올리면 다음에는 땅이 더 척박해지는 건 아시죠?”
강력한 마법이나 신성력을 이용하면 지력을 순간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방법을 쓰는 영주는 없었다.
한 번만 써도 땅이 엉망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생명력을 강제로 뽑아 쓰는 대가였다.
부작용을 해결하려면 매번 주변 마나를 끌어와야 하는데, 그것도 수준 높은 마법사나 사제가 있어야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들을 고용할 바에야 그 돈으로 식량을 사 오는 게 훨씬 이득이다.
물론, 알포이는 지셀의 땅이 엉망이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설령 그런 부작용이 없더라도 힘을 써 줄 생각도 없고.
“애초에 그런 마법은 익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편법을 쓰는 건 공정한 내기에 어긋나는 겁니다.”
“뭔 소리야? 성 뒤편 공터에 마법진을 만들 거다.”
“마법진이요?”
알포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개간지도 아니고 성 뒤편에 만든다는 걸 봐서는 다른 쓸데없는 짓을 할 모양이었다.
“그래, 룬스톤을 써서 마나 집속진을 만들 거다. 재생 마법진을 중첩하고, 추가로 다른 마법진도……. 아니, 됐다. 너희들한테 말해 봐야 뭐 하겠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설명을 들은 마법사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명이 너무 성의 없기도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 듣는 형식의 마법진이었기 때문이다.
알포이가 짐짓 거들먹거리며 물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마법진인데요? 마법이 뭔지는 아세요?”
“아주 중요한 거. 일단 준비해.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 없다. 꼼꼼하게 확인할 테니까 신중하게 해라. 빠르고 확실하게. 알지?”
“쳇, 마나 집속진이 중심인 거 보면 뻔하네요. 내가 이 정도도 모를 줄 압니까?”
룬스톤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마나를 한곳에 모으는 마법진을 마나 집속진이라 한다.
그 안에서 마나 연공법을 수련하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마나를 쌓을 수 있었다.
기사든 마법사든 마나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마법진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쓸 수는 없다.
집속진 하나를 만드는 데 룬스톤을 몇 개나 써야 하는데, 그럼에도 마법진 지속 시간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였다.
며칠만 지나도 룬스톤이 모두 힘을 잃고 깨져 버리는 것이다.
부유한 영지에서 대단히 촉망받는 기사라면 모를까, 보통 기사들은 평생을 살아도 한 번 경험해 볼까 말까 한 게 바로 마나 집속진이었다.
물론 룬스톤을 가진 지셀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델파인 공작가의 소드마스터 발자크 백작도 젊었을 때 지원을 받아서 한 달 정도 쓴 게 전부라지?’
부유하기로 유명한 델파인 공작가도, 정말 재능 있는 자들만 모아서 잠깐 경험시켜 주는 게 전부였다.
“영주님이 직접 쓰실 겁니까?”
“내가 이걸 왜 써?”
지셀이 황당해하며 반문했다. 알포이는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직접 쓸 게 아니라면……. 혹시 여러 개를 만들어야 합니까?”
“오, 나름 날카로운 질문인데. 어디다 쓸 건지 감이 오나 봐?”
“흥, 그 정도야 당연하지요. 그럼 몇 개나 만들까요?”
“한…… 200개?”
“예?”
지셀의 말에 마법사들은 모두 기겁했다.
마나 집속진을 200개나 만들려면 들어가는 룬스톤의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예전에 마탑에 팔았던 분량 정도는 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알포이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정도는 필요하겠죠.”
현재 용병들이 삼백여 명에 가깝다.
그 인원들이 다 들어가 수련하려면 그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돈을 들여서 빠르게 키우는 건 좋지만……. 이렇게 돈을 많이 쓰면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텐데요?”
지셀이 조금 놀라서 답했다.
“한 번이면 충분해. 그래도 눈치가 제법인데? 벌써 파악했다니, 내가 널 너무 우습게 봤군.”
알포이가 더 칭찬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까지 영주님이 보인 행보가 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항상 뭔가 급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잘 알고 있네. 어쨌든 바쁘니까 알아서 빨리 준비해 달라고. 모르는 거 있으면 바네사한테 물어봐. 우리 영지에서 마법진을 제일 잘 아는 게 쟤니까.”
“그런데 도대체 다른 마법진은 왜 중첩하는 겁니까? 이런 건 본 적이 없는데……. 어느 마탑의 방식이죠? 검증되지 않은 마법진은 무척 위험합니다. 자신 있으세요? 게다가 이렇게 복잡한 건 작업 시간이…….”
“아, 누가 배운 놈 아니랄까 봐 참 말 많네. 토 달지 말고 그냥 빨리 진행해.”
마법사답게 잔뜩 호기심을 품고 따져 대던 알포이는 지셀의 험악한 표정에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궁금하긴 하지만 괜히 더 따지다가는 한 대 칠 기세다.
“뭐, 그렇게까지 부탁하시니 힘 좀 써 보죠.”
“검사할 거니까 확실히 만들어. 그래도 오늘 조금 다시 봤어. 하는 짓에 비해 머리가 똑똑한 놈이긴 하구만.”
지셀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던지고 자리를 떴다.
알포이는 왠지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들어 으스댔다.
“바네사, 들었지? 마법진 만들 준비 해. 며칠은 지속해야 하니 제대로 새겨 넣자고.”
“네, 넵! 알겠습니다.”
바네사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은 왜 마법 집속진을 만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듣자마자 영주님의 뜻을 짐작하다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마탑의 후계자이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포이는 마법사들을 지휘해 공터에서 바로 마법진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자신만만하게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였지?”
“이러면 마법 회로가 연결이 안 되는데.”
“이건 내 분야가 아니라서…….”
마법진은 제대로 그리려면 오래 연구해야 하는 분야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마법진이 발동하지 않고, 때로는 폭발하는 등 위험한 효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마법진을, 더군다나 처음 보는 중첩 마법진을 200개나 그려야 한다니.
알포이와 다른 마법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아이씨, 어떡하지? 이거 잘못되면 우리 다 뒤지는데. 그 새…… 영주님 성질 더럽잖아.”
알포이가 불안해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마법사들이 하는 꼴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바네사가 얼른 끼어들었다.
“저, 제, 제가 이 부분을 고, 고쳐 볼게요.”
“어, 그래. 한번 해 봐. 기회를 줄게.”
바네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법진을 새겨 나갔다. 마력이 부족하니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아주 작은 선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짚어 내지 못하는 부분까지 확인하니, 바네사에게 권위가 실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바네사는 금세 마법사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은근하게 뒤로 밀려난 알포이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헛기침만 해 댔다.
“아, 얘 공부 많이 했네. 열심히 했네. 빨래하면서 언제 그렇게 공부했대?”
다른 마법사들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은 없어도 지식이 제법이란 건 저번 전쟁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냥 제법 정도가 아니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데 전혀 막힘이 없는 게, 마법 지식만 따지면 마탑의 장로 이상인 거 같았다.
바네사 덕분에 한숨 돌린 알포이는 아예 그녀를 옆에서 도와주다 말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마법진은 뭘까. 나도 처음 보는 건데, 제대로 된 마법진은 맞나?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거지? 그냥 좋은 거 다 집어넣는다고 효과가 있는 게 아닌데.”
“그, 글쎄요? 영주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대로 하고 있긴 한데…….”
“페르디움 가문의 비전 같은 건가? 그 집안에 마법사가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알포이는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냥 하라는 대로 하자. 사고 나도 영주가 책임지겠지. 나 참, 내기에서 질 거 같으니까 별걸 다 하네. 이걸로 용병들의 환심이라도 사겠다는 건가? 쯧쯧…… 사람이 참 구질구질하네.”
옆에서 다 들은 바네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알포이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네, 네. 그러면 저쪽에 회로를 다시……. 아니, 뭐 하세요. 거기 아니라 여기요……. 아, 이거 모르세요? 공부 안 하셨어요?”
“어, 어? 미안. 여기 맞지?”
그녀가 알포이나 마법사들에게 건네는 말에 은근히 핀잔이 섞이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마나 집속진이 설치된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것도 무려 200개나!
소문으로 먹고사는 용병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느 순간 도박이나 술 얘기는 쏙 들어가고 다들 마나 집속진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대장이 마나 연공법도 가르쳐 주겠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잖아?”
“우리를 정예로 만들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니 그러지 않을까?”
“아, 이러면 최소한 장기 계약을 해야겠네.”
용병들도 계속 일 년짜리 계약을 갱신하면서 버틸 수 없다는 건 이제 알고 있었다.
분명 조만간 새로운 제안이 올 거고 그때는 좋든 싫든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아마도 마나 연공법과 마나 집속진을 미끼로 장기 계약을 유도하겠지.
용병들의 기대 속에서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마나 집속진이 완성되었다.
“내가 만든……. 아니, 바네사와 함께 만든 마나 집속진이다! 너네는 살면서 이런 거 처음 봤지? 으하하하!”
알포이가 으스댔지만 용병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우르르 지셀에게 몰려갔다.
마법진이 제대로 새겨졌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던 지셀은 용병들이 들이닥치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우르르 찾아왔어? 내가 안 불렀는데. 무슨 일 있어?”
대답은 길리언에게서 나왔다.
“마나 집속진이라고 하니 다들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호기심과 기대가 어린 눈빛을 보고 지셀이 피식 웃었다.
“다들 차례대로 기회가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그 말에 용병들은 확신했다.
이 마나 집속진은 정말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성미가 급한 고든이 못 참고 나섰다.
“그럼 누구부터 들어갑니까? 마나 연공법은 어떻게 하고요?”
“누구부터는 무슨……. 얘네부터 들어갈 거다.”
지셀이 시큰둥하게 내뱉으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클로드가 그 손 위에 주머니를 툭 올려놓았다.
지셀은 주머니를 안에 들어 있던 것을 한 움큼 꺼냈다.
튼실하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밀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눈만 껌뻑이고 있는 가운데 고든이 다시 물었다.
“설마…… 먼저 들어간다는 게 그겁니까?”
“응.”
“그거 밀알이잖아요?”
“그렇지.”
“혹시…… 걔들도 마나 연공법을 익혔나요?”
“그게 뭔 개소리야?”
고든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저 엄청난 돈이 들어간 마나 집속진에…… 밀알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다고요? 제가 아니고요?”
“아,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아니, 그리고 왜 네가 제일 먼저인데?”
지셀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제야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사람들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저 비싼 룬스톤을 사람도 아니고 밀알 따위에 태우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