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3)
영주성 앞에는 천막들이 수없이 많이 세워져 있었고, 사람도 그만큼 많이 지나다녔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면면이 눈에 익었다. 모두가 예전에 영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소문대로 사방에서 잡아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잡혀 온 것치고는 다들 표정이 밝았다. 화전민들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하며 지셀에게 끌려갔다.
바쁘게 움직이던 클로드가 지셀을 발견하더니 질색하며 혀를 찼다.
“오늘은 좀 많군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잡아 오시네요. 낚시꾼도 아니고.”
“추격, 기습, 섬멸이 내 장기거든. 매복도 잘하지.”
“네네, 노예 상인 하기에 딱 좋은 재능이네요. 진작 그 길로 나섰으면 대륙에 이름을 떨치셨을 텐데요. 아얏!”
깐족거리던 클로드는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꼭 한마디씩 더 해서 매를 버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재능이었다.
“헛소리 말고 이쪽도 빨리 처리해. 바쁘다.”
“알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화전민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고 단숨에 읊었다.
“당분간 이곳에서 머문다. 원하는 자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고, 그렇지 않다면 새로 세우는 마을에 집을 마련해 줄 거다. 건설에 참여할 인부들도 뽑고 있으니 관심 있으면 언제든 지원해라.”
화전민들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돌아갈 집은 이미 부서졌고, 가져온 짐도 얼마 없다. 그런데 집을 그냥 준다니, 얼씨구나 하고 절을 해도 모자란 마당이었다.
“식량도 당분간 배급해 줄 것이다. 영주님께서 개인 재산으로 베푸시는 거니 감사히 여기도록.”
빠르게 말을 쏟아 낸 클로드가 병사들에게 고갯짓했다.
곧 병사들이 밀을 비롯해 고기와 채소들이 가득 든 포대를 지고 왔다.
화전민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산에 숨어 지내며 먹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풍족한 음식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 그들을 보며 클로드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 명령이다. 떨어지면 또 줄 테니 제발 아끼지 말고 배부르게 먹어라. 괜히 아껴 먹는다고 깨작이다가 상한 거 먹지 말고. 너희가 배탈 나면 나만 골치 아파져.”
클로드가 한쪽을 가리켰다. 화전민들의 시선이 그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그가 가리킨 쪽에는 식량 포대가 수도 없이 쌓여 있었다.
그마저도 부족하다는 듯 새로운 포대가 쉴 새 없이 실려 들어왔다.
화전민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지셀을 돌아보았다.
정말 집도 주고 일자리도 주고 식량도 준다고?
“진작 얌전히 따라왔으면 안 맞았을 거 아니냐.”
지셀이 혀를 차며 손짓했다.
병사들이 묶여 있던 화전민들을 풀어 주자, 그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목이 잘릴 줄 알고 공포에 떨던 화전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다른 귀족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곧 새로 살 마을로 안내해 줄 거다. 그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지내도록 해라.”
하급 관리 중 하나가 화전민들을 임시 거주용 천막으로 안내했다.
얌전히 이동하는 화전민 무리 안에서 아이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산속에서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던 그 아이였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지셀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윙크했다.
“이거 봐, 나 좀 착한 사람이라니까? 내 말 맞지?”
옆에서 듣고 있던 클로드가 환청이 들리는 거 같다며 귀를 후볐다. 지셀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쭈뼛거리던 아이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지셀은 들고 있던 사과 하나를 아이에게 던져 주며 웃었다.
“이건 너 혼자 먹어라. 남 주지는 말고.”
아이는 다시 꾸벅 인사하고 어른들 뒤를 쫓아갔다.
이후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도망쳤던 영지민들을 찾아다가 집을 마련해 주고, 식량을 꾸준히 나눠 주었다.
기존 영지민들의 집도 보수를 하거나 새로 지어 주니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새 영주가 좋은 사람인 거 같다는, 기대감이 섞인 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그 소문에 답하듯 지셀은 바쁘게 움직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싸우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하고, 영지를 둘러보았다.
“도련님, 좀 쉬세요! 진작 공부를 좀 그렇게 하시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일하는 모습에 벨린다가 기겁하며 말렸다.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농사는 어쩌고 다른 데만 신경 쓰시는 거예요?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고요!”
열심히 일하긴 하는데, 정작 중요한 내기는 뒷전으로 미뤄 둔 느낌이 들었다.
한 달 동안 한 일이라고는 사람들을 잡아 와서 집 주고, 밥 주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아, 그거? 시간은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사람도 적당히 모였겠다, 안 그래도 곧 시작하려고 했어.”
영지민들도 기력을 차리고 살 곳도 마련됐으니 슬슬 중요한 작업을 시작할 때였다.
“경작지를 개간할 거다.”
인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영지민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집을 짓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 짭짤한 보수를 받았다는 소식이 퍼진 덕분이었다.
노인과 아이들까지 하겠다고 지원해서 돌려보내야 할 정도였다.
영지민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며 지셀도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오, 다들 힘이 넘치네. 좋은 현상이야. 금방 끝나겠어.”
새로 개간할 경작지의 위치도, 개간에 쓸 농기구 수급도 클로드가 이미 다 처리해 두었다.
지셀은 그저 영지민들을 끌고 다니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영지민들은 지셀의 뒤를 따라 땅을 갈아엎으면서도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못 쓰는 땅을 왜 개간하는 거지?”
“이거 나중에 괜히 작물 안 자란다고 우리만 경치는 거 아냐?”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온 그들은 펜리스 영지가 어떤 땅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에 있었던 영주들이라고 새 농지를 개간해 보자는 생각을 안 했겠는가?
지력이 약해서 들인 공보다 얻는 게 적으니 개간하지 않고 포기했을 뿐이다.
“그냥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자고.”
“농사를 아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모양이야. 쯧쯧……. 하지 말자고 할 수도 없고.”
“돈하고 먹을 걸 주니까 한다마는……. 솔직히 좀 무섭네. 나중에 무슨 소리 들을까 봐.”
“소문 들었어? 이거, 영주님하고 총관님하고 서로 내기한 거래. 여기서 작물이 자라나 안 자라나 말이야.”
“어이쿠, 우리 영주님 큰일 났구먼. 여기는 작물이 안 자라는 땅인데 그걸 모르셨나 봐.”
인부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숙덕거렸다.
내기에서 지면 영주가 괜히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래도 먼저 나서서 영주에게 조언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다들 일단 영주가 시키는 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굶고 살던 사람들에게 돈과 식량을 준다고 하면 열심히 일하는 건 당연했다.
영지민들이 경쟁적으로 달라붙으니 개간 작업은 며칠 만에 끝났다.
이제 계절이 돌아오고 씨를 뿌려 보면 영주가 한 일이 헛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곧 다가올 미래를 예상한 영지민들은 안색이 어두웠지만, 개간지를 둘러보는 지셀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쓸모없던 땅들이 이제야 쓸 만해지겠군.”
영지민들은 그 웃음을 보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왜 영주님은 쓸모없는 땅을 뒤집어엎으면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으면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에 같이 웃지도 못하고 먼 곳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불안함도 잠시, 작업이 끝나고 지셀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영지민들은 기대 섞인 눈빛을 내비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고들 했다. 갈수록 열심히 하니 정말 보기가 좋네.”
생각보다 작업 속도가 빨라 만족한 지셀이 인부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사람들은 서로 바싹 붙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렇겠지. 기분 좋아 보이시잖아.”
평범한 사람들에게 영주와 함께 일한다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영지민들은 클로드나 다른 사람들보다 지셀이 감독하는 구역에 우선 지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클로드는 일하는 내내 옆에서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하기에 영지민들이 가장 꺼리는 상관이었다.
떠나기 전에 일은 다 하고 가야 한다나?
어찌나 까탈스럽고 투덜거리는지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벨린다는 의기소침하게 앉아서 멍하니 인부들이 일하는 걸 구경하다가 갑자기 혼자 짜증을 부리곤 했다.
도무지 기분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벨린다 쪽에 간 인부들은 최대한 모른 척하고 일만 했다.
자꾸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중얼거리는데, 가까이에서 들은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아무래도 총관이 원한을 산 거 같다던가.
길리언이나 카오르는 분위기부터가 위압적이었다.
옆에 있기만 해도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존재감이 강해서 영지민들은 티 나지 않게 그들을 슬슬 피해 다녔다.
영주란 분명 영지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인데도, 같이 일하기에 가장 편한 사람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물론 영지민들이 지셀과 함께 일하기를 선호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걸로 술이라도 마시고 푹 쉬어라. 다음에도 지금처럼 열심히 하도록.”
열심히 일하면 지셀이 사람들에게 화끈하게 보상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빨리 일을 끝냈다며 인부들에게 기존 보수에 몇 실버씩 더 붙여 지급했다.
영지민들은 화색을 띠며 돈을 받아 갔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잘 쓰겠습니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시오!”
정해진 보수가 있었지만, 지셀이 열심히 한 자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급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적절한 보상이야말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와 함께 일하는 영지민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기뻐하는 영지민들을 보며 지셀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다들 돈 좀 팍팍 쓰라니까 왜 이렇게들 아껴? 시간이 중요한데 말이야. 쯧쯧…….’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추가 수당을 주라고 예산까지 책정해 줬건만, 다들 잘 쓰지 않았다.
가난이 몸에 배어 그런 모양이었다.
영지 돈을 아껴야 한다는 인식이 너무 강해서 돈으로 시간을 살 생각은 못 하는 것이다.
돈보다 작업 속도가 중요한 상황인데, 이래서야 영 손발이 맞지 않는다.
‘계속 잔소리를 할 수도 없고. 에잉.’
하나하나 붙잡고 잔소리하면 고쳐지기야 하겠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일을 맡겼으면 믿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애초에 지셀은 수하들에게 무언가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저 가끔 한 번씩 강조해서 상기시키는 수밖에.
지셀은 돈 안 쓰는 수하들 몫까지 자기가 쓰겠다는 듯, 쉬지 않고 영지에 돈을 풀었다.
“자, 다들 바쁘게 움직여라. 일이 많다.”
영지에는 일거리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워낙 방치되고 낡아 못 쓰게 된 시설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손봐야 할 시설들을 고치고, 농지를 넓혀 갈수록 불안에 떨던 영지의 분위기도 활기차게 바뀌어 갔다.
못 먹고 살던 영지민들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우리 영주님이 농사나 이런 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여기 살리려나 봐.”
“망나니였다는 소문도 있던데? 엄청 사고뭉치였대.”
“에이, 어렸을 때나 그랬겠지. 지금은 이렇게 돈도 많이 풀고 일도 주시잖아. 망나니였으면 술 마시고 놀기만 하지 이런 걸 하겠어?”
배가 불러야 인심이 좋아지는 법.
처음에는 지셀을 두려워하던 영지민들도 새로운 영주에 대해 급격히 호감을 보였다.
영지민들이 입을 모아 새 영주를 칭찬하기 시작할 즈음, 지셀은 마법사들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