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2)
펜리스 성에 도착한 일행들은 처참한 광경을 마주했다.
거지와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의 모습.
삶의 희망을 포기한 듯, 그들의 눈은 꼭 죽은 생선의 눈처럼 보였다.
지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군.”
지나쳐 온 마을 상태를 보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영주성 주변까지 이 모양일 줄은 몰랐다.
이건 영지의 잠재력까지 박박 긁어 빼 먹었다는 뜻이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도 별다를 건 없었다.
장비는 해어졌고 의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반란을 일으킬 힘도 없는 거지.’
반란도 어느 정도 힘과 의욕이 남아 있어야 시도하는 거다.
죽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항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신임 영주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이들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착취당하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 누가 영주가 되든 믿지 않는 것이다.
페르디움도 가난하지만, 최소한 사람들이 이렇게 좌절해 있지는 않았었다.
다른 일행들도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전 영주가 얼마나 착취했는지 아무리 봐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펜리스 영지는 쓸 만한 자원도, 특산품도 없다. 경작하기에 좋은 땅도 아니다.
영주가 풍족하게 지내려면 계속 영지민들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영주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영주가 되었으면 그대로 말라 죽었겠네.’
벨린다가 혀를 찼다.
그나마 룬스톤을 손에 쥔 지셀이 온 덕분에 희망은 생겼다.
영지민을 먹여 살리고,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돈이니까.
클로드도 그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영지를 발전시키려면 시간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영주가 돈이라도 많아서 다행이야. 버티기는 어렵지 않겠네.’
클로드는 지금까지 손에 넣은 정보를 다방면으로 가늠해 보았다.
‘충분히 해 볼 만하다.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어.’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자기 능력을 보여 줄 기회라고 여겼지만…….
지셀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은혜고 뭐고, 목숨 걸고 도망쳤을 것이다.
아직 클로드는 지셀이 원하는 목표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빨리 달성하기를 바라는지 알지 못했다.
델파인 공작가가 지셀의 적이라는 사실도.
최측근인 벨린다와 길리언에게도 일부러 숨기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만난 지 얼마 안 된 클로드에게도 전부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괜히 혼란을 줄 필요가 없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차라리 델파인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야망을 품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이 클 터였다.
‘아직은 아니야.’
지셀은 생각에 잠긴 클로드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공작가는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진실은 그때 가서 알려 줘도 될 것이다.
* * *
지셀은 성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모든 관료를 소집했다.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나마 영지가 완전히 마비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행정력을 유지시키고 있던 자들이었다.
관료들은 지셀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언제 오실지 몰라 환영회를 준비해 두지 못했습니다.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금방…….”
신임 영주가 부임하면 성대하게 연회를 여는 것이 관례였다.
관료들은 자존심이 상한 귀족에게 해코지당할까 봐 겁을 먹고 일단 머리부터 조아렸다.
“됐다. 그런 걸로 피곤하게 할 생각 없다.”
지셀의 대답에 관료들은 당황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화가 나서 비꼬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말해 두지. 당분간 영주 성에서 연회를 여는 건 금지한다. 개인적인 행사까지는 막지 않겠지만, 영지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눈치를 보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지셀은 바로 업무 지시에 들어갔다.
뜻은 확실히 전했다.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시켜 가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영지를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영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 일단 영지부터 정상화해야겠다.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잘 따라 주길 바란다. 언제든지 좋은 의견이 있으면 편하게 말하고.”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명령을 받들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은 이미 지셀의 손에 죄다 목이 날아갔다.
그걸 알고 있는 관료들은 감히 말대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존 직책은 모두 폐지하고, 자문회도 새로 구성하겠다.”
모여 있던 이들이 긴장해서 얼굴을 굳혔다.
관직이 어떻게 분배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 쥐고 있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결정될 터였다.
잠시 뜸을 들이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핀 지셀은 곧 클로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앞으로 여기 있는 클로드가 맡아 총관 자리를 맡아 정책을 세우고 시행할 것이다. 내 명령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협조하도록. 행정 업무에 필요한 서기관 등도 클로드에게 임명권을 위임한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등장하자 관료들은 조금 놀랐지만 금세 수긍했다. 측근을 주요 자리에 앉히는 건 흔한 일이었다.
클로드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셀은 처음부터 그에게 영지 관리를 맡기고 싶다고 했었다.
영지 상태까지 감안하면 총관 자리 정도는 줘야 클로드도 뜻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지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출납원의 재무관 또한 클로드가 맡는다.”
이 말에 몇몇 사람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 사람이 고위 직책을 두 개 이상 맡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클로드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내 금방 납득했다.
‘하긴, 돈 관리까지 내가 직접 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하겠지.’
바쁠 때 재무 관리를 맡은 자와 실랑이하느니 일이 늘어나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 정도는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도망도 못 가는 상황에 권한이라도 많이 받으면 좋겠지.
하지만 지셀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첩보관 또한 클로드가 맡는다. 산하 관료들도 알아서 뽑아 쓰도록.”
클로드는 슬슬 안 좋은 예감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그래. 정보는 중요하니까. 전쟁이 난 뒤에 부랴부랴 준비하느니 미리 알고 대비해 두는 게 좋지.’
하지만 지셀은 아직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외교부와 그 수장은 클로드가…….”
“영지의 치안관은 클로드에게 맡긴다. 병사는 상황을 보고 충원…….”
“전쟁 시 작전 참모로 클로드…….”
“영지를 빠르게 발전시키기 위해 특수개발부를 신설한다. 그 수장으로 클로드를…….”
“영지의 법을 새로 정비한다. 대법관은 클로드가…….”
“물자 관리와 군수관의 업무는 클로드가…….”
“영지의 상단을 창설할 것이다. 상단주는 클로드가…….”
지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클로드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스턴에서 떠나기 전에 지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 걱정하지 마라. 뽑아 먹을 방법은 많다.
아, 그때 그 말이 지독할 정도로 진심이었구나.
‘귀찮은 건 다 나한테 맡기겠다는 말이잖아! 도대체 얼마나 굴릴 생각인 거야!’
사실 영지를 관리하는 데에는 그냥 총관 자리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런데 굳이 온갖 자리를 가져다 맡기는 건 모든 일에 직접 관여해서 확실히 처리하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뭐든 확실하게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이 망할 젊은 영주는 안타깝게도 그런 쪽에 속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걸 전부 직접 하기에는 매우 귀찮으니 자신을 끌고 와서 다 떠넘긴 것이다!
사람이 저렇게 일을 하면 죽는다. 그러니 영주도 떠넘길 사람을 데려온 거겠지.
영주보다 체력도 약한 자신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클로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읍소했다.
“남은 인생은 안나와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여기서 살기 안 맞는 거 같습니다. 공기도 안 맞고 물도 안 맞고…… 일도 안 맞고.”
지셀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며?”
“그런 건 다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그냥 멋있는 척해 본 겁니다. 아프니까 청춘이죠.”
한 입으로 두말하는 꼴이 된 건 조금 창피하지만, 일하다 죽을 바에는 잠깐 쪽팔리는 게 낫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늦었어. 네가 떠날 방법은 이제 한 가지밖에 없다.”
“어떤……?”
지셀이 상냥하게 웃었다.
“돈 갚아. 그럼 바로 보내 주지.”
“으으…….”
클로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그놈의 돈 때문에 몇 년을 도박장에서 허비했다.
간신히 도박장에서 빠져나왔는데, 여기서도 돈 때문에 인생을 저당 잡혀 버렸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클로드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할 말이라도 하고 죽자고 마음먹은 찰나, 뒤쪽에서 벨린다가 바락바락 따지기 시작했다.
“도련님!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맡겨요!”
클로드는 눈을 빛내며 벨린다를 돌아보았다.
말로 사람을 패는 얄미운 여자이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고마웠다.
“저 사람은 도박 중독자에 폐인에 인생 포기자에 멍청이에 도망자에, 여자 마음도 몰라주는 한심한 놈이라고요! 변소 청소도 못 할걸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편을 들어주는 게 맞기는 맞는지 모르겠다.
클로드가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기존 관리들도 자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해 보기도 전에 선입견이 생길 지경이었다.
클로드가 벨린다를 말리려고 할 때, 이번에는 길리언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아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맡겨 보는 게 어떠신지요.”
‘그렇지, 저렇게 말해야지.’
역시 연륜이 다르다. 길리언은 그를 깎아내리지 않고 적당한 선을 지키며 지셀을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안심하기가 무섭게, 길리언이 덧붙였다.
“도박에 빠졌던 자입니다. 도박이 머리를 망가뜨린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어쩌면 글도 잊었을지 모릅니다.”
‘야!’
클로드가 거멓게 죽은 눈으로 길리언을 노려보았다.
길리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몸과 머리가 안 따라 줄 겁니다. 몇 년간 공부도 일도 안 한 상태이니까요. 권한을 많이 줄수록 그 힘을 악용해 도박이나 하면서 놀 게 뻔합니다.”
벨린다보다는 정중한 어조였지만, 진지하게 돌려서 까는 게 기분이 더 나쁘다.
클로드가 당황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모두의 눈빛은 완전히 의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클로드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
붉은 머리에 건들건들하게 생긴 놈 하나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름이…… 카오르라고 했나?’
카오르는 지셀이 오스턴에 갔다 오는 동안 펜리스 영지에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클로드와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카오르의 눈빛은 처음 만난 사이에 보이기엔 너무…….
‘왜 저렇게 도전적으로 쳐다봐?’
그는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는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도박장에서 건달들과 매일 구르며 살았고 반역까지 연루됐었다.
겨우 눈빛 하나에 기죽기엔 너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이거나 먹어라.’
클로드는 남들 몰래 가운뎃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카오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당장 뛰쳐나갈 듯 부들부들 떨면서도 지셀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약 오르지? 영주 앞이라 못 움직이겠지?’
클로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엄지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까딱까딱 흔들었다.
“이 새끼가!”
결국 카오르가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으며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