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1)
다음 날 아침, 안나는 여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듯 다급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5백 골드짜리 신용장을 손에 쥔 채, 울상이 되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옆에는 고든과 다섯 명의 용병이 서 있었다.
안나는 고든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그의 팔을 잡고 주저앉았다.
간절하게 호소했지만 고든은 계속 고개만 저었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로드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벨린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냥 같이 가면 안 돼요? 저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데.”
클로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자조하듯 대답했다.
“사실 안나도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가 피해자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 둘이 잘 살면 되잖아요! 우리 영지가 공기도 좋고 물도 좋아요.”
클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아픈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마 안나도 그렇겠죠.”
“안나도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설사 안나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스승님을 죽게 한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 곁에 머물겠습니까.”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건 그냥 그쪽이 멍청해서……. 앗차, 죄송.”
무심코 나온 본심에 말한 벨린다도 놀라서 입을 가렸다.
클로드는 화내지 않고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전 항상 멍청했죠. 스승님은 제가 살아서 왕국의 큰 학자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막상 저는 폐인에 도박 중독자가 되었으니까요.”
“그치만 이러면 결국 도망치는 거잖아요. 앞으로 잘하는 게 낫지.”
벨린다의 비난에도 클로드는 고개를 숙이며 옅은 숨만 내뱉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냥 서로를 추억에 묻고……. 그렇게 살다 보면……. 그 아픔에도 담담해질 때가 오겠죠. 안나도 그러기를 바랄 뿐입니다.”
벨린다는 못마땅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안나가 여전히 얼굴을 감싸며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클로드가 하는 말도 이해는 갔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버지를 죽게 한 남자와 평생 얼굴을 보며 함께 살 수 있을까?
괜찮다 생각해도 문득 원망스러운 마음이 치미는 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클로드 역시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짐작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래서 더 이상 비난할 수가 없었다.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던 지셀이 물었다.
“후회하나?”
“그럼요, 다시는 멍청하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밤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런 얄팍한 계략에 당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겁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나도 그랬거든.”
“영주님도 그런 적 있으신가 보군요.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닌 모양이죠? 관상이 딱 그렇습니다.”
“뭐, 지금은 그 후회를 바로잡고 있지. 최선을 다해서 말이야.”
클로드는 언제 씁쓸해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처졌군요. 사실 저 그렇게 분위기 망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지셀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불평불만도 많은 놈이지. 그만큼 일도 잘하고. 앞으로 기대하지.”
“뭘 믿고 그렇게 기대하는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무르라고 해도 못 무릅니다. 저 돈 없어요.”
“걱정하지 마라. 뽑아 먹을 방법은 많으니까.”
“무섭네, 무서워.”
클로드는 피식 웃으며 안나와 용병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나는 세이론 왕국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데 일생을 바칠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던 사람의 유지이기도 했다.
원래는 클로드도 함께하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는 스승을 존경하던 교수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안나를 잘 지켜 줄 것이다.
“홀가분하군요. 이제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클로드는 멀어지는 안나의 뒷모습을 일별하고 돌아섰다.
그녀가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며, 자신이 잊히기를 바라며.
그간의 추억과 후회를 천천히 흘려보냈다.
* * *
안나가 떠나자마자 지셀 일행도 바로 펜리스 영지로 출발했다.
영지를 비워 놓은 지 오래되었으니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영지를 정비해야 했다.
클로드는 앞으로 지낼 영지에 대해 상상하며 우울한 마음을 추슬렀다.
‘수천 골드를 턱턱 내놓을 정도면 상당히 잘사는 집안 출신이다.’
그는 앞서가는 지셀의 뒤통수를 흘끔 훔쳐보았다.
‘게다가 저 젊은 나이에 영주 자리에 올랐어. 가문 영지를 떼어 준 걸 텐데, 그렇다면 영주님 아버지는 최소한 백작급 이상일 거야. 어쩌면 공작일지도?’
공작은 아니더라도 대영주쯤 되는 건 틀림없었다.
클로드는 루타니아의 고위 귀족 중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을 꼽아 보다 고개를 저었다.
‘부담스럽긴 하군. 그런 대단한 가문이라면 인재들도 많을 텐데 말이야.’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클로드는 겁먹지 않았다.
비록 도박장에서 폐인처럼 지내며 인생을 다소 낭비했지만, 이제는 모든 족쇄에서 해방된 상태다.
앞으로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상황.
벌써부터 자신감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클로드는 조금이라도 미리 알아 두겠다고 영지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지셀은 가 보면 안다며 딴청을 피웠다.
은근슬쩍 벨린다에게도 물었지만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아, 그냥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라고요.”
“조금만 더 자세히 알려 주십쇼. 영지가 얼마나 훌륭한지 기대됩니다.”
“으음, 가서 직접 보세요. 저도 잘 몰라요.”
자꾸 캐묻는 게 불편했는지 벨린다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클로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모르긴 뭘 몰라? 보아하니 잘사는 영지를 보고 깜짝 놀라기를 기대하는 모양인데……. 내가 시골 촌놈인 줄 아나 보지?’
뻔한 짓이다. 촌놈이 크고 부유한 영지를 보고 깜짝 놀라는 걸 보고 싶어서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자신감이 대단들 하시네. 어디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보자.’
클로드는 주먹을 불끈 쥐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벨린다가 조용히 지셀에게 물었다.
“저 사람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요.”
“내버려 둬. 은근히 성깔 있는 놈이니까 괜히 자극하지는 말고.”
“귀족에게도 죽여 보라고 대드는 인간이니 오죽하겠어요.”
벨린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근데 진짜 괜찮아요? 영지 상태 보고 도망가는 거 아닌가 몰라.”
“성깔 있는 놈이라고 했잖아. 자존심 좀 긁어 주면 발끈해서 달려들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지셀이 낄낄대며 속삭였다.
벨린다는 웃음기 어린 눈빛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르고 의욕을 불태우는 클로드가 조금 불쌍해졌다.
* * *
며칠이나 말을 타고 달린 끝에 드디어 루타니아의 국경을 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로드는 별생각이 없었다.
‘강국이라도 변방은 별거 없구나.’
딱히 세이론 왕국의 변방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국경 인근은 원래 낙후된 지역이 많으니 클로드도 그러려니 넘겼다.
하지만 국경에서 멀어질수록 조금씩 의문이 커져 갔다.
‘뭔가 이상하네. 왜 자꾸 북쪽으로 가는 거 같지? 거기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뭔가 없어 보이고.’
클로드는 펜리스 영지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실상은 이미 지셀의 영지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지만, 그저 거쳐 가는 영지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에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마을들은 오스턴의 빈민가보다 더 가난해 보였다.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와, 이렇게 가난한 영지가 다 있다니. 도대체 영주가 어떻게 다스리는 거야? 아니지, 이건 다스린 게 아니라 뜯어먹었다고 하는 게 맞겠네.’
클로드는 안쓰러워하며 주변 마을을 둘러보다가 지셀에게 말했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이곳을 점령해도 괜찮겠습니다.”
“뭐?”
전생에도 클로드는 말에 거침이 없기로 유명했다.
지셀도 눈치 보지 않고 대놓고 의견을 내는 그를 아주 좋아했지만…….
“이곳 영주는 쓰레기입니다. 진짜 얼굴을 보면 침이라도 뱉고 싶을 정도군요.”
“…….”
“영지민들이 이렇게나 가난하다니, 영주가 능력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당연히 군사력도 약할 거고……. 시설이랄 게 없고, 있는 것도 낙후되었으니 먹어 봐야 남는 건 없겠지만요. 빈 땅이 많으니 점령해서 후방의 병참 기지 같은 용도로 쓰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그래?”
“물론 생활 수준도 조금씩 끌어올려야겠죠. 당장은 돈도 많이 들고 힘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게 이득입니다.”
“어, 음……. 그렇지. 나와 생각이 비슷하네.”
“다행이군요. 기회를 봐서 여기 영주의 목을 베시죠.”
“아, 그건 좀.”
클로드가 눈을 빛내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니가 자르라는 그 목, 내 목이거든?
“영주님이야 부유한 영지에서 귀하게 자라신 분이니 이런 가난한 영지는 눈에 안 차시겠죠. 하지만 대영주라면 모름지기 벼 한 톨이라도 놓치지 않고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부유하고 귀하게 자란 건 아닌데.”
지셀이 반박했지만, 클로드는 자기 할 말만 하기에 바빴다.
지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허락만 해 주시면 전쟁 명분은 제가 어떻게든 만들어 내겠습니다.”
클로드는 강력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지만, 지셀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 그래……. 기대할게.”
지셀이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니 클로드는 애가 닳았다.
그는 영지의 주인을 실컷 욕하며 지셀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때, 벨린다가 기지개를 켜며 속 시원하다는 듯 외쳤다.
“와, 이제 다 왔네요!”
침까지 튀기며 떠들던 클로드가 목이 꺾일 듯한 기세로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뭘 다 와요?”
벨린다가 의아해하며 답했다.
“이제 곧 영주성에 도착한다는 말이죠. 국경 넘어서부터 계속 우리 영지였는데, 몰랐어요? 하긴, 남작령 세 개를 합친 거라 좀 넓긴 하죠.”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라고?”
벨린다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클로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왜?”
“여기가 우리 영지라서 우리 영지라고 하는데 왜냐고 물으시면…….”
잔뜩 울상이 된 클로드가 지셀을 돌아보았다.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아니, 여기 내 영지 맞는데.”
지셀이 히죽 웃었다.
그 얄미운 표정에 클로드가 버럭 고함을 쳤다.
“아, 말이 안 되잖아요!”
“뭐가?”
“영지가 이렇게 가난한데 영주님이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아요? 설마 영지민들 쥐어짠 사람이 영주님이에요?”
“아니, 그건 아니고.”
클로드는 다급하게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벨린다도, 길리언도, 용병들도 모두 제자리에 서서 멀뚱멀뚱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장난을 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저기…… 영주님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세요?”
“우리 아버지는 여기보다 더 북쪽 페르디움의 변경백이시지.”
클로드는 조금 안심했다.
변경백이면 후작 대우를 받는 고위 귀족이다.
변경백들은 대부분 다른 영주보다 강력한 군사권과 자치권을 쥐고 있었다.
“변경백…… 그럼 페르디움은 이 영지보다는 발전되었겠군요?”
지셀이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여기보다야 낫지만, 거기도 가난하기로 유명하지. 마수의 숲하고 야만인들 때문에 발전하기가 힘들거든.”
클로드는 그제야 벨린다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 아, 그냥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라고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연히 물도 좋고 공기도 좋겠지!’
클로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영지가 부유하다고 착각한 거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좀 창피하긴 하지만, 착각할 만했지.
다만 그렇게 착각한 탓에, 본인 앞에서 악덕 영주니 목을 베자느니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 문제였다.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세상 무서운 걸 충분히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수양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클로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이럴 때는 그냥 튀는 게 최고다. 여기보다는 도박장이 나을 거야. 안나, 기다려! 곧 돌아갈게!’
지셀은 그의 속셈을 눈치채고 씨익 웃었다.
영지가 망했다는 둥, 영주를 죽이자는 둥 버릇없는 말을 들었지만 그다지 화는 나지 않았다.
여기가 정말 거지 같다는 데는 그도 공감하니까.
‘하지만 도망치는 건 용서 못 하지.’
지셀이 손짓하자, 용병들이 슬그머니 움직여 클로드를 포위했다.
왼쪽으로 빠지려고 하면 길리언이 막아서고, 살짝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이번에는 벨린다가 막아선다.
클로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도망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셀이 건들건들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네 생각은 잘 들었어. 의욕이 넘치는 게 아주 마음에 드네. 앞으로 잘해 보자고.”
악마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클로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 했는데. 보고 싶다, 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