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날을 기다렸다. (4)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빅토르가 이를 갈며 일어났다.
화상을 입은 얼굴과 몸은 따가울 정도로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갑옷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오히려 입고 있는 게 방해가 될 지경이었다.
검 또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휘어질 것 같았다.
마나로 열기를 억누르고는 있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빨리 놈을 처리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네놈을 죽이고 다른 놈들도 모조리 목을 잘라 주마.”
빅토르는 지셀을 노려보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스윽.
그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꺼내 갑옷의 이음새를 끊어 한 조각씩 집어 던졌다.
철컹. 철컹.
갑옷을 벗고 몸이 한결 가벼워진 빅토르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웃었다.
“기다리다니, 예의는 있는 놈이군.”
“그냥 죽이면 넌 저승에서도 핑계 댈 테니까. 그 명예도 모르는 놈이 갑옷을 벗고 있을 때 공격해서 당한 거지, 절대 실력 탓이 아니라고 말이야.”
“이 건방진 새끼가…….”
빅토르가 살기를 뿜어내며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붉게 물든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푸른 빛이 검을 감쌌다.
형형하게 퍼지는 밝은 빛은 빅토르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그 모습을 본 지셀의 눈에서도 붉은 귀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야 잡는 재미가 있지.”
구우우웅!
지셀이 코어 세 개를 동시에 개방하자 주변에 묵직한 기운이 퍼지며 검이 붉게 물들었다.
빅토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네놈이 그런 힘을……. 도대체 정보가 어디까지 잘못된 거지?”
“그건 지옥에서 네 주인에게 물어봐라. 아, 네놈 주인은 너보다 늦게 갈 테니 좀 기다려야겠네. 심심하겠는걸?”
“그 입을 찢어 주마!”
콰아아앙!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검이 부딪힌 충격으로 두 사람 주변의 불길이 일그러지며 훅 밀려났다.
“이거밖에 안 돼? 힘 좀 더 써 봐, 해럴드의 개.”
“닥쳐라! 쓰레기 새끼가!”
그그그그극!
빅토르는 코어 세 개를 모두 개방한 지셀의 마나를 견뎌 내었다.
불길에 그렇게 당하고도 이 정도라니, 마나의 양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과연 북부 제일의 기사를 노려 볼 만한 실력이었다.
내심 감탄하는 지셀과 달리 빅토르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을 것이다.’
세간의 이목을 속여 가며 이만한 인물을 키워 내는 건, 페르디움 같은 아무것도 없는 촌구석 영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빅토르는 지셀이 마법이든 뭐든, 편법을 써서 일시적으로 강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수를 쓴 것이냐!”
부웅!
지셀이 검을 곧추세워 빅토르의 공격을 막았다.
카아앙!
순간적으로 몸이 살짝 뜨며 옆으로 주욱 밀려 났다. 충격으로 손이 저릿저릿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군.’
지셀도 틈이 날 때마다 수련하고 마나를 쌓아 왔지만, 빅토르의 마나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의 마나 양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3단계를 모두 개방해 힘을 증폭시킨 자신과 비슷할 정도라니.
과연 해럴드가 애지중지 키워 낸 인재다웠다.
휘익!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빅토르가 따라붙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지셀은 아슬아슬하게 검을 들어 올려 막았다.
발이 밀리며 땅이 파였다. 쏟아지는 압력에 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예전에도 힘은 제법 쓸 만하다고 생각했지.”
“뭐?”
“힘으로 하는 건 나도 좋아해.”
지셀이 몸을 빠르게 돌리며 검을 내려찍었다.
카앙!
이번에는 빅토르가 아래에서 막는 모양이 됐다.
순식간에 공방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지셀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상대도 거리를 벌리며 온 힘을 다해 검을 맞대어 왔다.
카앙! 카앙! 카앙!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서로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양쪽 다 충격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이 감히!”
빅토르는 이를 악물며 남은 마나를 죄다 쏟아 내었다.
다른 놈들을 죽일 생각은 이제 버렸다.
눈앞의 적은 여력을 남겨 두어 가며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구오오오오!
빅토르가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올리자 검에 실린 마나가 더욱더 푸르러졌다.
치이이익!
지셀의 검기 또한 더 붉어졌다. 그의 몸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코어 세 개를 동시에 개방한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야 했다.
쿠웅!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달라졌다.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마나와 마나가 부딪치며 뿜어내는 소리였다.
사방을 옥죄던 불도 그 기운에 밀려 두 사람 주변은 침범하지 못했다.
완전하게 얽힌 마나 속에서 두 사람이 빠르게 움직였다.
콰아앙!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땅이 터져 나간다.
두 사람은 무아지경에 빠져 오직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검을 휘둘러 댔다.
쿠웅! 쿠웅! 쿠웅!
보통 사람은 보지도 못할 공방이 수백 합 이어진 끝에, 빅토르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찌…….”
움직이는 속도와 맞붙는 힘은 대등했다. 하지만 기술에서 현격히 차이가 났다.
지셀에게 상처가 하나 생기면 빅토르에게는 두 개가 생겼다. 그 뒤엔 한 번에 세 개, 네 개로 늘어났다.
빅토르는 갈수록 기묘해지는 검술에 따라가기도 벅찼다.
“대체 어떻게 네놈 따위가! 인정할 수 없다!”
“이거 웃기는 새끼네. 언제 너한테 인정해 달랬냐?”
빅토르는 이죽거리는 지셀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으로 갈라 버릴 기세였다.
그 힘은 제법 대단했지만, 그런 단순한 공격에 당할 지셀이 아니었다.
푸욱!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은 지셀이 검을 뻗었다.
기묘하게 흔들리던 검 끝이 상대의 심장 부근을 파고들었다.
“크헉!”
빅토르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지셀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실패로군.’
3단계까지 코어를 개방한 후폭풍이 슬슬 찾아오고 있었다.
회전하는 마나를 버티지 못해 근육은 찢어지고, 뼈는 비틀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적을 죽이기 전에 그가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무언가가 흐르는 감촉에 지셀은 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쳤다. 피가 잔뜩 묻어났다.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아마 이대로 가면 곧 귀와 입,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올 것이다.
빅토르도 금방 지셀의 이상을 감지했다. 그의 입에서 희열에 찬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흐흐, 그렇군. 어쩐지 힘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역시 편법이었군. 한계까지 생명력을 끌어 쓴다거나. 흑마법 같은 건가?”
“눈치 빠른 새끼네.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 다니며 시간을 끌어 볼 생각인가?”
“아니지, 그러면 네놈이 힘을 아낄 수도 있잖아? 차라리 조금 더 밀어붙이는 게 낫겠지.”
빅토르는 재능이 뛰어난 무인답게, 순식간에 지셀의 상태를 파악하고 최선의 대응 방법을 찾아냈다.
가슴의 상처가 얕지는 않으나 충분히 버티고 싸울 만했다.
“이제 알겠군. 네놈이 변수였어. 프랑크도 네놈 짓인가? 그래, 프랑크 따위가 너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빅토르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드디어 찝찝했던 원인을 찾았다.
해럴드도, 참모들도, 첩자들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진정한 변수.
이런 놈이 있었으니 계속 계획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놈의 목을 베어다 백작님에게 바치겠다. 그러면 다시 기회를 받을 수 있겠지.”
“까불지 마라. 누구 목을 뭘 어쩐다고? 돌아갈 수나 있을 거 같아?”
콰앙!
이번에는 지셀이 먼저 빅토르에게 공격을 날렸다.
“크하핫! 어디 한번 죽여 봐라!”
분명 자신은 지셀보다 한 수 처지는 실력이었지만, 빅토르는 걱정하지 않았다.
곧 지셀의 힘이 떨어지면 압도적인 속도와 힘으로 짓누를 수 있을 터였다.
콰앙!
다시 두 사람의 검이 맞붙었다.
공격 일변도인 지셀과 다르게 빅토르는 막는 데에만 집중했다.
상처가 하나둘 늘어났지만, 급소를 피하는 수준으로 버텼다.
피할 수 없을 거 같으면 그냥 생명에 지장이 없는 곳을 내주었다.
“크하하하! 멍청한 놈! 그래 가지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빅토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지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까드득!
지셀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인가?’
검 끝이 통제를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넌 이제 끝이다!”
콰아앙!
빅토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지셀이 다급히 몸을 뒤로 뺐지만, 한계에 이른 몸은 충격을 제대로 흘려 내지 못했다.
그의 눈과 귀에서도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끝이다! 이 쓰레기 자식아!”
콰앙!
다시 한번 검이 부딪히자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지셀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는 결국 바닥에 반쯤 주저앉고 말았다.
“우에엑!”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죽어라아아아!”
부웅!
빅토르의 검이 지셀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때였다.
지셀이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쭉 앞으로 뻗었다.
덜컥!
“어?”
검을 휘두르던 빅토르가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을 묶은 느낌이었다.
“잔재주를!”
투드드득!
마나를 끌어올려 대항하자 그를 구속하던 마나의 실들이 끊겨 사라졌다.
부우웅!
검이 다시 공기를 찢어발겼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한 수였다.
그때, 지셀의 왼손이 다시 반 바퀴 정도 돌아갔다.
콰아아앙!
빅토르의 검은 허무하게 바닥을 찍었다.
“어?”
분명 지셀의 머리를 노렸건만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자세를 흔들었다.
조금 방향을 트는 게 고작인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 방해 탓에 빅토르의 검은 지셀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제기랄!”
빅토르가 다급히 자세를 고치며 땅에 박힌 검을 다시 뽑아 들려던 순간.
푸우욱!
그의 굵은 목에 차가운 금속이 파고들었다.
“끄륵, 크르르륵!”
상처와 칼날 사이로 피거품이 쏟아졌다.
빅토르의 눈에는 의아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쑤욱!
지셀이 검을 뽑아내자, 빅토르는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바들거리는 그의 몸을 지셀이 발로 툭 쳐서 뒤집었다.
“크륵, 어, 어떻게…….”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아니면 원통함 때문인지 빅토르는 그 가느다란 숨을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지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빅토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평생 이기기만 할 줄 알았냐? 내가 누구인 줄도 몰랐던 놈이. 그러니까 지는 거야, 새끼야.”
피범벅이 된 지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온몸의 근육이 삐걱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승리했다는 희열이 그 고통을 압도했다.
“앞으로도 내가 이길 거다. 몇 번이고 쳐들어와 봐. 모조리 잡아먹어 줄 테니.”
“…….”
“그래도 운 좋은 줄 알아. 네놈은 곱게 죽는 편이거든.”
지셀은 피에 전 손으로 검을 고쳐 쥐고 단숨에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