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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80화 (80/269)

80화 이날을 기다렸다. (3)

타모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다리를 떨었다.

병사들이 불에 가까이 가지 못하니 빠져나온 부상자들만 겨우 옮기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제법 나왔는데 이제는 나오는 병사들이 거의 없었다.

‘젠장, 죄다 부상자들인데 이걸 어떻게 하라고!’

초반에 빠져나온 자들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나머지는 다 죽어 가는 놈들이었다.

그마저도 다 합쳐 5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빅토르, 이 등신 같은 놈! 잘난 척하더니 이게 뭐야? 이런 대군을 끌고 패배하다니!’

타모스가 빅토르를 원망하고 있는 사이, 눈을 굴리며 전장을 지켜보던 로웰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불길이 거세도 평야다. 달려 나오면 부상이 심하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어. 뭔가, 뭔가 이상하다.’

데스몬드는 훈련받은 기사와 병사들로 골라 지원군을 보내 주었다.

이 정도 상황에 그 모든 이들이 공황에 빠졌을 리는 없었다.

‘병력이 밀집 대형으로 붙어 있었던 탓인가? 서로 움직임이 방해되어서 미적거리다 불이 옮겨붙게 된 거라면…….’

적어도 천 명은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빠져나온 병사가 너무 적었다.

여전히 불 속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이 계속 들려왔다.

‘저렇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빠져나오지 않는다고?’

좋지 않은 예감에 심장이 뚝 떨어졌다.

로웰은 바로 페르디움 성의 동쪽과 서쪽을 확인했다.

‘먼지구름은 없다!’

적들이 추격을 시작했다면 기마병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먼지구름이 눈에 띄어야 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타모스에게 외쳤다.

“영주님! 당장 퇴각해야 합니다! 남은 병사들과 기사들을 이끌고 도망가십시오!”

“엉? 부상자들 데리고 가자며?”

“저 안에 뭔가가 있습니다! 당장 몸을 피하십시오!”

진작부터 엉덩이를 들썩이던 타모스는 로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도망가자! 모두, 모두 후퇴하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불길을 뚫고 뛰쳐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의 악마들처럼 보였다.

“저, 저 복장은…….”

두 사람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검은 갑옷에서 쉼 없이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모스는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어떻게 저들이 불길을 뚫고 왔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막아! 저놈들 막으라고!”

타모스는 그 말만 남기고 바로 말을 박차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 어? 영주님! 영주님!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로웰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잽싸게 타모스의 뒤를 따랐다.

남은 기사 몇 명마저 영주를 따라 도망가자, 지휘관을 모두 잃은 병사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우, 우리도 도망가자!”

“그럼 부상자들은?”

“어차피 우리가 졌어! 여기 있으면 우리도 다 죽는다고!”

눈치 빠른 병사들부터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부상자는 물론 무기들까지 버린 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데스몬드에서 보내온 병력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더 싸울 의지도 잃고 말았다.

“모두 퇴각하라! 어떻게든 살아서 영지로 돌아가라!”

용병들은 도망가는 자들을 미친 듯이 쫓기 시작했다.

“모두 잡아 족쳐!”

“크하하핫! 어딜 도망가!”

“다 죽여라!”

살육의 열기에 취한 용병들이 무자비하게 적들을 도륙했다.

“끄아아악!”

뒤를 잡힌 적들의 비명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용병들은 쓰러진 부상자들을 처리하며 달렸다. 절뚝거리며 도망가던 이들도 목이 날아갔다.

콰직! 콰지직!

“살려 줘! 항복이야! 항복한다고!”

“으아아악! 그만해!”

“무기 버렸어! 제발 살려 줘!”

병사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흥분한 용병들에게 그런 사정이 통할 리 없었다.

“우리 대장이 항복은 받지 말랍신다! 크하하!”

도망에 성공한 병사들은 극소수. 타모스의 호위 병력들도 거의 전멸했다.

“그만! 이제 그만 쫓아라!”

길리언이 손을 들어 흥분에 빠진 용병들을 제지했다.

여기서 더 쫓아갔다는 아군도 죄다 흩어질 판이었다.

“푸후, 조금 아쉽군.”

“아주 시원하게 몸 좀 풀었다. 크흐흐!”

“정말 끝난 건가? 시체들이나 뒤져 보자고.”

용병들은 쓰러진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지나 목걸이, 혹은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시체들 사이에서 희희낙락하는 용병들에게 길리언이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이지? 분명 전리품은 전쟁이 끝난 뒤 공평하게 나눠 준다고 했을 텐데!”

“에헤이, 이거 다 아는 양반이 왜 그러쇼.”

“이런 건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지.”

“같이 하시든가.”

용병들이 건들거리며 반발하자, 길리언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의 목에 도끼를 들이밀었다.

“그 시체 옆에 눕고 싶은 건가? 누가 제멋대로 움직이라고 했지?”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용병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지셀에게는 충성스러운 모습만 보이는 길리언이지만, 그 역시 본질은 거친 용병이다.

훈련할 때도 용병들을 거의 잡아먹을 듯 굴려 대서 다들 길리언을 무서워했다.

기세에 밀린 용병들은 시체에서 손을 뗐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무조건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불만만 쌓이는 걸 알기에 길리언은 한마디 더 내뱉었다.

“공자님의 명령을 잊었나? 아무리 용병이라도 최소한 사자에 대한 예의를 지켜라. 그리고 정당한 보수를 받아 가라.”

“끙…….”

“하긴 대장이 그렇게 말했었지……. 뭐, 어쩔 수 없나.”

명령을 상기한 용병들은 입맛을 다시며 수긍했다.

다른 고용주였다면 욕지거리를 하며 개겼겠지만, 지금은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용병들의 목줄을 죄고 다니면서도 길리언은 무거운 표정으로 종종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

지셀은 아직도 어디 간 건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용병들도 손쉽게 적들을 죽이고 빠져나왔는데, 지셀이 아직도 안 나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길리언은 갑옷을 확인했다.

디루스 엔트의 내피는 이미 쪼그라들어 기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그나마도 대부분 떨어져 나갔고, 일부만 보기 흉하게 듬성듬성 붙어 있었다.

투구를 만져 봐도 마찬가지.

이 상태로는 불길 속에 들어가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방에 치솟아 오른 불은 여전히 꺼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일반적인 불이라면 몸에 마나를 둘러 버틸 수 있겠지만, 저건 마력으로 된 불이다.

길리언도 저 안에서는 안전할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확인해 봐야겠군.’

그래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도와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빨리 찾아서 나오면 그만이었다.

길리언이 걸음을 옮기자 카오르가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이, 영감. 저기 다시 들어가려고?”

“그래, 공자님이 아직 나오지 않으셨다.”

“으하하, 지금 그 미친 사람을 걱정하는 거야?”

“말조심해라. 너도 여기서 그냥 죽여 줄까?”

도끼를 들어 올리자 카오르가 엄살을 부리며 물러났다.

“다음에 하지, 다음에. 오늘은 힘을 너무 많이 써서 피곤하다고.”

길리언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아무튼 난 다시 들어갈 테니 용병들이나 통제하고 있어라.”

“어이, 대장이 아직 안 나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어?”

“뭐라고?”

길리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카오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괜히 들어가서 방해하지 말라는 거야. 우리는 그냥 시키는 것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내 말 틀려?”

“음.”

카오르의 말도 일리가 있다.

지셀은 항상 적의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걸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아군도 그의 생각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아마 지금도 길리언이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언제나 칼날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사람이니까.

지셀은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길리언은 그런 주인을 뒷받침하는 것이 충성하는 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기다려 봐야겠군.’

하지만 카오르의 말도 틀린 건 아니기에 길리언은 잠시 더 기다리기로 했다.

아주 조금만 더.

* * *

카앙!

빅토르의 몸이 휘청거렸다. 자칫 늦었으면 목이 날아갔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빅토르는 당황했다. 이 영지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기사가 있다고?

일단 본능적으로 검을 찌르자 상대의 몸이 흔들리며 뒤로 쭈욱 물러난다.

“제법이구나!”

정신을 차리고 상대를 확인한 빅토르가 눈을 크게 떴다.

“네놈!”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

이번 전쟁에서 계속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방해한 그 징그러운 놈들 중 하나였다.

“잘도 내 앞에 나타났구나!”

빅토르가 검을 강하게 쥐며 분노를 토해 냈다.

그래, 이놈들도 모두 찾아 죽여야 한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던 그는 문득 이상한 광경을 보고 멈칫했다.

치이이이익!

상대의 갑옷에서 끊임없이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갑옷이 아니었어?”

안력을 돋우어 보니 본래 검은 갑옷이 아니라, 갑옷 위에 검은 무언가를 덧댄 모양이었다.

검은 덩어리가 열기를 흡수하며 수증기를 뿜어내는 게 보였다.

‘저 갑옷이 이 불길을 막고 있는 거야.’

깨달은 순간 빅토르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서, 설마 처음부터 이 함정을 염두에 두고…….”

전쟁 첫날부터 적들은 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언제든지 이 불을 터뜨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함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모든 병력을 모아 오기를 기다리며 유도한 것이다.

“너, 너…….”

빅토르는 정신이 나갈 듯한 충격에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상대는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며 말했다.

“그래, 내가 아주 비싸게 준비한 함정이지. 마음에 들어?”

“네놈이 준비했다고? 너, 누, 누구냐.”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만한 인물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분명히 영주나 기사단장 아니면 무관장…….

“지셀 페르디움.”

“……?”

“나 몰라?”

“지셀…… 페르디움? 대공자 지셀?”

“그래, 이 몸이 바로 그분이시다.”

지셀은 오만하게 턱을 쳐들고 선언했다.

멍하니 그를 보던 빅토르의 숨이 점차 가빠졌다.

‘망나니 대공자…… 방구석 소드마스터…… 북부의 쓰레기…….’

애초에 지셀은 안중에도 없었다. 위험 리스트에도 오르지 않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이름.

그런 놈한테 자신이 당하다니, 온몸을 감싸는 굴욕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에 열이 올라 어지러웠다. 빅토르가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북부 제일의 기사인 내가…… 망나니 따위한테 당했다고?”

“그래. 그리고 네놈 목숨도 여기서 끝이다, 빅토르.”

“……!”

빅토르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그는 해럴드의 숨겨진 패다. 그의 이름은 아직 알려진 곳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시골 촌구석 영지 사람이, 그것도 망나니라 불리는 대공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백작님이 틀렸다. 백작님의 정보가 잘못되었던 거야.’

빅토르는 확신했다.

이번 전쟁에서 진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데스몬드 백작의 실수 탓이었다.

영지에 배신자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놈이 백작의 계획을 전부 페르디움에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이름도 밝혀지고, 페르디움이 이런 거대한 마법 함정을 준비할 수 있었겠지.

그러니까…… 이놈만 죽이고 가면 된다.

그리고 돌아가서 말하면 된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그래도 방해하는 놈은 죽였으니 이제 괜찮을 거라고.

“건방진 새끼, 감히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혼자 나타나서 주둥이를 놀렸단 말이냐?”

빅토르가 두 눈에서 살기를 뿜어냈다.

사방을 뒤덮고 있는 불의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분노만이 그의 몸을 태울 듯 끓어올랐다.

“감히 망나니 따위가 북부 제일인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콰아앙!

수십 개의 검이 지셀을 향해 쏟아졌다.

카카카카캉!

지셀은 거대한 양손 도끼를 휘두르며 검을 막았지만, 몸이 점점 뒤로 밀렸다.

과연 빅토르는 실력이 좋았다. 크게 다쳤음에도 검로에서는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기사의 정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강맹하고 곧은 검이 쉬지 않고 지셀의 급소를 노렸다.

기세 또한 어찌나 강한지 지셀은 훨씬 더 큰 무기를 들었음에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카앙!

지셀의 도끼가 검과 충돌하며 튕겨 나간 순간, 놓치지 않고 빅토르가 검을 찔렀다.

푸욱!

몸을 틀어 피했지만, 빅토르의 검이 그를 쫓아와 어깨를 뚫었다.

치이이익!

불길에 뜨겁게 달아오른 검이 살을 태웠다. 지셀의 어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희열에 찬 빅토르가 다시 공격하려는 찰나.

지셀의 서늘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들려왔다.

“좋냐?”

“뭐?”

부웅!

사각에서 도끼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기겁한 빅토르가 몸을 뒤로 젖혔다.

카가가각!

쩌억!

갑옷의 가슴 부분이 쩍하고 갈라지며 피가 튀어 올랐다.

지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려 빅토르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퍼억!

“크윽!”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진 빅토르가 급히 일어섰다.

다행히 바로 공격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놈! 네까짓 놈이 어떻게!”

저 쓰레기가 자신과 비등하게 싸울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고?

아무리 자신이 다친 상태라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덜컹.

지셀은 도끼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투구마저 벗어 옆으로 던지자 땀에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확실히 제법이긴 해. 그런데 겨우 그 정도로 북부 제일이라고?”

그는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뽑아 빅토르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일어나. 누가 진짜 북부 제일인지 알려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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