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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76화 (76/269)

76화 역시 제법인 놈들이야. (3)

성벽과 가까운 곳에 마련된 튼튼한 막사.

용병 몇 명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지셀은 거침없이 막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단의 사람들이 퀭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수고했다. 알포이와 친구들.”

바로 알포이를 비롯한 마법사들이었다.

지셀이 적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으으, 망할 놈…….”

알포이가 뭔가 항의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지만, 다시 허물어졌다. 너무 무리해서 몸에 힘이 빠진 것이다.

지셀은 그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덕분에 잘 막아 냈다. 아주 좋았어.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으으, 전쟁 언제 끝나…….”

사실 마법사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성벽에서 파이어 볼이나 대충 쏘다가 도망가려고 했다.

어차피 페르디움이 멸망하면 거래도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마탑의 마법사가 페르디움에 있었다는 사실만 숨기면 마탑에 피해도 없을 터였다.

그들은 전쟁이 벌어진 뒤부터 계속 언제쯤 도망갈까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나타난 용병들이 계속 옆에 붙어 있어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오늘은 지셀의 부탁으로 아주 개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제 이거 안 해……. 진짜 머리 깨질 거 같다고…….”

알포이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이제 그 마법은 쓸 일이 없을 거야. 다음에는 다른 걸 부탁하지.”

“끄응…… 다행이군.”

알포이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답했다.

이들이 쓴 마법은 다름 아닌 대규모 탐색 마법이었다.

마법사 여섯 명이 성문의 경계가 미치지 않는 모든 곳에 탐색 마법을 펼쳤다.

이론적으로는 최선의 방도였으나, 사람이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수십 개의 시야를 머릿속에 한 번에 구겨 넣으려니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덕분에 지셀은 적군이 넘어오는 방향과 노리는 곳을 정확히 잡을 수 있었다.

“바네사, 잠깐 얘기 좀 할까?”

“네? 네!”

옆에서 마법사들을 간호하던 바네사는 지셀이 부르자 냉큼 그의 뒤를 따랐다.

같이 막사에서 대기하느라 쓰러진 마법사들을 간호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알포이를 무서워했다.

마법을 쓰지도 못하면서 알짱댄다고 괜히 핀잔만 들었다.

지셀은 막사 옆에 있는 망루에 올라가 어두운 성벽을 눈에 담았다.

“저놈들이랑 같이 있으니 많이 불편하지? 급할 때 함께 움직여야 해서 어쩔 수 없어. 당분간만 참아.”

“……괜찮습니다.”

멋대가리 없는 위로였지만, 바네사로서는 빈말로라도 위로해 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지셀이 말이 없자, 바네사는 눈치를 보며 주저하다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오늘 적이 올 걸 어떻게 아셨나요?”

탐색 마법으로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겠다는 계획 자체는 별다를 게 없다.

적들은 이쪽에 마법사가 있는 줄 모를 테니, 대비가 아예 안 되어 있을 터.

마법사를 데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떠올리지 못하는 게 이상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지셀이 어떻게 적들이 오늘 쳐들어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셀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본 적이 있거든. 그 폭죽.”

“전에도 저들과 싸운 적이 있으셨나요?”

“그래.”

영지마다 즐겨 쓰는 신호가 따로 있다.

전생에 해럴드는 폭죽을 이용한 신호를 자주 썼다.

그때마다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물론, 뭘 해 보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지셀의 힘에 죄다 박살이 났지만.

“사실 안 싸워 봤어도 뻔한 수작이지.”

싸워 본 적이 없었어도 대충 뭘 노리고 있는지는 눈치챘을 것이다.

전생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봤으니까.

“그래도 마법사가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잘 마무리하지는 못했을 거야.”

설령 상대의 계획을 짐작하고 있더라도, 그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법사들 덕분에 암습을 수월하게 막아 낼 수 있었고 반격을 취할 여유까지 생겼다.

“그나저나 전쟁을 처음 겪어 본 감상은 어때? 이제 좀 익숙해졌나?”

지셀은 막사 옆에 망루를 만들어 전쟁 상황을 마법사들에게 지켜보게 했다.

바네사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직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무, 무서웠어요.”

지셀은 익숙해지라고 했지만, 그녀는 이런 데 익숙해질 자신이 없었다.

첫날에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연신 구역질을 해야 했다.

차마 두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참상이었다.

고통 속에서 덧없이 쓰러져 가는 병사들의 모습은 늘 족쇄처럼 따라다니던 불운한 운명에 대한 고뇌마저 잊게 했다.

저들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일까.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공자님은 어떻게 그렇게 싸우실 수 있는 건가요?”

지셀이 날뛰는 모습을 그녀도 멀리서 지켜보았다.

거침없이 적을 죽이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에게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은혜를 베푼 사람이다.

언제나 장난스럽고 가끔은 엉뚱하기도 한, 보통의 귀족들과는 전혀 다른 공자.

그 뒤에 그런 흉포한 성정이 숨겨져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어떻게 보면 비난처럼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지셀은 담담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 영지와 영지민, 가족과 가신들, 기사들과 병사들, 나를 따르는 용병들……. 모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무슨 짓을 해서든 반드시 지켜야 해.”

바네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지는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그동안 지셀이 알려 준 수련을 하고, 시킨 일들을 준비하느라 페르디움의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시간도 없었다.

지셀을 마음 깊이 따르고는 있지만, 아직 페르디움에 대한 소속감은 없었다.

그러니 아군이든 적군이든 그녀에게는 그저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지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에게는 아니겠지. 그래서 강요할 수밖에 없어.”

“…….”

“네가 죽여야 할 사람들이다.”

단호한 어조였다. 바네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방법 말고는 승리할 방법이 없나요?”

지셀은 무서운 함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획에 성공한다면 적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지셀을 돕고 싶었기에, 이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직접 살육의 현장을 보고 나니,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실감이 났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셀이 말을 이었다.

“만약 적들이 병력을 분산시켜 성문 세 곳을 포위한다면 네가 없어도 이길 수 있어. 내가 각개 격파 하면 되니까. 피해는 다소 나겠지만, 성을 점령당해도 지리를 잘 아는 우리가 훨씬 유리하지.”

상대의 병력이 쪼개진다면 지금 상태로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적도 바보가 아니야. 만약 적군이 신중하게 뭉쳐서 움직인다면…… 우리는 이기더라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거야.”

“…….”

“결국 둘 중 하나가 전멸해야 끝이 난다면, 그래도 우리가 이기는 게 낫겠지?”

“…….”

바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의 말이 옳았다.

비록 마법을 익히느라 바빠 사람들을 사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지낸 그 짧은 기간이 바네사의 인생에서도 몇 안 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셀은 전쟁에 패해도 죽을 것이고, 항복해도 죽을 것이다.

그녀의 은인인 지셀을 살리려면 전쟁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네사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달빛에 비친 지셀의 웃음은 순수하고 밝은 미소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살의와 광폭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눈에는 방해가 된다면 누구든지 죽이겠다는 단호함마저 보였다.

“할 수 있지?”

이건 묻는 게 아니었다. 강요다.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

그제야 바네사는 그의 본질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공자님…….”

그의 본성을 전혀 몰랐다면 거짓말이리라.

바네사는 마탑에서 지셀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협박을 아직 잊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힘이 되고 싶었다.

동정 때문에 도와주었든, 필요해서 그랬든, 변덕을 부렸든 간에, 그는 자신의 절망을 해결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구원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아니었다.

‘나는…….’

삶을 짓누르는 절망.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조롱. 노력해도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좌절.

‘이제 그런 건 싫어.’

언제까지 뒤에 숨어서 다른 이들을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절망을 딛고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

아픔을 극복하고 좌절을 이겨 내려면 직접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삶.

지셀을 돕는 건, 바네사가 난생처음으로 직접 내린 결정이었다.

앞으로 삶을 보낼 이곳을 위해. 나를 인정해준 사람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이제는 더 이상 피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해 볼게요.”

* * *

빅토르는 막사 안에서 인상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참을 수가 없구나.’

전쟁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페르디움 정도는 총공격해서 병력을 갈아 넣으면 언제든 점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적에게 연달아 당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내가 가서 다 죽여야 하나?’

자신이 앞장선다면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 강한 기사다.

‘아니, 그러면 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야겠지만, 기사들은 공성전보다 야전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빅토르는 개인의 무력만 출중한 기사로 끝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자는 출세해 봤자 기사단장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차후에는 왕국의 고위 사령관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최소한의 피해로 성을 점령해야 자신의 지휘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아 빅토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통자를 알았지? 배신한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데스몬드 백작이 배신자 관리에 실패할 리가 없다.

‘설마 페르디움에 그 정도로 뛰어난 참모가 있다고?’

으드득.

이가 갈렸다. 마치 그의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놀고 있는 거 같았다.

계책은 실패했고 오히려 역으로 당하기까지 했다.

온몸을 휘감은 굴욕감을 참기가 힘들었다.

“어쩔 수 없군.”

화가 났지만, 이 이상 전술 싸움을 이어 갈 생각은 없었다.

보급이 부족하다 보니 느긋하게 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번에 이곳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무능한 놈 취급을 당할 것이다.

빅토르가 총공격을 결심했을 때, 막사 안으로 중년인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빅토르를 내려다보았다.

“백작님은 점령에 이틀을 보셨소. 한데 이미 이틀이 지났구려.”

“경의 작전을 이해할 수가 없소.”

빅토르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답했다.

“생각한 바가 있소. 전쟁은 곧 끝날 것이오.”

두 사람은 해럴드가 그에게 붙여 준 마법사였다.

그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4서클 마법사를 무려 두 명이나 보내 주었다.

하지만 이들은 기사인 빅토르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정도 영지를 점령하는 데 피해가 크면 오히려 실망하실 거요. 경도 백작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 않소?”

“차라리 부대를 나눠서 다른 성문을 동시에 공략하는 게 어떻소? 그래도 우리가 병력이 더 많을 거 같은데. 그러면 저쪽은 막는 병력이 더 적어지지 않겠소?”

마법사들이 훈수를 들었지만, 빅토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누는 건 큰 효과가 없소. 지금과 다를 게 없으니까. 적어도 세 군데로 나눠야 적의 병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 거요.”

“그렇게 하면 되지 않소?”

“적군의 부대 중 하나가 제법 뛰어나더군. 만약 한 군데라도 격파당한다면 대군이라는 이점이 사라지게 되는 거요. 다른 성문을 점령하더라도 다시 시가전에 돌입해야 하오.”

빅토르는 다른 건 몰라도 검은 갑옷을 입은 부대는 높이 평가했다.

오늘도 그놈들에게 당하지 않았는가.

접전이 가능한 상대가 있고, 불가능한 상대가 있다. 검은 갑옷 부대는 후자였다.

부대를 나눠 병력이 줄어든다면 적은 그들을 요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게 페르디움에게 있는 유일한 승리의 방법일 테니까.

“애초에 지금보다 병력이 더 많았다면 삼면을 포위하고 싸웠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뭉치는 게 낫소.”

빅토르는 몸이 하나이니 모든 방면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빅토르의 말은 정론이었으나, 마법사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겁먹어 핑계를 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으로 은근히 빅토르를 소심하다고 비웃으며 마법사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우리를 그냥 놀릴 셈이오? 저쪽에는 마법사가 없다는데.”

“마법사가 없다면 우리 둘만으로도 수백은 죽일 수 있을 것이오.”

마법사들이 끊임없이 타박하자 빅토르는 짜증스럽게 답했다.

“곧 출전할 것이니 준비하시오. 두 분의 마법은 마지막 전투에 쓰겠소.”

“마지막 전투?”

빅토르가 작전을 얘기하자 마법사들은 그제야 흥미로워했다.

“과연, 검술뿐만 아니라 지략도 뛰어나다더니 사실이었구려.”

“그런 작전이라면 찬성하겠소. 역시 백작 각하의 총애를 받는 기사요. 허허허.”

입 바른 칭찬에 빅토르는 되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이런 대군을 처음 지휘해 보는 그를 애송이라 여기는 것이다.

‘흥, 두고 보자.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난 더 높이 올라갈 테니까.’

비록 대군을 지휘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해럴드의 신뢰가 곧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빅토르는 데스몬드 백작만큼 철저하고 신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그 해럴드로부터 직접 모든 걸 사사받은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해럴드는 정예병 수천에 마법사들, 공성 병기까지 붙여 주었다. 과할 정도로 강한 전력이었다.

출정하기 직전, 해럴드는 그의 검술이라면 만일의 변수가 있더라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내일 바로 시작하겠소. 어차피 보급이 부족하니 조만간 결판이 날 것이오.”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막사에서 나갔다.

혼자 남아 지도를 바라보던 빅토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하겠다.’

상대방이 최선을 다한 만큼 이쪽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러면 절대 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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