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역시 제법인 놈들이야. (2)
휘익!
파앙!
페르디움 성의 동문 쪽에서 작은 폭죽 하나가 터졌다.
“가자!”
근처에서 대기하던 기병대가 그 신호를 확인하고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폭죽은 페르디움 군도 확인했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동문을 점령하고 버텨야 했다.
두두두두두두!
기병대가 달리자 뒤에 대기하던 보병들도 그들을 따라 달렸다.
속도 차이가 크지만, 일단 기병대가 먼저 성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기병들이 싸우는 동안 보병들이 합류할 수 있을 테니까.
열심히 성문을 향해 달리던 기병대의 지휘관은 문득 묘한 위화감에 어깨를 움츠렸다.
‘뭐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저 멀리 보이는, 횃불이 일렁거리는 성문은 분명 크게 열려 있다.
하지만 성문 근처에서 누군가가 싸우는 기색은 없었다.
‘내통자와 기사들이 병사들을 전부 제압한 건가. 아무리 상대가 일반 병사들이라고 해도 너무 빠른데?’
페르디움은 기사들이 부족하니 주로 병사들이 경계를 설 것이다.
그렇다면 잠입한 기사들이 빠르게 제압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데.’
지금까지 전장에서 쌓아 온 경험이 계속 본능을 갉작거렸다.
‘병력을 돌려야 하나?’
성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식은땀이 흘렀다. 등줄기가 간지럽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냐, 그래도 가야 한다.’
신호가 왔고 성문이 열렸는데 안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자신이 불안하다고 병력을 물리면, 안에 있는 기사들은 작전에 성공하고도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는 군인이었고, 위험하더라도 작전대로 움직여야 했다.
두두두두두!
기병은 순식간에 성문 가까이 다가갔다.
‘잠입한 인원은 소수다. 조용한 게 당연한 거야. 들어가자. 들어…….’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몰다 말고 문득 성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은은하게 붉은 빛을 내는 저 성문이, 악마가 벌린 입처럼 보였다.
들어가면 무조건 죽는다.
“퇴각해라! 퇴각!”
기병대 지휘관은 자기 감을 믿기로 했다.
그가 말머리를 돌리는 순간.
휘리리릭!
콰지직!
어디선가 날아온 도끼가 그의 목에 틀어박혔다.
기병대 지휘관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히이이잉!
주인을 잃은 말이 방향을 틀다 멈추고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지휘관을 뒤따라오던 자들 몇몇이 속도를 못 이겨 결국 부딪치고 말았다.
쿠웅! 쿵! 쿵!
“뭔가 있다! 함정이야! 함정!”
“으아아악! 무슨 일이야!”
“일단 방향 돌려! 본대로 퇴각해!”
선두가 쓰러지며 난장판이 됐지만, 남은 자들은 마지막 명령에 따라 그대로 방향을 틀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성안에서 도끼를 던진 지셀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실력들이 제법이란 말이지. 함정도 준비했는데 아깝게 됐네.”
안쪽으로 모두 끌어들여 죽이려 했는데, 급하게 준비하다 보니 함정이 완벽하지 못했다.
적의 지휘관이 그 틈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함정을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으니까.
“가자!”
지셀이 말에 올라타며 외쳤다. 기마 수백이 그를 뒤따랐다.
두두두두두!
성문을 뛰쳐나간 지셀의 기마대가 혼란에 빠져 도망치는 적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가볍게 남은 기병들을 처리한 지셀은 멀리서 달려오는 보병들 쪽으로 향했다.
보병 지휘관도 앞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고 이미 방향을 틀었다.
적들이 기습을 눈치챘다면 더 이상 접근해서는 안 된다.
“달려라! 잡히면 죽는다! 달리란 말이다!”
지휘관은 연신 병사들을 독려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병력이 많을수록, 전력으로 달리던 병사들의 방향을 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놈들이구나! 따라잡아라!”
두두두두두!
지셀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달렸다. 용병들도 그의 뒤를 놓치지 않고 따랐다.
결국 보병대는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콰아앙!
“으아아악!”
“막아! 막으라고!”
“일부가 저지해라!”
이미 등을 돌려 도망가던 자들이 제대로 방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셀과 용병들은 양 떼에 뛰어든 늑대처럼 날뛰며 적들을 처죽이기 시작했다.
* * *
한편, 빅토르는 보병대의 후열에서 학살이 벌어지는 것도 모른 채 병력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동문 쪽을 집중해 보다가 신호를 확인하고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다! 절반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 절반은 페르디움 성을 공격해라!”
아군 본대는 페르디움의 남쪽 성문을 공격하고 있었다.
빅토르는 따로 떼어 두었던 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열린 동문으로 향했다.
나머지 절반은 남문에 몰려 있는 페르디움 군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둥! 둥! 둥!
페르디움 군의 대응도 제법 빨랐다. 즈발터와 란돌프는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성벽으로 나섰다.
하지만 밤이라 빅토르의 군대 절반이 우회하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영주님! 동문 쪽으로 적의 군대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뭐? 란돌프! 당장 병력을 이끌고 지원하러 가라!”
란돌프는 즈발터의 명령에 따라 절반의 병력을 빼 동문 쪽으로 급하게 이동했다.
빅토르가 이미 예상했던 움직임이었다.
“크크큭, 소용없다. 너희는 이제 끝이다.”
동문은 미리 보내 둔 병력들로 이미 난장판일 터였다.
거기에 빅토르의 부대까지 더해진다면 페르디움 성은 완전히 함락되고 말 것이다.
시가전을 벌이며 항전할 수도 있겠지만, 병력의 차가 크니 결국 버티지 못할 터.
빅토르는 자신만만했다.
“자! 어서 달려라! 오늘은 성안에서 잠을 잘 것이다!”
그 뒤로 남은 기마병 천 명이 말을 달렸다. 병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 뒤를 따랐다.
아무리 다른 곳보다 작고 허술하더라도 성은 성이다.
대군을 이끌고 우회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어서…… 응?”
열심히 이동하던 빅토르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본대다! 살았다!”
“도와줘! 어서!”
“여기야! 여기! 빨리 오라고!”
저 멀리서 아군의 병사들이 대열까지 엉망이 된 채 달려오고 있었다.
빅토르는 얼이 빠져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 대응 명령도 내릴 수 없었다.
“다들 빠져! 뒤로 빠진다!”
보병들의 후미를 학살하던 지셀은 멀리 빅토르의 본대가 보이자마자 즉시 말머리를 돌리며 크게 외쳤다.
“으하하하하!”
“네놈들 때문에 잠도 못 잤잖아!”
“그래도 재미있었다!”
용병들이 크게 웃으며 지셀의 뒤를 따라 냉큼 도망갔다.
정신이 돌아온 빅토르가 분노를 토해 내며 소리를 질러 댔다.
“쫓아라! 저놈들을 쫓아!”
두두두두두!
기병대가 지셀의 뒤를 쫓아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도망치느라 사방에 퍼져 있던 아군 보병들에 가로막혀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어찌어찌 따라붙었을 때는, 지셀과 용병들이 이미 성문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들을 뒤쫓던 기병대의 지휘관이 크게 외쳤다.
“돌격해라! 따라잡을 수 있다!”
성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충돌하면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에 본대가 따라오고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벌면 될 것이다.
두두두두두!
기병대가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 돌격해 오자 용병들도 다급하게 성으로 들어갔다.
“야, 오줌싸개야! 비켜!”
“빨리 들어가! 따라잡혔다!”
“나부터 좀 들어가자고!”
겁을 먹었는지 들어가는 와중에 서로 부딪히고 난리가 났다.
끼이이익.
가까스로 용병들이 모두 들어가고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빅토르의 기병대는 몸을 낮추고 창을 들어 올렸다.
‘조금만 더!’
아슬아슬하지만 창살문이 내려오기 전에 도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뚫는다!’
선두의 기병대가 막 성문 근처에 도달했을 때였다.
촤아아아아악!
성벽 위에서 어마어마한 화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푸푸푸푹!
“으아아아악!”
기병들이 빗발치는 화살들을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뒤따라오던 병사들도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시체들과 뒤엉켜 쓰러졌다.
성벽 위에서 스코반이 신나게 외쳤다.
“쏴라! 계속 쏴! 막 쏴! 무조건 쏴!”
동문 수비병들과 스코반이 이끄는 마수의 숲 경계병들은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지셀이 불러 전부 대기시켜 놓은 덕분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우리도 도와라! 쏴라!”
뒤이어 도착한 란돌프와 병력도 그 모습을 보고 지원 사격을 시작했다.
쿠웅!
그사이 성문은 완전히 잠겼고, 창살문이 내려왔다.
이렇게 되면 마나를 다루는 기사들이 달라붙어 힘을 쓰지 않는 이상 단숨에 뚫을 수 없다.
남은 기병들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본대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기병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빅토르는 분노를 토해 내었다.
“으아아아아! 이 개자식들!”
자신이 쓴 계책에 역으로 당했다. 그나마 있던 내통자는 연락이 안 된다.
대기시켰던 기병대와 보병대의 피해를 합하면 삼백여 명이 넘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피해가 조금씩 누적되고 있었다.
“돌아가자!”
결국 그는 진지로 되돌아갔다.
페르디움에서 승리의 환호가 다시 울려 퍼졌다. 빅토르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를 갈았다.
란돌프는 신이 난 페르디움의 병사들을 뚫고 허겁지겁 지셀에게 다가갔다.
“대공자님! 이거 뭡니까? 어떻게 막은 거야!”
동문이 위급하대서 달려왔는데 정작 와 보니 적들의 시체만 쌓여 있었다.
게다가 진군하던 적들마저 모두 돌아갔다.
도대체 이 적은 인원으로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란돌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닙니다. 적이 머리를 좀 쓴 모양인데, 저한테 걸렸습니다.”
지셀은 포로로 잡은 기사들과 빅토르의 계략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란돌프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이번에도 또…….”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우연이 두 번이나 이어질 수 있을까?
란돌프가 아는 지셀은 절대 적의 계책을 알아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자신보다 더 무식했으면 무식했지, 머리를 쓰는 놈이 아니었으니까.
“크흠, 대, 대공자님이 조금 달라진 거 같기도 하구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셀이 참 마음에 안 들었다.
오죽하면 몇 대 패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페르디움이 위험할 때마다 지셀이 활약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도 슬며시 잊히고 말았다.
란돌프는 어색한 마음에 일단 자리를 피한 뒤 즈발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허허, 지셀이 그 인원으로 막아 냈다고?”
어쩐지 지셀과 용병들이 보이지 않더라니, 먼저 동문 쪽으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보급 부대를 잡은 전투가 본능적인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이번 일은 확실히 전략과 전술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 일이었다.
지셀이 없었다면 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쩌면 맞붙자마자 한 번에 끝났을 수도 있다.
사고뭉치였던 아들이 전쟁을 겪으며 성장했다는 생각에 즈발터는 감개무량했다.
이제 지셀은 영지에 없어서는 안 될 지휘관이었다.
“적의 계략을 알아내고 역이용하다니……. 전략을 공부한 적이 있었나? 허허, 역시 벨린다에게 교육을 맡기길 잘했…….”
란돌프가 정색하며 즈발터의 말을 끊었다.
“공부 같은 걸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공자가 얼마나 무식한데요. 저보다 무식할걸요.”
즈발터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아무리 사고뭉치라지만 그래도 제 자식 욕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은 법이다.
그것도 란돌프와 비교당하다니.
그의 표정을 본 란돌프가 뒤늦게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즈발터는 피식 웃고는 손을 휘저었다.
“뭐, 언제나 제멋대로 알아서 하는 녀석이니 제 나름의 방법이 있었겠지. 일단 쉬게. 병사들도 푹 쉬게 하고.”
궁금한 건 나중에 따로 묻기로 하고, 즈발터는 일단 병력을 정비했다.
조금이라도 쉬어야 내일 다시 이어질 전투에서 버틸 수 있었다.
* * *
란돌프가 즈발터에게 보고하는 사이, 지셀도 용병들을 해산시키고 홀로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빅토르! 네놈이 왔구나!’
포로로 붙잡은 기사들을 통해 적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해럴드 데스몬드의 검, 소드마스터 빅토르.
루타니아 왕국과 전쟁을 벌일 때 만난 적이 있는 놈이었다.
무려 대륙 7강인 지셀의 검을 수십 합이나 받아 낸 ‘제법’ 대단한 놈이었다.
결국은 지셀이 허리를 반으로 갈라 죽였지만, 나름 기억에 남는 상대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미래에 방해가 될 놈의 목을 지금 따 버릴,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놈은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여기서 목숨을 버리게 될 것이다.
‘아끼던 놈을 여기에 보내다니.’
아마 실전 경험을 쌓고 공을 세우게 해 주고 싶었겠지.
지셀이 없었다면 데스몬드 백작이 바라던 대로 되었겠지만…….
‘실수한 거다, 해럴드.’
지셀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살기를 뿜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