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바보를 어디에 쓰려고? (1)
분위기가 급변하자 긴장하던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는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박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셀이 룬스톤을 꾸준히 제공하겠다고 하자마자 마법사들은 갑자기 다시 저자세로 나왔다.
룬스톤을 구하지 못해 환장한 사람들 같았다.
이번 거래는 순전히 지셀이 미래를 알고 있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가 회귀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벨린다는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뭔가 약점이 있나 본데? 그러면 뭐 더 받을 거 없나?’
현실적인 벨린다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는 걸 포기하고, 더 큰 이득을 볼 방법이 없는지를 고민했다.
지셀이 멋대로 벌인 일에 몇 번 휩쓸리다 보니 나름대로 익숙해진 것이다.
세 사람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셀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가 어느 영지를 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럴 만한 힘도 없고요.”
“그래? 그런데도 전쟁을 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휴베르트가 조금 흥미가 생긴 듯 되물었다.
어디를 치는 게 아니라면 마법사를 빌려주는 데 부담이 덜하다.
“저희처럼 가난하고 힘도 없는 영지에서 룬스톤이 발견되었습니다. 과연 다른 영지가 가만히 있을까요?”
“……그렇군.”
페르디움처럼 힘없는 영지에서 룬스톤이 발견됐다면 분명 욕심을 부리고 치려는 영주가 생길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로 공격하기도 쉽지 않을 걸세. 어느 한 곳이 룬스톤을 먹으려고 한다면, 다른 영지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지셀이 내심 감탄했다. 역시 마법사의 날카로운 직관력은 무시해선 안 된다.
그 말대로였다. 어딘가가 페르디움을 친다면 다른 영지도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며 참전할 것이다.
처음 공격한 영주는 페르디움만이 아니라 여러 영지를 상대해야 할 테니, 한동안은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보겠지.
하지만 지셀은 그런 복잡한 정치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적은 확실하고, 델파인 공작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페르디움을 침공할 게 확실하니까.
그들에게는 그만한 힘과 정치력이 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룬스톤을 이용해 힘을 기를 때까지는 영지를 지킬 전력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서로 짜고 페르디움을 나눠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미래를 안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저 혹시 모르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휴베르트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마법사들을 빌려 달라는 지셀의 요청도 충분히 수긍이 갔다.
‘만약 영주들이 알게 된다면 곤란해지겠지.’
적염의 마탑은 이미 브리반트 영지를 지키고 있지만, 적어도 마탑 주변을 방어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다.
그럴듯한 명분조차 없는 페르디움과 결탁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적염의 마탑도 무사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휴베르트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페르디움의 상황에 끼어들고 싶었다.
‘이번에 받은 룬스톤에, 그 몇 배를 더 얻을 수 있다. 그거라면 분명 진홍의 마탑을 다시 넘을 수 있을 거야. 절대 저놈이 진홍의 마탑에 룬스톤을 판매하게 내버려 둬선 안 돼!’
영주들의 다툼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진홍의 마탑을 다시 눌러 버리고 왕국 제일의 마탑에 올라서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다.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페르디움의 룬스톤을 얻어 내야 했다.
휴베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장로들에게 물었다.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해 볼 만할 거 같은데?”
물어보고는 있지만, 하자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끄응, 비밀만 지켜진다면야…… 나쁠 건 없겠지요.”
“일단 오리발을 내밀고 우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디를 치는 건 아니니 가능할 겁니다.”
“마탑 출신이라는 게 걸리면…… 룬스톤을 연구하려고 왔다가 어쩔 수 없이 휘말렸다고 합시다.”
장로들까지 동의하자 휴베르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지셀에게 말했다.
“좋아. 마법사들을 빌려주지. 잠시 기다리게. 믿을 만한 사람들로만 추려야 비밀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휴베르트는 페르디움 영지를 지키는 데에 한 발 걸치기로 결심했다.
지셀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큰일은 없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생각보다 겁이 없는 젊은이군. 그쪽 입들도 확실하게 단속을 잘해야 할 것이야.”
“염려 놓으시지요. 용병이라고 잘 둘러대겠습니다.”
아무리 권력 다툼에 관심이 없다고 한들, 적염의 마탑도 귀족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염의 마탑은 그런 위험을 지면서도 지셀을 따라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지셀이 가져온 대량의 룬스톤, 그리고 마탑의 아쉬운 처지가 엮여 나온 결과였다.
‘도대체 이놈은 뭐지?’
막상 결정하고 나니 휴베르트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혹시 이놈이 우리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적염의 마탑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진홍의 마탑에 밀려 평판이 조금 떨어졌을 뿐이다. 룬스톤도 다른 상단들을 통해 소량이나마 사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마탑 소속 마법사들도 아직 자세한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마탑의 사정을 알 만한 고위급 마법사가 내통한 게 아닌 이상, 애송이 귀족이 이리도 뻔뻔하게 그들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휴베르트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내비쳤지만, 지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으로만 미소 지었다.
‘나와 손을 잡지 않으면 적염의 마탑은 더 빨리 무너질 겁니다.’
휴베르트는 아직 제대로 모르는 거 같지만, 진홍의 마탑은 철저하게 이곳을 짓밟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지금이야 지셀이 빌어먹을 망나니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상은 구명줄을 내어 주는 사람인 것이다.
휴베르트는 조금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일단 숙소를 마련해 줄 테니 쉬고 있게. 사람을 뽑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 같네.”
“알겠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거래가 마무리한 지셀이 당당하게 밖으로 나섰다.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는 멍하니 그 뒤를 따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옆에서 직접 보고서도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
지셀은 나흘이 지난 뒤에야 마탑주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휴베르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는 지셀을 앞에 두고도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듯 장로들을 돌아보았지만, 마법사들은 모른 척 다른 곳만 바라보았다.
보다 못한 지셀이 먼저 말을 건넸다.
“모두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닌 게 아니라 휴베르트는 눈 밑에 다크서클까지 진 채 죽어 가는 사람 같은 낯빛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도무지 마법사 열 명은 안 될 거 같아.”
4서클만 되어도 한 영지의 전속 마법사가 될 수 있다. 쉽게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도 3서클 마스터, 4서클 유저는 마탑을 지탱하는 근간이었다.
무작정 추린다면 3서클 마스터 열 명은 어떻게든 채울 수 있겠지만, 비밀 유지가 될지 불안했다. 입이 무겁고 마탑의 지시에 잘 따를 자를 추려야 했다.
‘끄응, 다들 저밖에 모르는 놈들이라.’
마법사들은 대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보니 믿을 만한 자를 뽑기가 어려웠다.
탑주와 장로들의 제자를 모두 합해도 조건에 맞는 자는 딱 여섯 명뿐이다.
그렇다고 룬스톤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휴베르트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믿을 만한 사람들로 추리다 보니 열 명을 채우지 못했어.”
“음, 그럼 몇 명까지 가능합니까?”
“일단 장로들의 제자들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이네. 어떡하지?”
“어떡하긴요. 아쉽지만 다음에 거래하도록 하시죠.”
지셀이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휴베르트가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은 없겠어? 우리가 누군가. 북부 제일, 적염의 마탑이야. 좋은 관계를 쌓으면 앞으로도 페르디움 영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장로들도 그 옆에서 지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3서클 마스터 여섯 명이면 작은 영지를 지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 그 정도만 해도 일반 병사 수백은 그냥 날려 버릴 수가 있네.”
“다시 생각해 보게. 절대 부족한 게 아니야.”
마법사들이 애원하자 지셀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다른 방법도 있긴 합니다만…… 탑주님께서 들어주실지는 모르겠군요.”
지셀이 살짝 양보해 줄 기미를 보이자 휴베르트는 마음이 급해졌다.
“어허, 우리 사이에 그 무슨 섭섭한 소리인가? 자네 부탁이라면 내 드래곤이라도 잡으러 갈 수도 있지. 어떤가? 뭐든 말해 보게나.”
휴베르트는 정말 드래곤이라도 때려잡을 것처럼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섯 명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그러니 추가로 마법사 한 명을 아예 저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응? 아예 달라는 건…… 영지의 전속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영지의 전속 마법사라기보다는 제 전속 마법사라고 하는 게 좋겠군요.”
휴베르트가 미간을 좁히며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그건 마탑에서 마법사를 쫓아내라는 말 아닌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마탑에서 쫓아내는 것까지는 탑주의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지셀을 따르게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자존심 강한 마법사의 특성상 오히려 지셀에게 원한을 가질 가능성이 더 컸다.
“설령 쫓아내더라도, 자네를 따를지는 그 사람 마음에 달린 거라 우리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다른 걸 해 주면 안 되겠나?”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거야 그 마법사님 의견을 한번 들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들어 보고 다시 얘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휴베르트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불러서 한번 물어보겠네. 혹시 원하는 마법사가 있나? 아니면 우리가 추천해 주면 되나?”
휴베르트가 묻자 지셀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이름을 말했다.
“바네사.”
“응?”
그 이름을 듣고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도무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누군데?”
직계 제자면 몰라도, 마탑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아, 그 식충이 바보!”
“응? 그게 누군데? 자네가 알아?”
“그 있지 않습니까. 마탑에서 밥만 축내는 제자요. 걔한테 돈 들어가는 게 아까워서 예전에 쫓아내려 했다가…… 흠흠, 아무튼! 얼마 전 죽은 로나토가 예전에 거둬들였던 제자 말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그제야 휴베르트도 기억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아이? 지금 그냥 하녀로 쓰고 있는…… 아차차, 흠흠. 그 아이도 우리 마탑의 훌륭한 마법사지. 암, 그렇고말고.”
휴베르트는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곧 활짝 웃으며 지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걱정하지 말게. 내 반드시 그 아이를 자네의 전속 마법사로 임명해 주지.”
“갑자기요? 일단 의견을 물어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허, 의견은 무슨. 탑주인 내가 시키면 하는 거지. 하하하. 이거 참 생각보다 거래가 쉽게 끝나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젊은 친구가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나군요.”
“어쩌면 그렇게 예쁘고 총명한 아이를 고를 수가 있는지. 허허허.”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흐흐, 역시 애송이는 애송이구나. 그런 바보를 어디에 쓰려고.’
‘쯧쯧. 마나도 제대로 못 느끼는 계집인데 마법사는 무슨…….’
‘여기서 지내는 동안 보고 반했나 보지?’
지셀이 요청한 바네사라는 제자는 얼마 전 스승이 죽은 뒤 홀로 지내고 있었다.
연고가 없어 마탑에서 일단 보살펴 주고는 있지만, 그녀를 제자로 받겠다고 나서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워낙 재능이 없어 마나를 느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질게 바로 쫓아냈다가는 마탑의 평판에 누가 될지도 모르니 일단은 하녀로 쓰고 있었다.
마법사가 될 재능조차 없는 한심한 존재를 마법사랍시고 달라고 하다니.
탑주와 장로들은 속으로 지셀을 맘껏 비웃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지셀이 자존심 상해서 그냥 가 버리면 룬스톤을 얻지 못할 테니까.
“그러면 잠시만 기다리게. 내 금방 마법사들을 데리고 올 테니.”
지셀의 마음이 바뀔까 봐 장로들이 잽싸게 제자를 데리러 갔다.
혼자 남은 지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장 중요한 거래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