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싫으면 말고요. (4)
휴베르트가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로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쓸모없는 것들!’
상리에 밝은 이가 없으니 이런 거래를 이끌 사람도 없었다.
“젊은 친구가 제법 강단이 있군. 하지만 거래란 게 원하는 대로만 되는 게 아닐세. 여기까지 찾아온 성의도 있고 우리도 편하게 거래할 수 있으니 처음에 말했던 두 배를 주도록 하지. 이 정도면 충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세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네!”
“그렇습니까? 제가 큰 오해를 했군요.”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룬스톤은 본래도 값이 만만치 않은데, 그 세 배라면 엄청난 돈을 써야만 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마탑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 돈이 한 번에 나가면 기둥뿌리가 뽑혀 나갈 것이다.
― 누가 좀 뭐라고 해 봐! 방법 없어?
― 또 간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 저거 그냥 미친놈 아닙니까?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한참 동안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지셀은 여유 있게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이미 결론은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승자로서 배려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결국 휴베르트는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세 배에 전부 사도록 하지.”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무자비한 거래가 정말로 성공하다니.
하지만 지셀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때를 잘 맞추신 겁니다.”
“잘 맞추기는 쥐뿔…….”
휴베르트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 젊은 놈의 수작질에는 넘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다른 장로들도 입맛만 다실 뿐, 탑주의 결정을 말릴 생각도 못 했다.
지셀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들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지금 좀 비싸게 사는 게 나을 겁니다. 나중에는 더 비싸질 테니까요. 화병으로 죽는 것보다는 낫죠.’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시세의 다섯 배를 불러도 룬스톤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진홍의 마탑이 대부분의 상단과 손잡고 유통을 꽉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휴베르트는 후에 이 사실을 알고 화병을 얻어 쓰러졌다.
‘어쨌든 돈은 충분히 구했군.’
마탑이 처한 상황과 그 미래를 마탑보다도 잘 아는 지셀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지셀로서는 나름 합리적인 수준의 조건인 셈이다.
“돈은 바로 준비해 주겠네. 지금 가져온 룬스톤은 적염의 마탑이 모두 구매하도록 하지.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게.”
휴베르트는 빨리 돈을 주고 지셀 일행을 내쫓고 싶은 티를 풀풀 냈다.
하지만 지셀의 조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조건을 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
휴베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는 쪽에서 값을 불렀고, 사는 쪽이 동의했다. 돈만 주고받으면 끝나는 일인데 뭐가 더 남았단 말인가?
지셀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추가로 마법사 열 명을 페르디움 영지에 파견해 주십시오. 기한은 일 년.”
“마법사?”
“네, 3서클 마스터 이상으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전속 마법사가 없는 영지에서는 간혹 마탑에 마법사를 파견해 달라 요청하곤 한다.
마탑에서는 그 대가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았다.
마법 도구나 스크롤을 판매하는 것만큼 큰돈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마법사를 파견하는 것도 마탑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얼마나 낼 건가? 우리 마법사들은 아주 비싼 몸들일세.”
뜯긴 돈을 다시 받아 낼 수 있다는 기대로 휴베르트가 눈을 빛냈다.
건방지게 자신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귀족에게 룬스톤 이상의 가격을 받아 내서 손해를 메꿀 참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휴베르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독했다.
“아, 뭔가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시세의 세 배에, 마법사 파견까지 포함한 게 룬스톤 값입니다. 하하하.”
“뭐라고? 이, 이 미친놈이…….”
얼굴이 시뻘게진 휴베르트가 뒷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탑주님! 이놈이 진정 저희를 우습게 본 모양입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건 모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들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험악한 분위기에 길리언은 조용히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흥미롭다는 듯 구경만 하고 있는 카오르나 지셀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벨린다와는 딴판인 모습이었다.
지셀이 공격받으면 바로 대응할 생각이었다.
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다시 한번 자신의 거래 조건을 읊었다.
“시세의 세 배, 덤으로 3서클 마스터 이상의 마법사 열 명 파견. 이게 제가 원하는 조건입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소리를 지껄여! 마법사를 덤으로 얹어 달라니, 내 생전 그런 거래는 본 적도 없다!”
“거참 이상한 분이네. 그렇게 싫으시면 관두고요.”
지셀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나름 제가 생각해 드린다고 적염의 마탑에 먼저 왔는데, 좀 서운하네요. 어쩔 수 없죠. 진홍의 마탑에서는 파견해 주시려나.”
휴베르트는 너무 열 받아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면서도 당해 줄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달려가 지셀 앞을 막아섰다.
“에헤이!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냥 그런 거래를 본 적이 없다, 처음 본다 이거지! 앞으로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제가 또 오해했군요. 성격이 좀 급해서 그렇습니다.”
지셀이 히죽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휴베르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잘 보이려 애쓴다. 그런데 이 건방진 놈은 마탑이고 나발이고 알 바 아니라는 듯 굴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분명 오늘만 사는 놈일 거야. 진짜 룬스톤이 부족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머리를 태웠을 텐데!’
하지만 자존심을 세우자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저 많은 룬스톤이 진홍의 마탑에 들어가면 격차가 더 벌어질 거야.’
그것만은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안 되는 일이다.
“그, 그래. 3서클 열 명……. 영지에 뭐 큰 공사라도 하나 보지? 아니면 결계를 새로 만드나?”
“아뇨. 전투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뭐?”
휴베르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법사가 전투에 참여할 경우, 위험 수당 명목으로 돈을 더 많이 받는다. 하지만 지금은 죄다 공짜로 제공해야 할 판이었다.
“몬스터 사냥이라도 나설 생각인가?”
확인차 묻자 지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 즉 영지전에 쓸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휴베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장로들 또한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며 외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은 영지 간의 분쟁에는 참여할 수 없다.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마탑이라는 강력한 세력이 특정한 영지를 편든다면, 결국 국가 전체가 마탑에 휘둘릴 수 있기에 지정된 법률이었다.
이 법을 어겼다가 적발되면 마법사는 물론, 그가 소속된 마탑도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된다.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은 영지전에 참여할 수 없다. 귀족이면서도 그걸 모른단 말이냐!”
홀로 연구하거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자유 마법사들만이 영지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설마 마법사들을 마탑에서 쫓아내고 전쟁을 치른 뒤 다시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실제로 그런 꼼수를 썼던 귀족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마탑 하나가 왕국에서 완전히 매장당했다.
지셀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뭐,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정체를 철저히 숨겨서 참전했으면 합니다. 절대 걸리지 않게 말이지요. 아예 우리 영지의 소속인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겁니다.”
역사 속에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애송이를 믿고 시도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룬스톤 거래는 마탑이 아쉬운 처지이니 비싸게 사라는 정도야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선을 넘었다.
“감히…….”
휴베르트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런 위험한 발언을 하고 이곳에서 몸 성히 나갈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마어마한 마력에 방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장로들 또한 마력을 끌어올리며 지셀을 압박했다.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릴 놈이구나.”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니 우리가 우습게 보이더냐?”
“마법사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마.”
명분은 충분했다. 지셀이 먼저 위험한 발언을 했으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벨린다와 카오르도 무기를 잡았다.
상대는 무려 6서클과 5서클에 이른 마법사들.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도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길리언은 앞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정 안 되면 몸으로 막을 수밖에.’
제 몸을 바쳐서라도 지셀을 지킬 생각이었다.
반면, 카오르는 오히려 살기 어린 눈빛으로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놈부터 처리한다.’
그는 휴베르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자세를 낮추었다.
시선이 지셀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마력이 방출되는 순간을 노려 바로 목을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휴베르트만 없애면 나머지 장로들을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할 터였다.
‘맛이 간 우리 고용주는 제법 실력이 있으니 알아서 버티겠지. 죽으면…… 뭐 어쩔 수 없고. 무덤에 멍청한 놈이라고는 써 줄게.’
한편 벨린다는 지셀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카오르를 방패로 쓰고 그 틈에 도련님을 빼내서 도망가야겠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도련님! 배짱부릴 상대가 따로 있죠! 그러게 적당히 좀 하시지!’
그녀는 슬며시 카오르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음, 조금 세게 차야겠네. 그러면 마탑주 앞에 딱 떨어지겠어.’
카오르는 벨린다가 자기 뒤로 이동한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온 신경을 휴베르트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그 순간, 지셀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그들의 호흡을 흐트러뜨렸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뭐?”
미친놈답게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였다.
“영지에서 룬스톤의 자원지를 발견했습니다. 지금 가져온 것보다 훨씬 많은 룬스톤이 있습니다. 정말 꽤 많지요. 후후.”
충격적인 말에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마력을 방출하던 것도 잊고 말았다.
“대충…… 이번에 가져온 것의 열 배 이상은 남아 있죠. 어떻게…… 필요 없으신지? 다음에는 시세대로 드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지셀이 손가락 세 개를 펴고 흔들었다. 휴베르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감히 룬스톤 따위로 날 모욕할 셈인가!’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양이었다.
말문이 막힌 사이 악마의 속삭임은 계속 이어졌다.
“그 뒤에도 계속 안정적으로 룬스톤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계약 조건에 따라서는, 진홍의 마탑이 아닌 오직 이곳 적염의 마탑에만 제공할 수도 있지요. 독점 계약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이 얼마나 매력적인 속삭임인가. 마법사들은 체면 차리는 것도 잊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아주 뱀 같은 놈이로구나!”
“어디서 감히 요사스러운 혓바닥을…….”
하지만 말로는 부정하면서도, 적의는 한풀 꺾인 채였다.
“룬스톤만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면, 적염의 마탑이 북부에서 제일가는 마탑으로 돌아가는 것도 시간문제죠. 아니, 어쩌면 북부 제일이 아니라 왕국에서 제일가는 마탑이 될 수 있을지도?”
룬스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건 이들에게 가장 바라던 일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지셀은 그들의 열망과 열등감까지 자극했다.
이미 기세가 꺾일 대로 꺾인 마법사들은 다시 화를 내기도 곤란해져 버렸다.
지셀이 노린 그대로였다.
“이런, 역시 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럼 저는 다른 마탑으로 가 보겠습니다.”
“에헤이!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누가 안 한대?”
또 일어나려던 지셀이 휴베르트를 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마음에 안 든다고 마력으로 저를 겁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심장이 안 좋아서 버티기가 힘들 거 같습니다.”
‘지랄하네. 심장이 안 좋기는……. 드래곤 하트 정도는 박아 놓은 거 같은 놈이!’
휴베르트는 속으로 지셀을 씹어 대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색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그건 그냥…… 중요한 일을 함께해도 되는 사람인지 실력을 좀 확인해 본 거지. 안 그런가? 자네들도 말 좀 해 보게.”
휴베르트가 괜히 장로들을 물고 늘어졌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마법사들은 탑주가 눈을 부라리자 잽싸게 동의했다.
“그, 그렇지. 자네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한번 본 걸세.”
“우리 마력에도 주눅 들지 않고 기개를 굽히지 않는다니, 과연 그릇이 큰 사람이구먼.”
“젊은 친구가 참 밀고 당기기를 잘하네. 허허허.”
어색하게 웃는 장로들을 슥 둘러본 지셀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자격은 충분합니까?”
휴베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힘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영지전인지나 자세히 말해 봐…….”
어째 적염의 마탑을 통째로 악마의 손아귀에 던져 주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