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또 수작질이군.’
한숨을 삼킨 베르단드는 넝마가 되다 못해 가루가 된 종이 쪼가리를 하나둘 모았다.
로드 칼레파의 반응이 다소 격하기는 했어도, 크게 놀랄 필요 없는 성혼명이었다. 횟수로 따지자면 벌써 세 번째였으니까.
시작은 나타샤 황녀가 황태자의 섭정으로 봉해질 예정이란 소문이 돌면서였다.
―웨더우즈 가문의 가주, 데이지 웨더우즈와 황녀, 나타샤 펜 로타의 성혼명을 내린다!
제국 전역이 들썩거릴 정도로 큰 화제가 됐던 이 성혼명은, 단 이틀 만에 더 큰 불길로 일어났다.
―웨더우즈 가문의 가주, 데이지 웨더우즈와 제나일의 가주, 라파엘로 제나일의 성혼명을 내린다!
그리고 이틀이 더 흐른 오늘 오후.
큰 불길은 폭발로 진화했다.
―웨더우즈 가문의 가주, 데이지 웨더우즈와 버클리그레이튼의 가주,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의 성혼명을 내린다!
이 모든 게 고작 닷새 동안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쯤 되니 세간에는 ‘황제가 드디어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도 라갈에서 도착한 정보에 따르면, 이 파격적인 행보는 오늘내일 하는 아슈네이케 황제의 정신 나간 짓거리로 보기 힘들었다.
『황제는 나타샤 황녀가 황위를 잇길 바라는 눈치입니다. 다만 황녀가 한사코 거부하는 터라 여러 방식으로 회유 또는 협박이 이루어지는 듯한데, 그 중심에 웨더우즈 자작이 있는 모양입니다.』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은 제국의 신하였으므로, 군주인 황제가 내리는 성혼명을 거절할 수 없는 몸이다. 이는 즉 웨더우즈 자작에게 내릴 수 있는 성혼명을 이용해 나타샤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 짓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는 건 나름 먹혀들었다는 의미인가? 우습긴 하군. 연인이나 가족도 아닌 이의 성혼명 문제로 휘둘리다니.’
아니면 생명의 은인인 만큼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건가. 나타샤 황녀라는 인물이 황제처럼 몰염치하지는 않나 보다.
“베르단드.”
나직한 부름에, 베르단드는 양손 가득 종이 가루를 담은 채 답했다.
“예.”
“그만 치우고 가서 스쿨드와 우르드를 불러와.”
베르단드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결국 일을 치르시려는구나!
로궤에서 로드 칼레파의 말은 곧 신명이다. 신명에 단 한 번도 불복종한 적 없는 그였건만, 이번만큼은 소극적으로라도 대거리를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드 칼레파. 데이지 양은 성혼명을 받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던데…… 하루만…… 더 기다리심은……?”
그에 책에서 눈을 뗀 로드 칼레파께서 베르단드와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더?”
“…….”
“닷새에서 얼마나 더?”
로드 칼레파께서는 쥐고 있던 책을 덮은 후 한 무더기로 쌓인 종이 틈으로 내던지셨다. 이어서 비틀린 심기를 방증하듯,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명했다.
“닷새면 이쪽에서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지. 준비해라, 베르단드. 오늘 밤 라갈로 간다.”
* * *
우리는 황제의 직인이 박힌 서신을 꼬옥 끌어안은 채 쓰러진 시종을 내려다봤다.
웨더우즈 저택을 둘러싸고 이쪽 상황을 관망하던 이웃 주민들이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쯧쯧, 내 저럴 줄 알았지. 정신 나간 황제의 시종 놈들이 웨더우즈 자작님을 좀 괴롭혔어?”
“아직 젊은 사람에게 버클리 어쩌고 노친네랑 결혼하니 마니야? 참으로 고약하구먼.”
황실 시종의 주둥이를 얌전하게 만드는 건 굉장히 쉬운 일이다.
뺨 한 대.
“커헉!”
밝고 경쾌한 마찰 한 번으로, 황실 시종은 조용해졌다.
물론 시종의 호위 기사들까지 조용히 만드는 데는 조금 더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 역시 복잡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고?
나는 이제 남대륙의 신이거든.
“……하아.”
복잡미묘한 심정이 담긴 한숨을 길게 내쉰 하녀장이 반, 아니, 그 이상을 포기한 허허로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주인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황제 폐하의 직인을 전달하는 시종은 황제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취급은 후폭풍을 일으킬지도 몰라요.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타샤가 알아서 해결해줄 거야.”
……아마도?
귀인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나의 바람 아닌 바람을 이루어줄 지원병이 기다렸다는 듯 등장했다.
“예상은 했지만, 벌써 일을 치렀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뚫고, 굳게 닫힌 철창에 기댄 거대한 신장의 사내가 보였다.
수년 만에 처음 보는 편안한 복장이었으나, 오랜 시간 전장에서 함께 굴러온 친우를 못 알아볼 리 만무했다.
라파엘로.
—괜찮다. 이 정도는 내 선에서 충분히 책임질 수 있어. 나뒹구는 꼴을 보니 오히려 속이 다 시원하구나.
……라파엘로와 쓰레기 인형?
—안녕, 데이지.
나는 라파엘로의 품에 안긴, 아니, 매달린 넝마 형상의 더미를 뚫어지라 살폈다. 더미에서 풍겨오는 이 기운과 목소리는 분명…….
“나타샤.”
—맞다, 나의 데이지. 한눈에 알아봤구나. 그대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방문했다.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기쁘다는 듯 두 팔(으로 보이는 부위)을 휘휘 젓는 더미의 모습이 참으로 기묘하고 또 친근했다.
“그래, 들어와.”
어떤 용건이기에 이토록 갑작스레 찾아왔나 싶어, 그들을 저택 안으로 이끌었다.
눈치 빠르게 숨어든 하녀장을 대신해 집사 암살자가 차와 다과를 차렸다. 그동안 날 살피던 라파엘로의 눈빛이 그렇게 날카로울 수가 없었다.
라파엘로가 더 쉽게 날 탐색할 수 있도록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보였다.
“마음껏 봐.”
나는 이제 남대륙의 신이니, 인간의 탐구는 너그럽게 허용할 수 있다.
“……하아.”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곧 오묘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몸은 어때, 나타샤?”
—아직 일어설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일상생활은 가능해졌다. 그대 덕분이야.
“황제는? 정말 미친 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면목이 없어. 미안하다, 데이지. 오라버니가 널 귀찮게 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너그럽게 이해해다오.
“그러지, 뭐.”
나는 남대륙의 신이니까.
내가 잠들어 있던 보름 동안, 포기하지 않고 힘겹게 버텨온 나타샤는 정확히 닷새 전에 이성을 되찾았다.
물론 메피스토의 심장 결정석이 자의로 승천한 것은 아니었다. 디안이 남긴 유언에 따라, 그의 영혼을 이용해 메피스토의 영혼을 파괴했을 뿐이다.
방식은 간단하다.
칼레파에서 루가 내게 사용했던 마도구를 이용해, 나타샤와 나의 영혼을 꺼낸다. 그다음 내 영혼에서 디안의 심장 결정석을 분리해 나타샤의 영혼과 공명시킨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디안의 심장 결정석은 나타샤의 영혼 안에 스며든 메피스토의 심장 결정석을 품고 공멸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디안의 심장 결정석이 사라지고, 내 영혼만 덩그러니 남은 순간.
나는 긴 공허함에 휩싸였다.
막연한 감상이라 여기기에는 뼈가 시릴 정도로 선명한 허탈감이었다.
‘……그렇구나. 디안이 말했던 대로, 우리는 그동안 쭈욱 함께였던 거야.’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게 진심으로 개탄스러웠다.
“데이지 양, 당신 덕분에 디안 케트 님의 큰 숙원을 풀 수 있었습니다. 칼레파로서, 이 스쿨드가 로궤를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당신에게는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었으니 언젠가 우리에게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런 말씀 마세요. 따지고 보면 스쿨드는 내 스승님이나 다름없는걸요. 사제 관계에 빚이 어디 있겠어요?”
“……역시, 데이지 양은 사람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군요.”
이후 스쿨드가 귀띔해 준 일화에 따르면,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디안이 메피스토를 제자로 받아들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메피스토는 파문당한 후 스스로 붙인 이름입니다. 로궤에서 그는 한때 모리 케트라 불렸습니다. 디안 케트 님께서 직접 제자로 거두신,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모두 케트라는 성을 이어받았지요…….”
결국 한번 이루어진 건 바뀔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게 바로 운명이라는 것일까. 인과라는 건 내가 차마 들여다보지 못할 정도로 깊고 촘촘한 듯했다.
—급하게 만드느라 작은 더미 안에 욱여넣었더니 움직이기가 영 껄끄러워. 나를 안아 올려다오, 안데르트.
나타샤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라파엘로로 인해, 꾸역꾸역 날 향해 기어 오던 더미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바라는 대로 안아 올리자, 사람의 것처럼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이 전달됐다.
—으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데이지도 좋군. 최상이야.
대체 뭐가 최상이냐고 되묻기 직전.
건너 의자에서 뻗어 나온 라파엘로의 손이 더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무엄하다. 놔라, 라파엘로!
그는 나타샤의 더미를 더러운 벌레 대하듯 응접실 구석으로 휙 내던졌다. 힘겹게 되돌아온 더미가 다시 내 품에 안기려고 하자, 제 옆자리에 딱 붙여놓곤 으름장을 놨다.
“움직이지 마. 여기 앉아서 말해.”
—시기 질투가 심하구나, 라파엘로. 안데르트가 데이지로 바뀌니 전에 없던 음습한 욕망이 끓어오르는 게냐? 헛된 꿈을 품지 말거라. 내가 너와 데이지의 결합을 허락하게 된다면 그건 필시 데이지의 2세를 보기 위해…….
“나타샤. 입 닫아라.”
당연한 말이지만 더미 따위에게는 입이 없다.
“그래서…… 황성에서 이 먼 미드윈트리까지 찾아온 이유는?”
라파엘로와 옥신각신하던 머리통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황태자 이그리트의 교육을 부탁하러 왔다.
“안 해.”
—섣부른 거절은 자제해 줘. 나는 나의 자매, 이나스타냐 밀리오르그 펜 로타 황녀에게 부탁하러 온 거니.
아.
‘……이건 조금 난감한걸.’
원래 알고 있던 건가? 아니면…….
—이나스타샤만 괜찮다면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싶…….
그때였다.
급박한 인기척과 함께, 현관에서 제나일 기사단의 제복을 걸친 남성이 뛰어 들어왔다. 라파엘로의 명으로 현관 앞에 나동그라진 시종을 치우던 기사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황성이 괴인에게 점거당했다는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뭐?
—괴인이라니?
위급한 사태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은 라파엘로가 벗어둔 외투를 챙기며 되물었다.
“상세 정보는?”
라파엘로는 내 눈치를 보며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하는 기사에게 재차 명했다.
“괜찮으니 설명하도록.”
“예! 전달받은 바에 의하면, 괴인은 파란 머리에…… 스스로를 북대륙의 신이라 칭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