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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90화 (190/195)

190화

안녕, 애쉬.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민망하네요.

오늘은 제가 죽는 날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먼 우주로 떠나는 날이지요. 당신이라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봐요.

(짧은 침묵)

그동안 잘 지냈나요?

(어색하게 웃음)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죠? 저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막상 이 영상을 남기려니 입이 잘 떼어지지 않는군요. 멋쩍다는 기분을 굉장히 오랜만에 느끼고 있어요.

(다시 짧은 침묵)

저는 그동안 잘 지냈습니다.

그간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볼 때마다 제게는 무척 과분한 삶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으로 엮는다면 꽤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될 거예요. 제 생에 가장 완벽한 이야기와 가장 완전할 결말을 기다리는 책이요.

어떤가요, 애쉬. 지금의 제게서 어린 시절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나요?

저는 아직도 이따금 당신이 나오는 꿈을 꿉니다.

꿈속의 당신은 항상 영웅이었어요. 위기에 빠진 날 구하기 위해 한 마리의 매처럼 날아와, 내 손을 잡고 먼 동대륙으로 여행을 떠나죠.

우리는 가족이기도 했고 친구이기도 했어요. 그곳의 당신은 언제나 나와 똑같은 생김새였지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지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

문제는 현실에 있었어요.

현실로 돌아온 후, 나는 언제나 긴 사색에 빠집니다. 당신의 존재가 실은 나의 기나긴 망상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사색에요. 물론 언제나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그 판단에 백 퍼센트 확신한 적은 별로 없네요.

(씁쓸한 웃음 후 정면을 향하는 시선)

애쉬,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

(짧은 침묵)

어떤 목소리를 지녔나요? 어떤 머리 색에 어떤 눈을 하고 있나요? 신장은 얼마나 큰가요. 검을 잡는 손은 얼마나 단단하죠? 웃을 때의 입꼬리는 어떻게 휘어지는지도 궁금하네요. ……돌이켜 보면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손을 펼쳐 물건을 내보인다)

내게 남은 당신의 흔적은 함께했던 기억 그리고 낡은 나즈 하나가 전부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수첩은 아주 오래전, 오르스투라에서 칼레파로 향하던 길에 마차가 전복되어 잃어버렸어요.

게다가 당신을 기억하던 화이트는 우리가 황성을 수복한 직후, 마을을 복원하기 위해 떠났죠. 너무 오래되어 흐릿하기 만한 과거의 이야기로군요.

(고심에 잠긴 얼굴로 낡은 나즈를 매만진다)

이제는 이 나즈가,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물건이에요. 인격의 분리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는 흔적이 아닌, 애쉬라는 영혼이 내 육체에 머물렀다는 흔적으로써 말이에요.

당신은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함께한 오랜 동료들…… 애쉬에게는 반군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겠네요. 그들은 죽을 때까지 당신을 나의 이중인격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이 순간, 아니, 100년이 넘는 긴 세월 속에서 당신을 기억하는 건 나뿐이었어요. 그래서 아마 더 자주 당신의 꿈을 꿨던 것 같습니다. 정말 환상 속의 존재로 남아버릴까 두려웠거든요.

(그리운 웃음)

그날의 풍경은 아직도 선명해요.

루가 신의 벽을 깨고 돌아왔던 날.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멱살을 잡아끌며 이런 말을 했었어요. ‘데이지는?’…….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죠. 데이지가 누굴까? 심지어 루 본인도 자신이 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내가 그에게 ‘데이지는 누구인가요?’라고 묻자,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거든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고 루는 당신을 잊었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인 것처럼, 완전히요.

우스운 건 말이죠, 내가 누구인지는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어렴풋하게 남은 기억 속에서 당신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더군요. ‘자신을 첨탑 감옥에서 꺼낸 동업자’ 정도로요. 괘씸하죠?

(미간을 옅게 찡그린 후 짓궂게 웃음)

……이제 나는 당신을 압니다, 애쉬.

당신의 생김새가 어떤지, 어떤 목소리를 가졌고, 어떤 표정으로 웃는지…… 이제는 전부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머나먼 우주로 향하는 길목을 아시나요?

무한대의 별이 박힌 창공 아래, 사막과 다름없는 척박한 땅에서 당신을 봤어요.

정말 마법 같은 순간이었죠. 우리의 영혼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100년이 흘러 처음으로 만난 당신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웃음)

애쉬, 나의 영웅.

나는 우리가 함께한 모든 순간을 기억해요.

퀸 섬에서 맨몸으로 살아난 당신은 ‘베르티 루샨’의 이름을 도용했죠.

머나먼 도시, 미드윈트리에 정착한 당신은 고용인으로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루는…… 최악이었죠.

그러니까, 당신이 아닌 내게 말이에요.

소름이 다 끼쳤어요. 그가 보여주는 표정과 태도에 잠시나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싶었으니까요. ……당신이 온 진심을 다해서 사랑하는 상대인 만큼 이 이상의 첨언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애쉬, 당신이 첫 번째 벽을 넘은 때는 내게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합니다.

거대한 비행선에 올라 감동적인 연극을 관람하던 순간도요. 펜 로타 황실이 지하에 숨겨둔 보물창고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아스트로사 국왕 전하께서 훌륭하게 성장하신 모습을 볼 수 있어 기뻤고, 애쉬가 웨더우즈 가문의 가주가 되어 놀랐어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짧게 박수)

아! 루에게 애쉬라는 본명을 밝혔을 때는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사실 그래요. 루는 애쉬라는 이름을 알 자격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물론 당신을 잊은 주제에 퀸 섬에서 그런…… 위대하면서 괴상망측한 마법을 부린 건 존경할 만해요.

솔직히 말할까요? 루라는 생명체를 100년 넘게 보아온 전 한 가지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루가 정말로 애쉬를 잊고 있었을까?’ 하는 의심 말이지요. 물론, 그가 우리를 속였다는 뜻으로 꺼낸 소리는 아닙니다. 단지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당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불편하다는 소리니까요.

루는 첫 만남에 그토록 다정할 수 없어요.

(불편한 표정에 불편한 침묵)

어째서 그러냐고 묻는다면,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밖에 대답할 길이 없네요. 기실 의문이 들기는 해도 루에게 직접 묻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첫눈에 반했다’ 같은 뻔뻔한 대답을 꺼낼 게 뻔하거든요.

그러니까 애쉬도 조심하세요.

루는 아주 야비한 사람이에요. 여우 같고 또 폭력적이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당신을 걱정하는 노파심에 남기는 충고입니다. 너무 진지하게 들을 필요…… 가 어느 정도는 있다고 봐요.

(천천히 굳어가는 표정)

애쉬,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유산이 발동하면서 끝났습니다.

정말…… 아쉬웠어요. 여러 의미로요.

(한결 편해진 자세로 앉으며 양손을 깍지)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가능한 길게 인세에 남고 싶었습니다. 칼레파로서 더 많은 이들에게 베풀며 살다가, 당신과 재회한 후 떠나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당신과의 재회는 이 영상으로 이루어질 거예요.

그게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이제 와 밝히자면, 당신이 모은 이 유산들은 반신의 경지에 오르기 오래전부터 당신을 찾는 데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물건들입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지요.

저는 오래전, 우리 사이에 오가던 메모의 내용들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어디에 사는 누구이고, 메피스토라는 악독한 마법사를 조심해야 하며, 친구를 구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마법이 작동됐고, 시간을 거슬러 나와 만나게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영혼에 스며들어, 짧게나마 당신의 삶을 함께 겪은 후 기존의 계획을 조금 고치기로 했습니다.

애쉬에게 필요한 건 우리의 재회가 아니었으니까요.

(짧은 고민 후 천천히 젓는 고개)

시간과 운명이 엮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겠네요.

주제가 좋지 않아요. 신의 영역과 관련해서는 말이 길어질수록, 그 안에 엮인 실타래도 점점 복잡하게 엉키기 마련이거든요.

(어색한 웃음)

사실, 이 영상을 남기게 된 계기는…….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앞선 복잡한 이야기들과는 크게 관련 없어요. 단지…… 애쉬,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정한 미소)

나는 건강해요, 애쉬.

나는, 진심으로 즐거웠어요.

당신이 인도한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웠습니다.

내가 이 땅에 남길 최후의 마법이, 별이 되어 오르기 전에 남길 마지막 안배가, 당신을 위한 안배여서 더없이 행복해요. 진심으로요.

(긴 침묵 후 조심스럽게)

만약에 말이에요. 당신이 위대한 경지에 올라 더는 내 심장 결정석이 필요 없게 된다면…… 내 제자의 완전한 죽음을 위해 사용해 주세요. 당신의 소중한 친구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까지도 당신에게 부탁을 남기고 떠나는 나를 용서하세요.

(다시 긴 침묵)

애쉬.

(오묘한 웃음)

나의 영웅,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긴 세월이 지나 우주의 끝에서 다시 만나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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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시동어)

‘죽지 마세요, 애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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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시동 조건)

1. 데이지 웨더우즈

2. 다섯 개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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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시동)

기억 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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