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쏴아아.
퀸 섬의 바닷바람이 불었다.
소금물의 짠맛과 대양의 청량함이 적절히 뒤섞인 이 바람은, 내게 퀸 섬에서의 추억을 되살리는 가장 큰 매개체였다.
루는 깎아지른 절벽 위, 작은 돌무덤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본 채 앉아 있었다.
그의 하늘거리는 의복, 지금보다 조금 더 자라 뒷목을 덮는 머리칼은 14년 전의 루를 연상하게 했다. 루와 달리 나는 웨더우즈에서 지낼 때 걸치는 평범한 여성복 차림이었다.
이건 자각몽이다.
눈을 뜨고 잠들기 직전까지, 하루 종일 루를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결국 꿈에…….
“어?”
뭐지?
나는 분명 해변 위에 서 있었는데. 왜 갑자기 절벽 위로 이동한 거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주위를 살피던 와중에 루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정말 자각몽 맞나?’
꿈이라 여기기에는 이상하리만치 모든 감각이 선명하고, 뚜렷하다. 이런 느낌의 ‘꿈’은 난생처음이었다.
만약 루의 의식이 내 꿈에 찾아온 거라면?
“……혹시, 정말로 루야?”
그가 처음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료함에 젖은 눈빛은 내가 알던 루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설명이 필요한가? 정확히 말하면, 나는 네 안에 잠들어 있는 힘이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루의 힘.
‘설마 시간을 되돌린 그 힘을 말하는 건가?’
그 말은 결국 루라는 거잖아.
“루!”
세상에, 정말로 그가 맞았다니!
나는 활짝 벌린 두 팔로 루를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몸은 꿈쩍도 않고 균형을 유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마주 안아 오는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포옹을 풀었다.
루는 여전히, 면식도 없는 타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어쩐지 무미건조한 느낌인데. 루의 힘이라서인가?’
루와 루의 힘.
그 둘의 차이는 어렴풋이 알겠다. 하지만 눈앞의 ‘힘’이 루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일까? 냉정한 태도의 그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곁에 앉아, 머나먼 수평선을 응시한 채 그간 궁금했던 사안들을 조용히 물었다.
“루의 의식은 깨어 있는 거야?”
“반은 무의식이고 반은 그렇지 않다.”
“그가 온전히 신이 되는 건 막지 못할까?”
“그렇다.”
“지하 실험실에서 나는 정말 죽었던 거고?”
“제아무리 신이라도 죽은 자는 살리지 못해.”
“…….”
“…….”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해, 루. 네가 항상 나를 ‘연약하다’고 표현했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아.”
고개를 돌린 루가 이전보다 조금은 더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과할 것 없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신이 되는 것은, 오래전부터 나의 운명이었으니까.”
그건 눈앞의 루가 루 본인이 아니라, 힘이라는 개념의 존재여서 할 수 있는 말일까.
‘정작 루는 자기 없이 내가 늙는 꼴은 절대 못 본다며 으름장을 놓았는데.’
루의 힘은 신의 힘이다. 신의 힘이란 모든 감정과 인간적 사고를 배제한 순수한 이성 그 자체로 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눈앞의 존재는 루의 이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위로하려고 내 꿈에 찾아온 거야?”
“아니, 나 자신과 나눈 약속 때문이다.”
“루와 네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
“유사시를 대비해 준비해 둔 약속이었지. 지금 이 순간 이후 너와 나는 도합 세 번 연습할 기회를 가지게 될 거다.”
“어떤 연습인데?”
“이별의 연습.”
끔찍한 단어에 목 안쪽이 턱 막혔다. 내 심정은 추호도 모를 염병할 루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지껄였다.
“나는 지금 자유롭다, 애쉬 파거.”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타박하려 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연습?
이별의 연습이라고?
“긴 시간 미뤄 온 나의 길을 갈 뿐이야. 너를 살림으로써 나는 나를 구속하던 가장 큰 족쇄를 푼 셈…….”
“미안하지만, 루. 난 너와 그런 연습 할 마음 없어.”
루는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짜증 날 정도로 무감각한 시선이, 참고 있던 내면의 화를 확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한 번 더 미안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평생! 널 구속할 족쇄로 살아갈 거야. 알겠어?”
“그건 불가능해.”
“시끄러워. 세 번 남았다고 했지? 앞으로 잘 지켜봐. 내 앞에서 그런 낯부끄러운 헛소리를 지껄인 걸 평생의 수치로 여기게 해 줄 테니까!”
벌떡 일어서서 그를 등지고 돌무덤 쪽으로 걸어갔다.
뭐? 이별 연습?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결혼했어야 이혼하고, 사랑 고백으로 교제를 시작했어야 이별을 하지! 기껏해야 서로에게 애정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는데…….
한참 씩씩대던 나는 눈치 없이 조용한 루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나 바쁜 몸이니까 지체하지 말고 빨리 깨우기나 해!”
절벽 위로 쏟아지는 파도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자각몽에서 깨어난 나는 잠든 루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 후, 스쿨드에게 빌린 황금 열쇠(본래 루의 소유였다고 한다)를 이용해 웨더우즈 저택으로 돌아갔다.
해는 이미 중천에 뜬 후였다. 비구름 없이 화창한 하늘에서 쏟아진 햇빛이 통로로 쏟아졌다. 그 끝에 서서 멍하니 날 바라보는 이는 진이었다.
“자작…… 안데르트…… 아니, 파거 경…… 블라디에프 백작님?”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리던 그녀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고개를 숙였다.
긴장하는 기색이 내 피부로까지 느껴져, 일부러 더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걸었다.
“진, 하녀장은 어때? 괜찮아?”
“……예, 멀쩡하십니다.”
다행히 진은 하녀장처럼 골로 가지는 않네.
“그럼 지금 당장 하녀장과 말리콥스를 내 방으로 불러 줘. 그리고 진, 너도 내 방으로 찾아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할 말이 있어.”
“일정, 말씀이십니까?”
날 올려다보는 진의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응. 오늘부터 나는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유명인이 되어야 하거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목각 인형처럼 뻣뻣한 움직임으로 허리를 숙인 진이 삐걱거리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해가 안 되네. 알맹이는 그대로고 껍질만 달라진 건데 왜 저렇게들 낯설어하는 거지?’
쯧. 불편하게.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진이 커다란 목소리로 “저, 저기!”라 외쳤다. 그녀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소리쳤다.
“하녀장님과 말리콥스님을 모시고 오면……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도망쳤다.
그다음 날.
펜 로타 제국은 가면을 쓴 귀환 영웅의 존재로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 * *
『가면을 쓴 귀환 영웅, 그는 누구인가?』
이 신문 헤드라인.
나쁘지 않네.
<……웨더우즈 저택에 손님으로 기거 중인 이 남성은 자신을 ‘귀환 영웅’이라 칭했다. 또한 초대받은 이들 모두가 은연중 기대했듯, ‘그 사람’과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 기자들을 상대로 보인 능숙한 언변은 물론 곤란한 질문에는 가벼운 유머로 답하며 응접실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연유를 묻자, 남성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더니 ‘나의 생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친우가 있다’고 답변했다…….>
‘기자들은 참 얄궂다니까. 아닌 척 독자들이 내 정체를 ‘그 사람’으로 추측하기를 부추기고.’
신문을 테이블로 던진 나는 나머지 일간 신문의 헤드라인도 확인했다. 다섯 개에 다다르는 신문사 1면에 똑같은 가면과 의복을 걸친 남성이 드러나 있었다.
바로 나다.
“광대는 숨길 걸 그랬나? 너무 많이 내보인 것 같은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대답을 기다렸는데 집무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하여간.
“드셰로는 어때? 괜찮아 보여?”
내 질문에, 드셰로는 안경까지 써 가며 흑백 사진 속 내 얼굴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흠. 가면 디자인이 아주 훌륭합니다. 이 광대까지 가렸으면 당신의 정체를 추측하기 더욱 어려웠을 거예요. 오히려 이 정도 드러냄으로써 적절한 긴장감을…….”
“미친 거냐?”
날카로운 반문이 드셰로의 평가를 뚝 끊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내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작업에 열중하던 라파엘로가 자리에 일어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의 호전적인 눈빛이었다.
“그 꼴이 되어 순식간에 미드윈트리로 사라져 놓고선, 다시 그 꼴로 보란 듯이 돌아와? 심지어.”
라파엘로는 테이블 위에 내던져진 신문을 내 앞에 보란 듯이 흔들었다.
“이런 난리를 쳐 놓고?”
“네가 무슨 일 생기면 찾아오라며?”
“그리고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었지.”
“웃기시네, 황성에서 대뜸 나타나 지하 실험실까지 동행한 놈이. 그 경고는 항시 적용이 아니라 꼴릴 때 적용되는 거냐?”
“……하.”
깊게 인내하듯, 두 눈을 감은 채 미간을 문지른 라파엘로가 다소 차분해진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몸은?”
“나빠.”
“어떻게?”
“상당히.”
“수작 부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라.”
“……음, 그래.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어. 이 정도면 됐나?”
라파엘로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별로 보고 싶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 나이 먹고 친구 가슴에 대못 박는 짓만 반복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껏 그에게 한 짓거리를 떠올려 보자. 거짓말하기, 이용해 먹기, 거부하기……. 최소한 라파엘로를 상대로는, 이 이상 뻔뻔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속셈이 뭐냐. 지하르크 공작이 가진 디안 케트의 유산?”
“더해서 나타샤까지. 아, 참고로 여기는 내가 순방할 첫 번째 가문이야. 내일은 로즈벨, 그다음은 버클리그레이튼으로 갈까 해.”
“가서?”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씨를 응시하며 답했다.
“검성과 검을 좀 겨뤄 보려고. 이왕이면 목숨을 담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