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칼레파의 후원.
빌어먹게 갑작스럽기는 해도 언뜻 들으면 아주 든든한 배후가 생긴 셈이다. 그게 루의 호의라면 다분히 기뻐할 의향이 있었다.
베르단드가 더 적절한 표현만 골랐었다면 말이다.
“생전 유언? 죽지를 않았는데 재수 없게 뭔 유언이에요?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요? 이렇게 잠들어 있잖아요?”
보란 듯이 루를 가리키자, 스쿨드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데이지 양의 말도 옳습니다. 로드 칼레파께서는 자의적으로 잠드셨지요. 신의 힘을 억제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신의 힘.
아! 나는 그제야, 루가 이곳 칼레파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가 나를 위해 사용한 힘이 균형을 깨뜨릴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사용하는 마법은 온전한 신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손을 대는 순간, 신의 벽을 완전히 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는 돌아올 수 없도록.”
더는 돌아올 수 없도록, 이라는 표현이 내 귀에는 몹시 거슬렸다.
“하지만 루는 하늘의 시간을 돌려서, 과거에 떨어졌던 유성의 비를 보여 줬었어요.”
“그건 시간을 돌린 게 아니라, 기억을 전시한 것에 가깝습니다. 하늘 위에 로드 칼레파의 기억을 덧씌운 것이지요. 물론 그마저도 로드 칼레파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수준의 광대성이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루는 결국 신이 되는 건가요?”
“예, 천천히.”
나는 멍하니 루를 내려다봤다.
눈을 감은 모습이 어색하다. 그는 항상 잠든 나를 돌봐 주면 돌봐 줬지, 이런 식으로 내 앞에서 잠든 모습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루가 나를 떠나서 신이 된다고?
‘영원히?’
그게 뭐야.
이건 소설만도 못한 허무하고 허무한 결말이잖아.
“슬픈가?”
우르드가 긴 은발을 뒤로 넘기며 물었다.
“로궤에서 반신이란 지고의 경지로 여겨지지. 육체와 영혼, 힘 그리고 자아가 완벽한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신이 되어 우주로 떠난다. 경사라면 모를까 슬피 여길 일은 아니야. 오히려 로드 칼레파께서는 그 경지를 이루시고도 오랫동안 인세에 머무르셨다. 그대 때문에.”
위로한답시고 건넨 말 같은데, 죄책감만 가중되는 기분이다. 베르단드가 아주 천천히 뒷말을 덧붙였다.
“맞아. 게다가 로드 칼레파는 데이지 양에게서 가능성을 보신 것 같아. 애정 하나로 우리에게 타인을 맡기실 분이 아니거든. 아주 냉혹한 분이시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죽도록 노력해 봐. 혹시 몰라? 신이 되면 하늘 위에서 다시 만나게…….”
유쾌한 위안이었으나 내 머릿속에는 베르단드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주위는 점점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져 갔고, 어두워진 세상에는 오로지 나와, 눈을 감은 루만이 우두커니 남았다.
루는 이제 신이 되어 떠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뭘 하기는. 나타샤의 생사도 확인했겠다, 그녀가 삼킨 메피스토의 심장을 파괴할 방법을 찾아야겠지.’
루가 사라진 와중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어지지만…….
정신 트랩 내에서 나는 마귀가 환각임을 인지한 와중에, 나타샤의 존재만은 완벽한 환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나타샤가 메피스토의 심장과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완전히 동화됐다면 트랩도 안정적이었을 것이고, 그 마귀도 진짜였다고 믿었을 테니까.
‘만약 내가 정신 트랩에 걸리지 않았다면.’
걸렸더라도, 눈치껏 나타샤가 진짜였음을 알아챘다면…… 루가 신의 힘을 사용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할까?
4년 전의 나였어도 이런 한심한 상황에 내몰렸을까? 그때는 언제 어디서든 항시 방심해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실수도 실패도 드물었지.
어쩌다가 이토록 나약해진 건지 모르겠다. 평화에 찌들어서? 루에게 의지하느라 나 자신은 머저리가 되어 버린 건가?
‘……아니, 아니야. 그만두자. 이런 자책은 의미 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야.’
나 자신의 약함은 지금껏 수도 없이 겪어 왔다. 이 정도 경험했으면 이젠 마냥 땅 파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루도 내가 메피스토의 심장을 파괴하길 원할 테니까.
“스쿨드 님, 내가 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언제까지죠?”
“아마 로드 칼레파께서 인세에 머무시는 동안일 겁니다. 한 달이 될지 반년이 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 이거였다. 루가 신이 되면서까지 내게 선물한 건강하고 강력한 육체인데, 이런 육체조차 얼마 가지 못한다니.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돼.’
루를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역시 당장 떠오르는 최선책은 디안 케트의 유산을 전부 모으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안데르트 파거의 모습이었다. 이런 꼴이면 검성은 물론 나타샤에게 접근하는 것도 조금 더 편해질 터였다.
머릿속으로 대강의 그림을 짜낸 후, 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스쿨드 님, 혹시 상대의 특정 과거를 훑는 마법도 존재…….”
그러나.
내가 뗀 첫 운은 시야에 불쑥 끼어든 장신의 시꺼먼 남정네로 인해 보기 좋게 가로막혔다.
정수리까지 둘러쓴 후드 아래, 심히 짜증스러운 연두색 눈동자가 희번덕이었다. 내가 알기로 저 싸가지 없는 표정을 지을 만한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안데르트.
그러니까, 가짜 안데르트가 아닌 진짜 안데르트가 내 앞에 서 있던 것이다.
“……너 뭐야?”
“안데르트 파거.”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 모습을 샅샅이 살피곤 혀를 찼다.
“이렇게 보니까 더럽게 안 똑같네. 너는 눈깔이 엉덩이에 달렸냐?”
“말하는 꼬라지 봐. 누나라고 부르라 했을 텐데?”
“그 상판대기에 대고 어떻게 누나라는 말이 나와?”
돌이켜 보니, 그 지하실에서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안데르트의 얼굴이었나?
메피스토의 심장이 보관되어 있던 지하에 이 어리숙한 녀석이 숨어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너 이 자식.”
나는 겁대가리 없는 안데르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기억을 되찾은 주제에 재깍 찾아와서 보고하지는 못할망정! 뭘 믿고 황성에 혼자 기어들어 가? 목숨이 안 아까워?”
그런 내 손을 탁, 밀쳐 낸 안데르트가 아니꼬운 얼굴로 이죽거렸다.
“아, 그 귀중한 목숨 내다 버리려다 도움 받은 게 누구더라?”
“말대꾸하지 마라.”
“싫은데.”
“하지 말라고.”
“싫다고.”
“워워, 진정해. 진정.”
베르단드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안데르트로부터 멀찍이 밀어냈다.
“흠. 칼레파 내에서 피 섞인 가족이라는 걸 오랜만에 보니 느낌이 새로워. 그런데 원래 형제는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존재였었나? 갑자기 헷갈리네.”
멍하니 혼잣말한 베르단드는 내게 어깨동무하며 속삭였다.
“하여간 너무 나무라지 말라고 데이지 양. 음. 이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에 대고 데이지 양이라 부르려니 기분이 이상하군. 데이지 양의 동생은 단순한 호기로 황성을 탐색한 게 아니야. 그는 그대를 괴에엥장히 걱정했어. 우르드에게 검을 배우기 위해 칼레파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지. 나름 로궤의 안배를 받고 있었으니 안심해.”
안데르트가 베르단드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닥쳐.”
“……검?”
그 둘이 검을 맞댔던 적이 있기는 했다. 칼레파에 처음 찾아왔을 때.
“예의는 밥 말아 먹었지만 재능은 꽤 출중해. 그래서 우르드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야.”
“주절주절하지 말고 입 좀 닥쳐라, 베르단드.”
“아니면 성격이 비슷해서 통하는 게 많은 건가?”
놀랍게도 안데르트는 기억을 되찾은 후, 우르드를 포함한 세 칼레파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버클리그레이튼 가문과 황성 사이에 밀접하게 연결된 몇 가지 정보를 얻어 냈으며, 스스로 머리를 굴려 황성 내 지하 생체 실험실의 위치를 발견했다.
말도 안 돼. 이 머저리가 그 정도로 똑똑할 리는 없는데.
“……세 분 모두, 저를 도와주신다고 하셨죠?”
세 쌍의 눈이 나를 향한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마지막 디안 케트의 유산을 모으려는데, 제게 한 가지 마도구가 필요해요.”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던 베르단드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행동 빠릿빠릿하고 좋은데? 마음에 들어, 우리 데이지 양. 마도구라면 우리 스쿨드가 전문이지. 일단 따뜻한 곳으로 가서 차 한잔 들면서 이야기 나누자고.”
안데르트를 포함한 5인의 회의는 3시간이 지나고서야 끝을 보였다.
스쿨드는 내게 웨더우즈로 돌아가겠느냐고 물었지만,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루가 잠들어 있는 제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루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의 뺨을 만지고, 손가락을 건드리다가 옆에 배치된 낡은 목조 의자에 몸을 구겨 넣고 잠을 청했다.
신이 되어 하늘로 떠나는 것.
다른 대륙에서는 등선이라 표현한다고 했던가?
‘육체만 잠들어 있고 의식은 또렷한 거라면……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데.’
못다 한 이야기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으니까. 꿈에서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그날 새벽. 나는 꿈속에서 루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