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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35화 (135/195)

135화

황제는 황성 아주 깊숙한 곳에 기거했다.

그가 생활하는 공간은 침묵이 법도인 듯 고요했으며 지독하게 휘황찬란해 눈이 부셨다.

끼익.

문이 열리기 무섭게 나를 맞이한 건 머리 위를 가득 채운 장엄한 천장화였다. 마치 그 천장화를 위해 침실이 존재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부의 배치는 몹시도 단출했다.

그럼에도 ‘과연’이란 탄성이 삼켜지는 이유는, 침실의 가구들이 품고 있는 세월의 값어치 때문일 테다.

“가까이 오라.”

노쇠한 고목 같은 음성이었다.

곧 정면에서 시종장이 걸어 나왔다. 그는 황실 예법에 따라,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던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고개를 들어라, 웨더우즈 자작.”

14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한 황제는 침상에 누운 병자의 모습이었다.

그림에서 보았던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는 온데간데없었고, 독이라도 오른 것처럼 검게 죽은 얼굴에는 생기랄 게 보이지 않았다.

이자가 마도 연합 몰래 메피스토의 심장을 빼돌려, 소생 실험을 주도한 남자.

침묵파를 등에 업고 황위에 오른 이.

황제 아슈네이케.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황제는 실로 나약했다.

‘소생 실험의 유의미한 성과를 기다리며 삶을 연명한다, 이건가.’

의외였다.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에서는 그런 욕망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까닭이다.

황제는 힘없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자작.”

“예.”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젊군.”

“예.”

“구국의 영웅 안데르트 파거의 누이라 들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누나입니다.”

“믿기지 않는구나. 올해 자작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나는 루를 만나기 전 나이에 지난 14년의 시간을 더해 답했다.

“서른둘입니다.”

“역시 믿기지 않아. 그래도 자작의 눈을 보니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적어도 눈에서만큼은 연륜이 묻어 나오는구나.”

처음 듣는 말이라 조금 놀랐다.

“게다가 눈이 참 맑아.”

나름 숙적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첫 만남부터 인간적인 칭찬만 듣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폐하도 맑으십니다.”

“뭐라? 하…… 하하하! 콜록, 콜록.”

침대 뒤편에 선 시종장이 나를 쏘아봤다. 쓸데없는 소리로 황제를 괴롭히지 말라는 시선 같은데,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명의가 조언하더군. 만병의 근원은 걱정과 근심이라고.”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대단한 용건으로 그대를 부른 것은 아니다. 웨더우즈는 제국의 역사와 함께한 몇 없는 유서 깊은 가문이지. 그런 가문의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고 하니, 군주 된 도리로서 인사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영광입니다.”

“보다시피 짐의 몸이 성치 않아서 중한 만찬에도 모습을 드러내기가 버겁다. 자작이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예.”

“자작을 만난 지 몇 분 되지 않았으나, 어째 군인과 대화하는 기분이 드는구나.”

“자주 듣는 소리입니다.”

시종장이 한 번 더 나를 쏘아봤다. 어쩌라는 거야? 대꾸도 하지 말라고?

“사냥 대회는 잘 즐기고 있는가?”

“예.”

“제나일 공작이 자작을 잘 도와주는 듯하더군.”

허어. 라파엘로와 나의 관계가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다니. 치정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무섭다.

“그래서 자작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지?”

역시 치정은 무서워. 그 황제조차 저런 질문을 하게 만들다니!

“당연히 사냥 대회 1등을 노리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보기와 달리 사람이 꽤 능청스러워…… 뒤늦은 말이지만, 동생의 죽음은 유감이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안데르트 파거의 희생으로 대륙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 역사적 사실은 대대손손 이어져 후대에까지 전해질 것이다. 짐을 포함한 모든 이가 자작의 동생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으니.”

나의 과거를 남 이야기하듯 대화하는 게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닌데. 오늘만큼은 어쩐지 심장 위에 커다란 바위라도 얹힌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안데르트 파거는 사후에 황제 폐하로부터 하사받은 작위가 있다. 아는가?”

“어렴풋이 전해 들었습니다.”

“일대 작위인 터라 자작이 물려받지 못하는 게 아쉽군.”

“괜찮습니다.”

하녀장이 말하기를, 사후 주어지는 작위는 일대 작위밖에 없다고 했다. 죽은 자의 신분을 옳지 못한 방식으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의도였다.

‘역시 황제는 안데르트에 관심이 많아.’

데이지 웨더우즈로 살며 새롭게 깨달은 바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람들은 의외로 죽은 자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는 데는 ‘안데르트 파거의 누이’라는 영향도 적잖았지만, 그보다는 ‘라파엘로가 선택한 여자’라는 타이틀의 영향이 더 컸다.

또한 그런 반응은 내 나름의 호재였다.

“이런 식으로 계속 화제를 모으면 황제 폐하께서 주인님을 부르실 수도 있겠네요.”

“고작 이런 일로?”

“그럼요. 황제 폐하도 사람인걸요. 직접 자작님을 찾아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보다는 훨씬 체통을 지키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절대 놓치지 마세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황제의 총애도 움직이게 만들 테니까요.”

소문이 커지면 황제가 나를 찾는다.

구태여 라파엘로와 나의 관계를 정정하지 않은 것도 그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정작 마주한 황제는 내 치정에 큰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우리의 대화는 안데르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상대의 지위를 고려하면 그리 이상한 일이라 볼 수 없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를 부른 건 과연 황제일까, 나타샤일까?’

만약, 이 대화가 모두 나타샤의 귀에 들어가고 있다면.

‘더 확실한 미끼를 물도록 유도하는 게 좋겠지.’

나는 짧은 헛기침을 뱉은 후,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데…….”

“말해라.”

“단순한 예시에 불과합니다만. 만약 제 동생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 아이가 생전 누리지 못했던 영웅으로서의 대우가 보장되는지요?”

황제는 입을 다문 채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부담스러운 척,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피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안데르트 파거가 살아 돌아온다면 짐이 직접 연회를 열 것이다. 그보다 기쁜 일이 또 없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말씀만으로도 마음이 놓입니다.”

“이제 곧 사냥이 시작하겠군. 짧지만 즐거운 대화였다, 자작. 이만 물러가게.”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종장이 나를 침실에서 쫓아냈다.

덕분에 하인 한 명을 뒤꽁무니에 단 채로 너른 본성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꼴이 되었다.

나는 하인의 안내를 따라서 걸어왔던 통로를 되돌아갔다.

끝없이 길게 이어진 붉은 카펫.

금실 자수가 박힌 실크 커튼.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한 길목.

숨소리 한번 내지 않는 시종.

천천히 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커다란 구름 한 덩이가 해를 가린 채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내 고향, 퀸 섬을 그대로 가져다 박은 듯한 모양이었다.

퀸 섬.

내 고향.

문득 내가 선 이 공간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 작은 섬에 살았던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지.’

황제를 알현하는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 참 이상한 문장이란 말이야.

나는 내가 없던 4년의 시간 동안, 주위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정작 돌아보면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나였다.

이름은 물론 얼굴도, 가진 것도 전부 바뀌었다. 주변이 변했다고 해서 씁쓸함을 느낄 처지가 못 된다는 뜻이다.

‘그럼 이 기분의 원인은 뭘까.’

나는 해야 할 일이 많다.

목표 의식이 뚜렷하며, 어느덧 얻은 것도 많고 잃을 것도 많은 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아주 가끔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지, 내가 걷는 이 길이 맞는지, 내가 고른 그 선택지가 옳았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전쟁터를 누비던 그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두려운 건가?’

아니다. 당장 앞에 놓인 일들을 해결하느라, 그런 감정은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럼 지친 건가.’

지쳤다고 하기에는 아직 제대로 뭔가 해 보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나는 왜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 거지.’

분명 두 개의 벽을 넘었는데. ‘나’를 완벽하게 알기 위해서는 두 개의 벽을 넘는 것으로도 부족한 걸까?

의문과 함께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빛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내가 걷는 길 저 끝에, 가을 태양 빛에 둘러싸인 남자가 서 있었다.

환한 빛 때문에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이 그의 얼굴을 인식하고, 내 코가 그의 향을 인지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루!”

내가 어떤 이름과 얼굴로 어느 땅에 머물든, 항상 그 자리에 머무는 존재.

나의 마법사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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