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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34화 (134/195)

134화

라파엘로가 오른 백마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곧, 우거진 수풀을 샅샅이 살피던 적안이 나를 돌아봤다.

“안데르트가 살아 있다면 어찌할 거냐 물으신 겁니까?”

사냥감을 노리는 듯 사나운 눈빛이 마치 ‘감히?’라 외치는 듯했다.

어쩐지 하면 안 될 질문을 던진 기분이 들었으나, 입 밖으로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외려 내가 누이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군요. 당신의 핏줄이지 않습니까.”

“나야 뭐…… 당장 찾아 헤매겠지. 실제로 오랫동안 헤맸었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라파엘로는, 우리의 위치가 나란해지고 나서야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말을 몰았다.

“복수심을 느낍니까?”

그 질문에 나는 퀸 섬에 소박히 쌓아 올린 돌무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돌무덤이야말로, 내가 메피스토에게 느낀 증오와 복수를 형상화한 것이지 않을까.

“메피스토에게? 글쎄. 이미 죽어 버린 상대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 봤자 뭐 하겠어?”

“죽지 않았다면 느꼈으리라는 뜻이로군요.”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럴 거야.”

내가 대답했으니 이제 네 차례다. 라파엘로는 내 눈짓에 곧장 반응을 보였다.

“누이의 질문에 제가 드릴 답은 하나뿐입니다.”

짧은 간극과 함께 그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안데르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겠지요.”

무의미.

이미 그러한 가정이 발생한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내가 그걸 모르겠어? 단지 살아 있을 거라는 가정하에 어쩌겠냐고 묻는 거잖아.”

“이제 와 그런 질문이 의미 있습니까?”

라파엘로의 반문에는 조금의 격양도 없었다. 오히려 더 낮고 끈적이게 가라앉았을 뿐.

“그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나를 만나러 왔을 겁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연락은 닿았겠지요. 생사를 알리든, 도움을 청하든. 어떠한 용건을 통해서라도.”

날카롭게 뻗댄 라파엘로의 목소리는 장인의 검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내 심장을 찔렀다.

라파엘로의 말이 옳다.

하지만 나는 그리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나타날 수 없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면?”

“살아 있으나 모종의 이유로 나타나지 않는다. 누이께서는 아직도 그런 환상에 빠져 계십니까?”

내 답을 기다릴 동안 일자로 닫힌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유…… 그래,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저는 납득 못 합니다.”

“…….”

“살아 있다면 가장 먼저 나를 찾아왔어야 했어.”

그가 뱉은 모든 경직된 언어들 중, 유일하게 한숨처럼 흩어지는 문장이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문득 내려다본 내 두 손은 유일한 생명 줄이라도 된 듯, 고삐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라파엘로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 기분의 이름을 안다. 이건 죄책감이다.

나 자신의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 안데르트 파거로서 라파엘로 제나일에게 느낄 수밖에 없는 가장 마땅한 감정.

내가 건넨 질문은 한없이 가벼웠으나, 오로지 내게만 그러했다. 뒤늦게 깨달은 교만함이 숨통을 무겁게 조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지요. 그러니 안데르트는 죽었습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누이뿐이로군요.”

가라앉았다 싶었던 그의 어투가 다시 사납게 변했다.

“한데 당신은 나타나기 무섭게 멋대로 굴고…… 아니,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군. 지금처럼 계속 멋대로 구십시오. 내가 살아 있는 한, 어떻게 해서든 당신만은 지킬 테니까.”

라파엘로가 탄 말의 머리가 정면을 향해 조금 더 빨리 나아갔다. 나는 그런 그의 등을 천천히 뒤따랐고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갖가지 감정을 정리해 나갔다.

죄책감. 이건 내가 마땅히 감수해야 할 감정이다. 구태여 떨쳐 내려 할 필요 없었다.

불안감. ‘안데르트가 살아 있다’는 가정조차 단호하게 부정하는 그이다. 정체를 밝히기에 겁이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숨길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 또한 감수해야 할 테다.

그 외 차고 넘치는 답답함, 서운함…… 또한 그 속에서 차마 정리되지 못한 한 가지의 이름.

의구심.

재회 이후, 처음으로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라파엘로는 진정 나를 안데르트의 누이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파엘로는 내게 안데르트에 대해 물은 적이 없다.

나의 죽음을 깨끗이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 그랬다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의 화를 표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라파엘로를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의 말은 반이 진심이고 나머지 반은 화풀이였다. 내가 아닌, 안데르트를 향한 배신감과 서운함에 대한 화풀이.

한없이 이성적인 그가 어째서 내게 그 화풀이를 하는가.

내가 안데르트의 누이라서?

아니면, 라파엘로는 내가…….

‘안데르트라는 걸 알아챈 걸지도 몰라.’

아.

아아!

‘……제길.’

너무 그럴싸하잖아?

‘그가 내 정체를 알았다는 가정을 세우면, 방금 대화가 너무나도 이해가 가…….’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설마, 나를 아는 라파엘로 앞에서 지금껏 그 난리를 피웠던 거야?’

머리가 새하얘지고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이건 검성에게 내 정체를 들켰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조마조마함이었다. 아마 상대가 나타샤였더라도 이토록 떨리지는 않았을 테다.

도무지 대역 죄인이 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죄인이고…… 내가 죄인인 걸 나도 알고 라파엘로도 알아서 결국 나는 계속 죄인처럼 행동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휘익.

돌연 군더더기 없는 파공음이 들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 목을 꿰뚫린 사냥감이 사지를 퍼덕이며 땅에 추락하고 있었다.

본래 보좌인 내가 직접 사냥감을 챙겨야 했으나, 라파엘로는 내 존재 따위는 잊은 양 안장에서 내려와 직접 사냥감을 끌고 왔다.

나는 머쓱하고 수치스러우면서 몹시 오묘해진 기분으로 그에게 다가가 물통을 건넸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보란 듯이 내 선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것을 열어 목을 적셨다.

대충격이었다.

“왜…….”

울대뼈가 크게 울렁일 정도로 거칠게 물을 삼킨 라파엘로가 입가를 닦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시큰해지는 코끝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주는 물은 안 마셔? 내가 싫어? 이제는 내가 주는 물조차 입에 대기 불쾌해진 거야?”

라파엘로는 어울리지 않게 미간을 잔뜩 구기다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날 질책했다.

“물 대신 술로 채운 걸 모를 줄 압니까?”

…….

……음, 그랬었지.

젠장. 까맣게 잊고 있었어. 안 그래도 쓰레기인데 더한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은근슬쩍 사냥감이 도망간 방향의 정반대로 이동하시더군요. 저의 사냥을 진심으로 방해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아니야, 그건…… 그건 그냥 내가 멍해서 실수한 거야.”

“믿을 소릴 하십시오.”

이후 라파엘로는 미친 듯이 사냥에 열을 올렸다.

괜한 죄책감에 방해 공작도 제대로 못 펼쳤다. 사실상 나는 구경꾼이나 다름없었다. 이름하여 죄인 구경꾼.

1시간 후 중간 점수가 보고되었다. 하인이 직접 우리를 찾아와 경과를 알린 것이다.

점수에 크고 작은 변동은 있었으나, 적어도 상위권 순위는 그대로였다.

“새로운 보좌를 지목하시겠습니까?”

하인의 질문에, 라파엘로는 내게 눈을 고정한 채 답했다.

“아니. 이대로 가지.”

나는 그 눈빛을 못 본 척하며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대단하네. 검성과의 점수 차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라파엘로는 아까와 달리 눈에 띄게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쪽에서 사냥에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임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귀족 가문 여식들만 보좌로 지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추측건대 귀부인들과의 약속 때문일 겁니다. 작년에는 내로라하는 기사들을 보좌로 돌려 쓰며 사냥에 집중하셨습니다. 올해는 그럴 마음이 없으신 듯하군요.”

뭐야, 검성. 진짜 카사노바 같은 거였어? 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 괜히 열받네.

30분 후, 첫째 날 사냥이 막을 내렸다.

나는 본부로 돌아가기 무섭게 사냥 점수를 확인했다.

우리 조는 30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4등이었다. 심지어 점수는 더 벌어졌어.

열심히 노력하겠다더니.

“턱도 없구나, 리웨인.”

내 옆에 서 있던 리웨인의 뺨이 아주아주 살짝 붉어졌다.

“변명하자면 게른 로즈벨의 방해로 사냥감들이 부리나케 도망을 가…….”

“그래, 그래. 내일도 있으니까 힘내 봐.”

“……내일은 제가 아니라 자작님께서 힘내셔야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내일은 내가 사냥꾼이니까.

“오늘 사냥 수고하셨습니다, 자작님.”

“응, 너도. 내일 만나.”

등을 돌리자, 라파엘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레에 누이가 요구하신 물건을 넘기겠습니다. 잊지 말고 저를 찾아오십시오.”

내가 요구했던 물건이라면…….

‘디안 케트의 새장.’

예기치 않은 용건에 코끝이 찡해졌다.

어떤 상황에서든 한번 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모습에서, 다시 한번 죄책감이 끓어올랐다.

작게 헛기침한 나는 멀어지는 그를 불러 세웠다.

“라파엘로.”

멈춰 선 그가 나를 돌아봤다.

할까 말까. 할까 말까. 미치도록 고민한 끝에 그에게로 다가가 용기 있게 내질렀다.

“나는 여자야.”

라파엘로가 어쩌라는 눈으로 답했다.

“그건 보면 압니다.”

“그래, 보면 알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보는 내가, 나의 전부라는 뜻이야.”

라파엘로는 긴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운 그가 조금은 다정해진 태도로 내게 제안했다.

“그럼 저는 사내이니, 사냥제 연회에서는 저와 첫 춤을 추시겠습니까?”

연회의 첫 춤을?

‘리웨인과 추려고 했는데.’

나름 꾸준히 주목받는 상황이니 그놈의 몸값 올리는 데도 도움 될 테고. 역설적이지만 사교계에서 안면을 튼 이들 중 가장 편하기도 하니까.

‘……됐다.’

문득, 뭘 이렇게 복잡하게 재고 있는 걸까 싶었다.

내가 머리를 굴리면 얼마나 굴린다고. 그까짓 춤, 라파엘로와 못 출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자.”

라파엘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그렇게, 첫날의 사냥 일정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둘째 날 사냥이 시작되기 직전.

“웨더우즈 자작님. 자작님을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나는 황제에게 불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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