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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29화 (129/195)

129화

특히 라그휘르텐 백작.

고개를 돌리는 족족 눈이 마주치는데, 입술이 굉장히 근질근질한 표정이다.

‘내게 안데르트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고 싶은 거겠지.’

제나일 성에서는 심문과 결사대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못 했으니까.

이는 로즈벨 백작을 포함한 다른 결사대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다들 은근히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을 봐선, 만찬회가 끝난 후 퍽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검성.’

우리가 자리한 맞은편 왼쪽 테이블.

그 테이블에 자리한 자들 중에서, 유독 확고한 존재감을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어두운 적발은 달빛 아래에 핀 장미꽃처럼 은은하고, 선명한 녹안은 차분하다 못해 침전된 듯 고요한 남자.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라파엘로의 주변이 그러하듯 검성의 주변 역시 사람으로 북적거린다.

다만 라파엘로에게 다가서는 이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하다면 저쪽은 대체로 진중한 낯의 귀족 신사와 귀부인이 주류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거나, 그 언저리로 보이는 이들은 목만 살짝 뺀 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국 최대 만찬회는 이런 분위기구나.’

다른 건 몰라도 사람들의 감각이 바짝 서 있다는 건 확실했다.

여유롭게 목을 축이는 자도, 긴장감에 허리를 곧게 편 자도, 옹기종기 모여 인사를 나누는 자도, 전부 아닌 척 주위를 살피는 게 느껴졌으니까.

‘나타샤가 힘들어했던 이유를 알겠네.’

연회보다 군대가 마음 편하다더니.

원하는 일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이런 불편한 공기는 견디기 힘들었을 터였다.

“조시는 겁니까?”

라파엘로의 물음에 나는 대충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지루하다는 얼굴로 앉아 있으면 눈에 띌 겁니다. 그런 걸 바라지는 않으실 텐데요.”

“……그래?”

나는 축 처져 있던 어깨를 조금 더 발랄하게 끌어 올리며, 말똥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런 내 얼굴을 스윽 살핀 라파엘로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열네 번째 신사와 인사를 나누던 그는 내 존재를 잊지 않고 틈틈이 말을 건넸다.

책임감이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세심하게 챙겨 줄 줄은 몰랐다.

‘뭐, 옆자리를 차지했다는 것만으로도 필요 이상의 관심을 받고 있으니까. 나한테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나마 다행인 건, 라파엘로가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나를 소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놓고 내 옆얼굴을 쳐다보며 소개를 요구하는 이가 다가올 때에도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하기 일쑤였다.

덕분에 나는 통성명한 상대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걸 다행이라고 보는 게 맞나.’

따지고 보면 안면을 틀 기회를 원천 차단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웨더우즈 가문을 물려받은 이상 외딴섬으로만 지낼 수는 없다. 만찬회가 끝나면 나 혼자서라도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만찬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이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앉은 후.

종이 울렸다.

딸랑.

소리 없이 나타난 시종들이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이어서 백발의 노인이 단상 위로 나타났다.

“시종장 데니얼 밀포드 백작입니다.”

라파엘로가 속삭였다.

하녀장에게 이미 들어서 아는 이름이었지만, 일단은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사냥 대회 규정을 설명하겠습니다.”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규정부터 설명하다니. 과연 시종장인가?

“대회는 2인 1조로 진행됩니다. 사냥은 하루에 한 번씩, 총 2회 진행되며 기본 파트너는 바뀌지 않습니다.”

황실 사냥 대회는 제국 사교계에서도 가장 큰 의전으로 취급된다.

나는 지난밤 하녀장이 말해 준 정보를 떠올렸다.

“사냥 파트너를 정하는 순서는 <영화로운 수확의 만찬회>의 백미라고 할 수 있죠. 암묵적으로 사냥제 전에 파트너를 정하는 건 비매너 행위예요. 예외로 그해 처음으로 사냥제에 참여한 사람은 시종장에게 정해 둔 파트너를 미리 고지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혹은 운명처럼 정해지는 겁니다.”

‘라파엘로가 제나일 성에서 말했던 파트너가 이것을 말하는 거겠지.’

한데 황실에서 주관하는 사냥제의 파트너는 기존 파트너의 개념과는 조금 다른 듯했다.

보통 사냥제에서 파트너를 정하는 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안전장치라 할 수 있는데, 이곳 사냥제에서는 두 사람이 한 개의 조가 되었고 각자 역할이 분배되어 있었다.

“한 개의 조는 1명의 사냥꾼과 1명의 보좌로 구성됩니다. 총 점수는 사냥꾼의 ‘사냥’ 점수와 보좌의 ‘보좌’ 점수를 합산해 계산되며, 마도구를 통해 각 역할이 제한되므로 역할을 바꾸는 행위는 일절 불가능함을 알아 두십시오.”

시종장이 양손에 각각 검은색 팔찌와 백색 팔찌를 쥔 채 소개했다. 검은색이 사냥꾼의 팔찌, 백색이 보좌의 팔찌였다.

“첫 사냥에서의 사냥꾼 및 보좌의 역할은 두 번째 사냥에서 뒤바뀝니다. 이때만 파트너끼리의 팔찌 교환이 허용됩니다. 더불어 사냥당 파트너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총 2회 주어집니다.”

시종장이 검지와 중지를 들고 두어 번 흔들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점수가 높은 조의 사냥꾼이, 점수가 낮은 조의 보좌와 자신의 보좌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이때 점수가 낮은 조의 사냥꾼과 보좌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우선권은 총 점수 순서대로 갖습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사냥 대회에 참석한 이들 대개가 각자의 불안감과 기대감으로 조금씩 들뜬 모습이었다.

“유념해야 할 부분은 보좌가 바뀌어도 조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냥꾼은 바꾼 보좌의 ‘보좌’ 점수를 방해해 다른 조에 훼방을 놓을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바뀐 보좌 역시 사냥꾼의 ‘사냥’ 점수를 방해해 방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날 사냥은 다시 본래의 조 구성대로 시작합니다.”

시종장은 사냥 대회 동안 진행되는 ‘파트너 바꾸기’를 전략을 위한 용도로 설명했다.

그러나 하녀장의 첨언에 따르면, 이 ‘파트너 바꾸기’는 단순히 사냥 전략을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누구의 눈총도 받지 않고, 황제 공인하에 단둘이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몹시 매력적인 일이에요. 미혼 남녀에게는 특히나 더 그렇겠죠. 그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담화나 상대를 위협하거나, 조롱하는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고요. 그러니 첫 파트너는 가능한 한 유능한 이로 골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쓰다 버리는 도구로 휘둘릴 거예요.”

은근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남녀가 보인다 했더니. 아마 이런 이유에서인 것 같았다.

“만찬회에 참석하신 분들은 정면에 자리한 냅킨의 뒷면을 확인해 주십시오.”

시종장의 말에 따라 냅킨을 뒤집었다.

하얀 천 뒤에는 황실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내 문양의 색은…….

“검은색 문양을 받으신 분들은 첫날에는 사냥꾼, 둘째 날에는 보좌 역을 이행하셔야 합니다. 반대로 회색 문양을 받으신 분들은 첫날에는 보좌, 둘째 날에는 사냥꾼 역을 이행하셔야 합니다. 문양은 지금부터 10분까지만 교환이 가능합니다.”

내 문양의 색은 회색이었다.

‘흠.’

슬쩍 보니 라파엘로가 받은 문양의 색은 검은색이다.

당연한 건가? 일단은 라파엘로의 파트너로 참석했으니, 우리의 색은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문양의 색을 확인한 참석자들이 서로의 색을 비교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이는 단연코 라파엘로와 검성이었다.

심지어 라파엘로는 파트너랍시고 날 옆에 끼고 왔음에도, 건너 건너 도달한 여인들의 질문이 끊이지를 않았다.

“제나일 공작 각하, 레이디 로제토가 각하께서 받으신 문양의 색을 물었습니다.”

“제나일 공작 각하, 레이디 에드위나가 각하께서 받으신 문양의 색을 물었습니다.”

“제나일 공작 각하, 그리우크 백작이 각하께서 받으신 문양의 색을 물었습니다.”

문양을 한 번 확인했을 뿐인데, 시종 열셋이 찾아와 라파엘로에게 전언하고 답을 기다렸다.

‘능력 있고 잘생긴 미혼남의 삶은 이런 건가?’

전쟁에서 고생한 값을 톡톡히 받는구나. 당사자는 딱히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자, 한참 “검은색이라고 전달해 주게.”라는 말을 반복하던 라파엘로가 내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누이의 첫 사냥제 파트너는 나로 정해졌으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계속 쳐다봐서 부담스러웠던 건가. 앞으로 좀 덜 쳐다봐야겠네.

“이왕이면 내 문양을 검은색으로 해 주지. 사냥이라면 나도 꽤 자신 있거든.”

“그 점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마 시종장이 임의로 분배한 것 같은데, 원하신다면 저와 바꾸어도 됩니다.”

“괜찮아. 둘째 날부터는 내가 사냥꾼이니까.”

그때.

내내 조용했던 내 등 뒤에도 처음으로 시종이 걸어왔다. 주위를 둘러싸고 앉아 있던 노장들의 시선이 그 하인에게로 향했다.

살벌한 눈초리에 떨릴 법한데도, 시종은 결연한 얼굴로 다가와 내 귓가에 고개를 숙였다.

“웨더우즈 자작님.”

이어서 나온 이름은 시종의 당당함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각하께서 자작님이 받으신 문양의 색을 여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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