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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28화 (128/195)

128화

진은 사냥제 당일 밤까지도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한쪽 어깨는 검성에게 뚫리고, 반대쪽 허벅지는 내게 뚫린 탓에 침상 신세를 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의 안색은 마냥 파리하지 않았다. 외려 알게 모르게 내보이던 그늘진 면이 눈에 띄게 밝아질 만큼, 최소 심리적으로는 몹시 건강해 보였다.

“정작 중요한 시기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자작님.”

내 보좌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어, 죄책감을 느끼는 점을 제외하고는.

“됐으니 회복에나 신경 써. 첫 번째 벽을 넘은 느낌은 좀 어때?”

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상합니다. 제 검이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단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청각이 너무 예민해져서 움찔움찔 놀라기도 하고요.”

“금방 익숙해질 거야. 일단은 회복에 전념하면서 공명을 조금씩 통제하려고 노력해 봐. 공명이란 건 결국 네 내면을 비추는 목소리니까, 스스로를 잘 파악해야만 조절할 수 있을 거야.”

“네!”

나는 붕대로 칭칭 감긴 채 버둥대는 진을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침실을 나섰다.

‘회복까지 꽤 걸리겠는걸. 하긴, 내가 저런 상처를 달고도 며칠 만에 평소처럼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다 루 덕분이었지.’

새삼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편의를 누려 왔는지 자각하게 된다.

루의 확언에 따르면 내일쯤 다시 만나게 될 텐데. 마침 진의 자리도 비었으니, 또 이상한 역할극에 빠지지 말고 보좌관으로서 내 옆자리를 지켜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너무 큰 보폭으로 걷지 마세요, 주인님.”

“응.”

“호탕하게 웃지도 마시고요.”

“응.”

“남자는 가능한 많이, 다양하게 만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잊지 마세요.”

“알았대도.”

나는 현관문 바로 앞까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잔소리하는 하녀장을 무르고, 타운 하우스를 나섰다.

노을까지 완전히 사라진 남색 하늘은 회색 구름에 가려 스산했다.

이곳, 라갈의 밤은 미드윈트리의 밤보다 훨씬 밝고 더욱 어둡다. 도시는 낮처럼 밝은데 하늘은 그와 정반대로 침침했다.

은하수도 더 흐렸고, 별도 드문드문 보였기 때문에 나는 라갈의 밤보다 낮이 더 좋았다. 밤은 밤대로 시끌벅적한 제도의 정취가 물씬 풍겼지만……. 내게는 그 활기가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라갈에서만이 아니다.

나는 축제나 연회를 선호하지 않았다. 아마, 오롯하니 즐거움을 위한 자리가 익숙지 않기 때문일 테다.

황성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다만 내부로 들어서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펜 로타의 모든 귀족이 모여서 사냥 솜씨를 뽐내는 자리라 그런지, 휘황찬란한 마차가 줄지어 늘어서 있던 것이다.

집사 암살자가 모는 마차에 올라, 산적 하녀의 에스코트를 받고(하녀장이 기겁하며 평범한 하인 복장으로 갈아입혔다.) 마침내 하차했을 때.

가정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웨더우즈 저택 분수의 족히 15배는 되어 보이는 규모의 거대한 분수였다.

‘저 눈부신 분수는 그대로네.’

분수 바닥에 오색의 보석이 박혀 있어, 물살이 출렁일 때마다 반사된 햇빛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

‘나타샤의 책봉식 이후 처음인가.’

이런 식으로 다시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데이지 웨더우즈 자작님이시오.”

다가온 시종을 향해, 집사 암살자가 나를 소개했다.

“웨더우즈 자작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시종의 뒤를 따라 분수를 반쯤 돈 후, 적갈색 침엽수가 늘어선 길을 따라 본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뜻 고개를 돌렸을 땐 집사 암살자가 모는 마차가 황성 밖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사냥제의 첫 번째 일정은 <영화로운 수확의 만찬회>다.

일종의 전야제이기도 한 만찬회는 수확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사냥제가 성공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끝나기를 기원하는 자리였다.

황실에서 직접 사육한 가축들을 신에게 바쳐 평온한 겨울을 기도하며, 사냥제에 참석하는 모든 이가 나눠 먹고 남은 고기는 라갈의 도시민들이 나눠 가진다.

하녀장에게 듣기로, 종전 이후부터는 사냥제에서 잡힌 모든 사냥감을 전국 난민 보호소와 보육원에 나눈다고 한다. 급격히 늘어난 전쟁고아를 구호하는 목적이 컸다.

황성의 근사한 정원을 구경하며 본성 앞에 자리한 계단을 타고 올라가려던 때였다.

“누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도 눈에 띄게 큰 신장을 가진 남성이 뒷짐 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파엘로.”

“일찍 도착하셨군요. 기다릴 일을 덜었습니다.”

라파엘로는 내게로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고, 나 역시 자연스레 그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주위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모였다.

‘……음.’

착각이 아니라면, 아주 짧게나마 정적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불현듯 단상 위에 선 연기자가 된 기분이었다.

반은 노골적이고 또 나머지 반은 은밀한 눈초리가 내 얼굴, 머리 모양, 의복 할 것 없이 사방을 샅샅이 훑으며 살폈다.

하필 청각이고 시각이고 범인 이상으로 발달된 탓에 주변인들의 속닥거림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혹시 저자가 안데르트 파거의 형제라는…….”

“웨더우즈 자작? 맞는 것 같죠? 전해 들은 인상 그대로예요. 훨씬 사나워 보인다는 점만 빼고요.”

“아마 그건 화장 때문일 거예요.”

“세상에, 영웅 안데르트의 형제라고요? 과연 사실일까요? 듣자 하니 전 웨더우즈 부인의 하녀였다던데…….”

“제나일 공작이 증인으로 나서는데 사실이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나. 공작과 안데르트 파거의 관계가 각별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이야기일세. 오죽하면 한쪽이 라파엘로의 검이라 불렸겠는가? 적어도 안데르트 파거와 관련된 사안은 거짓으로 꾸미지 않았을 게야.”

“바닥에서 올라온 영웅이 사실은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었다니.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네요.”

“죽은 동생의 명성을 등에 업고 날뛸 여자일지 아닐지가 궁금해지는군.”

다양한 시각. 그리고 다양한 호기심.

‘예술 대학 입시에 진열된 그림 작품이 된 느낌인데.’

라파엘로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예상하지 못한 반응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르는 척 계단을 오르는데, 어쩐지 내 오른쪽에 선 인물의 시선이 무시하기 힘들 만큼 따갑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무시하고 무시하고 무시하다 못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리자, 라파엘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많이 긴장하셨습니까?”

“아, 물론이지. 너무너무 긴장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아니라는 걸 잘 알겠습니다. 이전에 뵈었을 때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 여쭌 겁니다.”

분위기?

아.

“화장 때문에 그래. 오늘 힘을 좀 썼거든.”

“첫인상이 중요하기야 하지요.”

“맞아. 슬슬 결혼할 남자도 찾아야 하고.”

라파엘로가 입을 다물었다.

특별히 놀라거나 언짢은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말없이 내 얼굴을 살피다가 걸음을 조심하라며 손을 더 세게 잡아 줄 뿐.

지금 나 너한테 눈치 주고 있는 거야, 라파엘로. 이쪽은 알아서 남자를 구할 테니 청혼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라고.

‘내가 먼저 정체를 밝히기 전에 안데르트를 위해 책임지니 뭐니 지껄이면 아주아주 곤란해져.’

기다려라, 라파엘로.

사냥제가 끝나기 전에 내 정체를 밝혀 주마. 내가 긴장할 유일한 원인은 사냥제 따위가 아니라 바로 너니까.

그렇게 긴 계단을 전부 오른 후. 라파엘로가 미묘하게 경직된 눈으로 천천히 입술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제나일 공작.”

저 앞에서 누군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칼펜위버 후작이었다.

“아아, 웨더우즈 자작 아닙니까? 이곳에서 만나니 반갑군요. 오늘은 어쩐지 다른 사람 같습니다.”

넉살 좋은 그는 유들유들한 태도로 나를 알은체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

“오, 내 아내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처음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아내인…….”

칼펜위버 후작이 제 아내를 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장장 10분이 넘는 통성명 시간이 주어졌다.

로즈벨 백작과 기타 등등 인원까지 끼어들어 제 가족을 소개해 주기 바쁘니, 어느 순간부터는 뇌가 가동하다 만 느낌이었다.

‘미안, 더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나는 그냥 이들의 침에 흔들리는 갈대다…….’

끊임없이 흔들리던 갈대는 흐름에 이끌리다가 불현듯 낯선 공간에 도착했다.

그윽한 어둠 속에서 고풍스럽게 흘러나오는 음악. 드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개수만 아홉 개. 거기에 상석을 중심으로 양옆 아래에 길게 자리한 대형 식탁이 두 개.

황성의 대형 만찬장이었다.

“벌써부터 지치면 어떡합니까? 아직 만찬회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

그리 속삭인 라파엘로가 나를 오른쪽 식탁 상석 쪽으로 이끌었다.

드문드문 자리한 귀부인들이 내게 눈인사를 보냈다. 겉으로만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하녀장이 귀부인들과 가까워져야 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했지. 배 채우면서 통성명이나 좀 해야겠다.’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는 라파엘로가 안내한 테이블 앞에 도착한 즉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자리에는 주인이 정해져 있다.

라파엘로의 파트너이자 귀족회 일원인 나의 자리는 황족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몹시 가까웠다. 그러나 위치 같은 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벽.’

내 자리는 딱딱하고 드높은 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라파엘로. 그래, 여기까지는 문제없다고 쳐.

그런데 왼쪽에는 로즈벨 백작 부부, 앞쪽에 칼펜위버 후작 부부, 그 옆에는 라그휘르텐 백작 반대쪽 옆에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결사대 일원으로 보이는 남자까지…….

“하아.”

젊은 미혼녀인 내가 이런 아저씨들 사이에 껴서 저녁을 즐겨야 한다고?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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