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루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나이 차가 실감될 만큼 어른스럽다가도, 종종 안데르트보다도 더 애처럼 구니.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라도 그 심보에 맞춰 줘야지.
나는 부러 양손을 내밀며 정중히 부탁했다.
“루 씨. 반신씩이나 되시는데, 이왕이면 쉽게 쉽게 구해다 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 더 귀엽게.”
염볌. 그놈의 귀여운 게 대체 뭐길래?
나는 루가 나를 ‘귀엽다’는 끔찍한 형용사로 표현할 때의 상황을 복기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나는 대충…….
“닥치고 구해 와.”
“…….”
“입 다물고 내놔?”
“…….”
“……죽고 싶지 않으면 퍼뜩 가지고 와?”
이것도 아니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루는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불가능해.”
뭐라고? 이 자식. 못 하면 못 한다고 미리 말하란 말이다…….
비열한 웃음을 지은 루가 손을 뻗어 내 오른쪽 뺨을 주욱 늘였다.
“이 심통 난 얼굴.”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나는 화낼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래서 되는 대로 지껄였다.
“자꾸 귀엽다고 하지 마. 열받으니까.”
“반은 그러라고 하는 건데.”
이 노친네가 정말…….
고개를 홱, 돌려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리고 여전히 비열한 낯을 한 루에게 물었다.
“좋아, 네가 직접 나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겠어. 그런데 왜 불가능하다는 건데? 나 혼자 해내야 더 보람차니까?”
“그딴 데 보람을 느껴서 뭐 하나 싶은데. 개고생이란 건 본래 사서 할 필요가 없는 거지.”
고심하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루는 긴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이 된 디안 케트가 인계를 떠나기 전. 그와 나는 몇 가지 약속을 나누었다.”
인계를 떠나기 전?
‘그 말은 신이 되어 우주로 올라갔다는 뜻이려나.’
디안 케트는 신이 되었구나.
나는 묘해진 기분으로 루를 응시했다. 그도 신이 되고 싶을까?
“내가 말할 때는 내 말에 집중하라고 했잖아.”
“……집중하고 있었어.”
내 말에 루가 대놓고 코웃음 쳤다.
“널 모르는 줄 알아? 지난 14년을 허송세월로 보내지 않고서야, 이 세상에 나만큼 널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는데?”
못 들은 척 발동. 다행히 루는 내 못 들은 척에 친히 넘어가 주었다.
“디안 케트와 내가 나눈 약속 하나, 메피스토에게 손대지 않을 것.”
뭐라? 누구에게 손을 못 댄다고?
물론, 그간 의문을 느끼기는 했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녔으면서 변절자인 메피스토를 직접 처리하지 않았…….
“둘, 그의 유산을 주인들로부터 빼앗지 않을 것.”
세상에나.
첫 번째 약속만큼 쓸모없는 약속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또 있었군.
“대체 그런 약속들은 왜 나눴어? 없던 일로 못 물러?”
“지금 내게 신과의 약속을 없던 일로 치라는 거야? 깜찍한 요구를 하네. 디안 케트의 부탁을 들어준 이유는 간단해. 내게 그런 부탁을 남겼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마 디안 케트도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리라곤 예상 못 했겠지.”
결국 깰 수 없는 약속이란 말이었다.
루도 그렇고, 디안 케트도 그렇고. 반신이라고 해서 완벽한 통찰력을 지닌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럼 유산에는 손을 아예 못 대는 거야? 내게서 디안 케트의 일기장은 잘만 훔쳐 갔잖아?”
“심리적인 차이지. 빼앗느냐, 보관하느냐. 쩨쩨한 수단은 통하지 않아. 신의 눈은 못 속이니까.”
아, 그래서…….
“넌 어떻게 해서든 내가 지킬 테니, 그 유산을 얻는 데만 집중해.”
직접 움직이지 못하니 간접적으로 도와주겠다는 뜻이었구나.
“그럼…… 계속 나랑 있는 거야?”
“새삼스레.”
“모리안의 모습으로?”
“왜? 역시 이 얼굴이 좋아? 보기보다 음흉하네, 데이지는.”
“음흉? 지금 여기서 누가 제일 음흉한데 그래?”
루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야, 나?”
눈싸움하듯 서로를 노려보다가(물론 루는 재수 없게 웃기만 했다), 결국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들었다.
나는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가서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올린 채 루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이제 자야겠어. 너는 다른 방으로 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재워 줘?”
“내 침대에 올라오면 비명 지를 거야.”
“정말?”
대답하지 않자 그가 낮게 웃었다.
“잘 자, 심통 난 데이지.”
다시 모리안의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뺨을 가볍게 쓸고 멀어지는 손길이 밀가루 반죽처럼 보드라웠다.
경쾌한 구두 굽 소리가 여유롭게 멀어진다.
루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의사가 다녀갔다.
상당한 양의 각혈을 보고받은 의사는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날 진찰했다. 그리고 한없이 의아한 얼굴로 펼쳐 둔 의료 가방을 다시 정리했다.
“흠. 이상하군요. 안색도, 심장 박동도, 호흡도, 기타 다른 부분도 전부 정상입니다. 그 정도의 피를 뱉으면 절대 정상일 수가 없을 텐데…….”
더 놀라워 해. 그게 바로 마법이니까.
의사를 데려온 드셰로는 멀쩡한 모습을 한 내 상태에 큰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그의 의심은 외려 침대 옆에 앉아 뜨개질하느라 바쁜 모리안에게 온전히 향해 있었다.
그러나 곧 세레니예 백작과 나의 관계를 떠올렸는지(눈치 빠른 드셰로가 안데르트의 사진관까지 소유한 세레니예 백작과 나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리 없다) 자연스럽게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웨더우즈 자작, 의사는 당신이 이곳에 지낼 동안 하루에 세 번씩 수시로 검진할 겁니다.”
“뭐? 시건방지게 시키지도 않은 짓을 멋대로 진행해? 귀찮은 짓거리는 그만두지 그래?”
“저만 있을 때는 거친 언사를 조금 자중해 주시죠.”
안 돼. 옆에서 진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잖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요점은 내가 싫다는 거야. 알아들어?”
“공작 각하의 명입니다. 귀찮다면 그분 앞으로 직접 가서 자작님의 건강 상태를 입증하십시오.”
그건 더 귀찮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응.”
피곤에 찌든 드셰로의 눈이 힐긋 루를 향했다. 그러고는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전에 말입니다. 당신의 수명이 10년 정도 남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그 영향은…….”
“드셰로 자작님은.”
대뜸 난입한 목소리에 드셰로의 말이 뚝 끊겼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희고 고운 손가락을 열심히 놀리는 모리안 세레니예에게로 향했다.
“숙녀분의 침실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긴 것 같네.”
“…….”
“미혼 남녀가 한방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축내면 안 되지. 아니면 설마, 드셰로 자작님께서 우리 데이지에게 관심이 있으신가?”
드셰로가 와락 미간을 구겼다. 코끝까지 씰룩이는 걸 봐선 참을 수 없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야, 누군 저딴 소리 듣고 기분 좋은 줄 알아? 표정 관리해라.
“1시간 후 공작님이 직접 찾아오실 겁니다. 그동안 푹 쉬고 계십시오.”
뚱하니 한 마디 뱉은 드셰로가 방을 나간 후. 나는 되도 않는 소리를 뱉은 루를 타박했다.
“왜 애한데 눈치를 줘?”
그러거나 말거나, 루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하던 뜨개질을 이었다.
“드셰로 콘타나는 네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던데.”
머쓱하게 코를 닦았다.
알기는 아는데, 밝힌 게 아니라 들킨 거라 당당히 긍정하기가 좀…….
“뭐, 말하고 말고는 네 자유니 뭐라 할 마음은 없어. 하지만 쓸데없이 길게 머무는 건 사실이니까. 경고할 필요는 있지.”
“드셰로는 내 동료이자 친구야. 그런 낯부끄러운 감정은 개미 눈곱만큼도 없어.”
“없다가도 생기는 게 이성적인 관심인 법. 잘 처신하는 게 좋아. 그래야 애먼 남자들이 우리 데이지의 혼삿길을 안 막을 테니까. 안 그래, 진 보좌?”
“……그렇습니다.”
뭐? 혼삿길?
나는 문 옆에 서서 어색하게 답하는 진을 노려봤다.
‘네가 말했어?’
진이 스윽 눈을 피했다. 말했구먼. 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웨더우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주 낱낱이 알린 모양이었다.
루의 말에 틀린 건 없지만…….
‘사실 그나마 있던 흥미도 어제부로 뚝 끊겼는데.’
정확히는 루와 재회한 이후로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통찰이다.
루 한 명도 감당하기 힘든데 여기서 남편까지 추가하라고? 허울뿐이라지만 군식구 하나 딸려 오는 기분이라 영 탐탁지 않다.
새로운 책임을 지기에는 이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졌다, 이거다.
나는 가을 귀부인의 표식인 보닛과 양산을 손에 쥔 채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십니까, 자작님?”
“머릿속이 답답해서. 몸 좀 움직여야겠어.”
“제나일 공작님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급하면 알아서 날 찾아오겠지.”
뒤통수 너머에서 루의 산뜻한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아, 말하기 무섭게 신랑 후보를 만나러 가는 건가?”
“오늘내일하는 상황에서 신랑 후보는 무슨 신랑 후보야? 그딴 데 신경 쓸 여력 없어. 오해 좀 그만해. 알아 둬, 모리안. 오늘부터 내 일생일대의 꿈은 생명 연장이다.”
“그래? 역시 멋져, 우리 자작님. 응원할게.”
어젯밤에는 괜찮아진 것 같더니, 오늘은 또 왜 저렇게 날이 서 있담. 재수 없고 까칠한 웨더우즈 자작 역할에는 내가 아니라 루가 제격일 듯했다.
한데 침실을 나와 문을 닫은 순간.
섬광 같은 깨달음이 내 뇌리를 관통했다.
“설마, 질투?”
내 자문을 들은 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