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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14화 (114/195)

114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릿속을 정리하려던 차.

‘……인기척.’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덕분에 나는 방문자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채, 침대 안으로 후다닥 몸을 숨겨야 했다.

상의를 탈의한 상태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문이 열렸다.

덜컥.

“읏차.”

문 옆에 묵직한 물건을 놓는 소음이 들린 후. 산뜻한 웃음이 지척에서 흘러나왔다.

“고마워요, 기사님. 덕분에 짐을 쉽게 옮겼네.”

“하하. 아닙니다.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그래도 될까요?”

“아, 제 이름은…….”

“응, 알았어요. 나중에 볼일이 생기면 찾아갈게요.”

쾅.

문이 닫혔다.

누군가 싶었는데, 코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진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호기심도 함께 증발했다.

“안녕, 자기.”

음, 그래. 그토록 매정한 존재는 세상천지 모리안, 아니, 루밖에 없지.

봄바람 불어오듯 살랑살랑 미소 지은 낯이 내 면면을 꼼꼼히 살폈다. 이어서 서릿발처럼 차가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렇게 내 눈앞에서 대놓고 쓰러진 건 엿 먹이려는 의도였던 건가? 맞았다면 축하해. 아주 잘 통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일단 루의 기분이 심히 좋지 않다는 건 알겠다. 내가 영 좋지 않은 꼴로 기절해서 계속 신경이 쓰였나 보다.

“……혹시 걱정했어?”

“…….”

“널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야. 솔직히 나도 그렇게 쓰러져 버릴 줄은…….”

“알아, 아닌 거.”

쉰 음성으로 말끝을 흐린 루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어라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말없이 손가락만 놀리는 루를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생각보다 이르게 재회하게 돼서 기쁘지만…… 하필 그런 나약한 꼴을 보이다니. 운이 나빴다.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편 루가 물잔을 내게 건넸다.

“목 좀 축여.”

“나중에.”

“아, 나중에?”

입 안에 물을 가득 담은 루가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본인이 입에 물고 있는 물을 먹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 마시라고.

루, 너는 너무 괴팍해. 나는 루가 물잔을 기울여 입에 흘려보내 준 물을 마신 후, 문 근처에 놓인 가방들을 턱짓했다.

“저것들은 뭐야?”

“내 짐. 여자는 짐이 많거든.”

이 침실에서 함께 지낼 거라는 뜻인가? 아니, 일단 모리안이 여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사가 직접 짐을 옮겨 준 걸 봐선 라파엘로의 허락을 받은 모양이네.’

모리안의 신분은 웨더우즈 전 자작 부인이다. 라파엘로와의 안면은 진작 익혔고, 같은 집안사람인 내가 기절한 만큼 보호자 명목으로 머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부녀 주제에 앞길 창창한 기사 한 명을 꼬신 거야?”

“꼬셔? 이런, 데이지. 겨우 웃음 몇 번 흘려 준 걸로 꼬신다는 소리를 운운하다니. 앞으로 나랑 어떻게 지내려고 그럴까.”

“그래서 불순한 의도로 웃은 건 맞다는 뜻이지?”

“그야 무거운 걸 굳이 내 손으로 들 필요는 없으니까.”

평소처럼 힘없고, 성의 없고, 능청스럽기만 한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마침 그에게 답을 얻고 싶었던 의문도 있었고.

‘루라면 내 몸에 생긴 상처의 원인을 더 정확히 진단할 수 있지 않으려나.’

맨등을 보여야 한다는 게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그니까.

“저기, 루.”

보닛을 정리하던 아리따운 여인이 나를 돌아봤다.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내 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혼자서는 도저히 판단이 안 서서 네 조언이 필요할 것 같아.”

그는 주저 없이 보닛을 내던지고 내게 돌아왔다.

“말해.”

“잠깐만 눈 감아. 그리고 5초 후에 다시 떠 줘.”

루가 눈을 감은 사이에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색하게 등을 보인 후 침구로 앞쪽 상체만 가린 상태에게서 그에게 물었다.

“보여?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내 몸에는 없던 상처들이야. 아무래도 안데르트 시절에 생긴 상처가 이 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계절이 계절인지라 맨피부를 밖에 드러내고 있으려니 소름이 살짝 돋았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루의 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루? 내 말 들었어?”

질문과 함께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더 이상 모리안이 아닌 내가 아는 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을빛을 가릴 정도로 드높아진 시야가 내 고개를 꺾었다.

나는 상대의 신장에서 압박감을 느끼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루만은 예외였다. 반신이 풍기는 존재감 때문인 걸까?

루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 내 등을 유심히 확인했다.

‘꽤 오래 살피네.’

기다리는 나도 신중해지는 기분이라, 고개를 돌린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가 내 몸 상태를 더 면밀히 확인할 수 있도록.

“……쓰러진 직후 생긴 상처라고 했나?”

“아, 응. 더 가까이에서 살펴도 돼.”

작게 한숨을 내쉰 루가 양쪽 눈두덩이를 느릿하게 누르며 답했다.

“됐으니 챙겨 입어.”

나는 루가 몸을 돌린 사이 반쯤 벗어 뒀던 옷을 다시 입었다.

“우선…… 네가 쓰러진 건 내장 출혈 때문이야. 하지만 이 부분은 내가 치료했으니 별문제 없을 거다.”

아, 몸 상태가 괜찮았던 건 역시 루가 치료해서였구나.

‘그런데 용케 이 상처들을 확인하지 못했네.’

옷감을 조금만 내려도 바로 보였을 텐데. 치료에 필요한 최소한의 스킨십 외에는 털끝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내장 출혈을 한 번에 치료할 정도면 고난도의 마법이지 않아? 그렇게 쉽게 사용해도 돼? 균형은?”

“아쉽지만 내 균형은 치료 마법 따위에 안 무너져.”

“그럼 팔이 잘린 채 와도 붙여 줄 수 있어?”

“아아, 물론이지. 대가로 네 수명을 바친다면.”

뭔데. 갑자기 대가가 너무 커진 느낌이지 않나.

“……무슨 차이야? 난이도?”

“아니,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의 차이. 다 입었나?”

“응.”

짐 가방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루가 수북이 쌓인 옷가지들 틈에서 겨울용 카디건을 꺼내 건넸다.

입으라는 건가? 나는 의복을 받아 들며 물었다.

“루, 혹시 로궤에 문제라도 생겼어?”

“생겨도 칼레파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런데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어?”

수명이니 뭐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고 말이야.

“……별로 즐거운 지적은 아니네.”

나는 카디건까지 완벽하게 착용한 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상처는…… 역시 영혼이 깨져 버린 영향일까?”

“그래.”

“다시 사라질 일은 없는 거야?”

“아마도.”

불운한 소식이었다.

‘10년은 언감생심이고 최소 몇 년은 버텨 줄 줄 알았더니.’

이래서야 오래 버텨 봤자 1년쯤 되려나.

웨더우즈 작위를 물려받으면서, 심적으로도 신적으로도 움직이기 한결 편해져서 다행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긍정적인 일들이 생기기 무섭게 더 큰 산이 나타나 버린 격이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텅 빈 침묵을 깬 이는 루였다.

“데이지.”

“응.”

“연약한 것들은 왜 이리 쉽게 부서질까.”

나는 루를 돌아봤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허무가 깃든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하다.

“잘 단련시켰다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결과가 나 버리는군.”

그 말을 듣고서야, 루의 신경이 내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 때문이었구나.’

루.

내 우울한 마법사.

안 그래도 우울한 인상인데, 내 존재가 그를 더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요상했다.

루가 나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건 자명한데…… 이런 식으로 몸소 느끼면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특별 취급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루가 매사 신경 쓰고 있다는 그 ‘균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봐.

‘음. 그래도 이런 걱정은 너무 오만한 거려나.’

상식적으로 말이야. 내 존재가 루에게 그 나름의 영향을 끼친다고 한들, 반신의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겠냐고.

잠시간 쓸데없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워져서, 나만 들리도록 작게 헛기침했다.

그사이 무겁게 침전되어 있던 루의 눈이 한층 날카롭게 변했다.

“잘 들어, 데이지. 이 성에는 디안 케트의 유산이 보관되어 있다.”

“뭐? 이 성에?”

“그래. 유산에서 풍겨 오는 디안 케트 특유의 기운이 이 근방에 고여 있어. 사람을 죽이든, 성을 무너뜨리든 그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도 좋아. 넌 어떻게 해서든 내가 지킬 테니, 그 유산을 얻는 데만 집중해.”

루가 내게 제안한 바는 명확하다.

한시라도 빨리 디안 케트의 유산을 모아 깨진 영혼을 회복할 것.

그래, 결국 그 수밖에 없다.

‘라파엘로가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는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미 한 개를 소유하고 있었던 건가.’

내게는 여러모로 잘된 일이었다.

당장의 목표가 생겨서일까? 물먹은 솜처럼 축 처져 있던 몸에 활기가 돌아왔다.

“알았어. 어떻게 해서든 훔쳐 볼게. 나만 믿어.”

나름 신뢰 넘치게 다짐한 것 같은데…… 뭐지, 저 심술 난 표정은.

“또 왜? 뭐가 문제야? 왜 그런 눈으로 봐?”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루가 날 내려다보며 답했다.

“가져다 달라고 해 봐.”

“뭐를?”

“이곳에 보관된 디안 케트의 유산.”

이 남자 또 이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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