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95)

84화

“데이지 양은 좀 더 어려워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네. 쉬운 여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지. 멋진 백작님이지만 함부로 반하지도 말고.”

“당신 루잖아.”

“루?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군. 애인? 나와 착각하다니, 대단한 미남인가 보지? 영광일세.”

“시치미 떼지…….”

“하여간 중요한 건.”

길고 고운 손이 내 앞으로 뻗어 나와 코끝을 살짝 집었다.

“이 백작님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 데이지 양은 심장을 먹었어. 어디서 주워 먹었는지 혹은 누가 먹였는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기억해 내…… 아.”

그리고 나는 그 건방진 손가락을 콱, 깨물어 버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자신의 손끝을 멍하니 응시했다. 정확히는 내 앞니 사이에 갇힌 검지를.

세레니예 백작의 입꼬리가 더 깊고 나른한 호선을 그렸다.

“이런. 우리 데이지 양은 개인가 봐. 하지만 개여도 사람의 손을 씹으면 안 되지.”

나는 그의 손가락을 이로 문 채 또박또박 경고했다.

“솔디카게 마래. 다시 루자나.”

“흠. 혀가 닿으니 기분이 묘한데.”

기겁하며 떨어지자, 상쾌한 웃음이 지하를 울렸다.

“그래서. 심장은?”

“필요 없어.”

“그런가? 아쉬운걸”

나긋한 음성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등을 돌렸다.

“자,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이곳은 터가 안 좋아서 오래 있으면 배탈 나.”

짐승으로 변한 세레니예 백작은 내 옷깃을 홱, 물더니 제 등 뒤로 내던졌다.

나는 바람처럼 계단 위로 내달리는 짐승의 등에서 목청 터지게 소리쳤다.

“같잖은 연극 그만하라고!”

“역시 좀 귀여워.”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중정으로 돌아가, 다시 날 바닥에 내려놓은 그는 기다란 꼬리를 살랑이며 몸을 돌렸다.

“이제 방으로 들어가. 백작님은 바빠서 다른 일을 보러 떠나야 해.”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등짝 위로 뛰어올라 매미처럼 착 달라붙었다.

일부러 힘도 세게 줬는데, 네발짐승은 꼼짝 않고 고개만 돌려서 날 쳐다봤다.

“가기는 어딜 가? 웨스트윈트리에서도 그렇게 멋대로 떠나 놓고 이번에는 또 어딜 가려고?”

“고귀한 세레니예 백작님은 우리 하녀 데이지 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날 속이는 게 그렇게 재밌어?”

금빛 눈동자가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어쩐지 긍정하는 느낌이라 열만 받았다.

도망갈세라 짐승의 털을 더 꽈악 쥘 때였다. 시야가 높아지면서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털에서 느껴지는 거친 따스함이 아닌, 단단한 몸체에서 전달되는 온기가 나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내 다리를 가볍게 받쳐 안은 세레니예 백작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디안 케트의 유물이 필요하지 않나?”

디안 케트.

아주 중요한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집중되지 않는다. 뇌까지 집어삼키려는 심장 박동이 그저 혼란하기만 했다.

“유물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로궤에 도달해야 할 거야. 그곳에 세 번째 유물이 숨겨져 있거든. 혹시 몰라. 몰래 훔쳐 낼 수 있을지도.”

그는 오늘 아주 잘 웃었다.

이번에도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코끝으로 내 뺨을 꾸욱 누르며 인사했다.

“잘 자.”

그리고 세레니예 백작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뭐지.’

뭘까.

도대체 뭘까.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보내 준 거지? 왜 멍청하게 저 남자의 등만 바라보고 서 있는 거지?

‘……아니야, 이런 건 깊게 생각하면 안 돼. 돌아가자. 돌아가서 잠이나 자자.’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날은 아침 해가 뜨고서야 잠들었다.

고작 두어 시간의 선잠만을 취할 수 있던 밤.

이른 오후가 되어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어디서 뭘 하다 모였는지는 모른다. 늦게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운동하는 동안 점심시간이 다 가 버렸다.

다만 진과 안데르트의 얼굴을 마주친 즉시 확신한 사안은 하나 있었다.

‘둘 다 운동하다가 나왔구나.’

알게 모르게 산뜻한 표정을 봐선 분명했다. 뼛속까지 검사인 놈들.

예거시의 주도로 그리 흥미롭지 않은 북대륙 소식이 오고 가던 와중이었다.

승마복을 걸친 키 큰 남성이 거침없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이 성의 주인, 세레니예 백작이었다.

“좋은 오후일세, 친구들. 세레니예 성에서의 하루는 어땠나?”

“물론 아주 즐거웠습니다, 백작님. 성이 얼마나 크던지, 하루 종일 구경해도 다 못 둘러본 느낌이지 뭡니까? 오늘은 도시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잠시 벨보아 자작님께 다녀올 예정인데…….”

그리고 또 기나긴 예거시의 안부 인사가 시작됐다. 뼛속까지 사업가인 놈이다.

가볍게 차를 마시던 세레니예 백작은 우리에게 승마를 제안했다.

“어젯밤의 비로 풀이 꽤 자랐던데. 귀여운 말 친구들에게 신선한 식사를 제공하기 딱 좋은 날이지. 다들 함께하겠나?”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고, 모두가 함께 응접실로 나갔다.

멀찍이 뒤따라가며 세레니예 백작의 뒤통수를 노려봤으나, 그는 도통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마치 의식적으로 날 무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받네.

“아, 참고로 오늘은 다른 손님이 있다네. 동네 이웃인데 내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돌아왔는데 말이지. 누가 떠벌거렸는지 몰라도 참 아쉬워.”

“하,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입이 참 가벼운 친구가 떠들었나 보군요.”

아무래도 예거시가 떠든 모양이다.

“자네들의 편의를 위해서 오늘 손님들에게는 특별히 언어 통역 마도구를 대여해 주기로 했네. 대화하는 데 큰 문제 없을 거야.”

그의 호의는 내 의문 중 한 가지를 속 시원히 해결해 주었다.

‘역시 내 귀걸이 때문에 언어가 통했던 거구나.’

모두가 백작이 준비해 둔 승마복으로 환복할 동안, 나는 생활복 그대로의 모습으로 뒤를 따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을 탈 생각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저 혼자 조용히 숲속을 거닐며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할 예정이었다.

‘로궤에 디안 케트의 유물이 있다고 그랬지.’

미드윈트리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나흘 정도. 적어도 모레까지는 로궤에 입성해야만 한다.

다행히 내게는 말리콥스에게 선물 받은 한 가지 수가 있었다.

마사 앞에 도착했을 때는 낯선 남성 대여섯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레니예 백작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는데도 선뜻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백작! 이게 얼마 만인가? 이 친구가 바로 그 친구네. 백작을 만나고 싶다며 수년간 나를 괴롭혔던 그 친구!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오게 됐지. 좋게 봐 주게.”

세레니예 백작 앞에서 한껏 고개를 낮춘 채 세상 떠나가라 웃던 그들은 한참 만에야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이분들이 백작님의…….”

“펜 로타 제국인들? 꽤 많군.”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두 남성이 가볍게 자기들을 소개했다.

“나는 콴 백작이오. 이쪽의 어르신은 메데이스 후작님. 그리고 이쪽은…….”

“아, 세레니예 백작. 거의 3년 만의 귀국이었지? 그 이야기를 들었나? 공주님 말일세…….”

소개는 아주 짧게 끝났다.

대놓고 시큰둥한 표정들을 봐선 우리의 존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그들의 관심은 다시 세레니예 백작에게 쏠렸다.

“크흠! 흠흠!”

그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예거시가 큰 목소리로 헛기침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메데이스 후작님, 콴 백작님. 저는 예거시 파뉼라입니다.”

“……아, 그런가? 반갑군.”

작게나마 대답한 콴 백작과 달리 메데이스 후작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후 다시 세레니예 백작에게 달라붙었다.

예거시는 더 크게 헛기침했다.

“크흠흠!”

메데이스 후작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예거시를 노려봤다.

“자네, 목이 아프면 들어가서 쉬기라도 하게. 귀청이 떨어지겠군.”

언짢은 티가 풀풀 풍기는 저 얼굴.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고 있네.’

마도 전쟁에서도 지겹게 겪었지.

한미해도 귀족 가문의 당당한 후계자였던 라파엘로와 달리, 극남부 시골 출신 태생이었던 나는 영웅으로 추앙받던 시기에도 종종 신분 차별을 당하고는 했다.

평민에 불과한 검사가 검성과 로즈벨 백작의 관심을 받아서였을까?

피 끓는 청년 귀족들로부터 유독 많은 시비를 받았던 것 같다.

“어디서 작위도 없는 시골 촌놈 따위가 명령질이냐! 가서 네 상관의 구두나 핥으시지!”

이제는 벌써 옛일이 된 이야기다.

‘참 많은 녀석들을 팼었지.’

다행히 전쟁이 길어지면서 인재의 중요성이 대두되자, 군 내 신분 차별 또한 점차 줄어들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차별이고 뭐고, 다 살 만하니까 X랄하는 거란 사실을.

굳센 예거시는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뀐 채 더 크게 웃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대답해 주신 김에 저희 소개를 마저 잇겠습니다. 이쪽은 드셰로 콘타나 자작님입니다. 우리 펜 로타 제국의 영웅!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님의! 수행원이시기도 하죠.”

“……라파엘로 제나일 공작이라고? 그 영웅 말하는 겐가?”

“그리고 이쪽은 진 버클…… 아니, 진 양입니다. 우리 펜 로타 제국의 검성!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공작가의 후계자셨지요.”

“버클리그레이튼? 검성?”

대놓고 아랫것으로 바라보던 후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라파엘로와 검성의 명성만은 확실히 북대륙에도 널리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쪽은 데이지 양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특히 남자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연합군에서 받은 시선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라 굉장히 불편했다.

“흠흠.”

가볍게 헛기침한 콴 백작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헙. 고개를 숙이는데 향수 냄새가 너무 강해서 숨을 들이쉬기가 힘들었다.

“아까부터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리따우신 레이디께서는 어느 가문에서 오셨는지요?”

나는 레이디가 아니다.

“하녀.”

“…….”

“입니다.”

“……하녀? 하녀라고?”

하. 크게 헛웃음을 뱉은 콴 백작이 내 몸을 위아래로 길게 훑었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비웃음이 남자의 뺨에 걸쳐졌다.

“아아. 펜 로타에서는 고용인까지 소개하는 건가? 새롭군. 저질 문화라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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