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95)

83화

나는 괜히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밝혔다.

“그런 거 없어요.”

“없다니?”

“모리안 세레니예의 편지요. 애초에 모리안 세레니예도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잖아요.”

솔직히, 나는 그가 루 혹은 루와 관련된 사람이라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허. 세레니예 백작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

“만들어진 가상 인물? 그런 모독적인 언사를 하다니. 내 딸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편지가 있다고 거짓말을 해? 나를 속였군.”

순간 나는 잠시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모리안 세레니예라는 여자는 실존할 확률이 높잖아?’

루가 애초 그 실존 인물의 신분을 훔쳐 썼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래서 하녀장이 걱정했던 것이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진위 여부가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이자가 루인지 아닌지였다.

“속이기는 뭘 속여요? 그쪽도 다 알고 우리를 데려온…….”

“아니.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아는 건 그저 데이지 양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뿐. 손님이 아닌 불청객이었을 줄이야. 그대들은 필시 죗값을 치러야 할 걸세.”

“당신네 칼레파가 그랬다니까 무슨 소리를…….”

“세레니예 백작으로서 지금 당장 벌을 내리겠네. 얌전히 따르지 않으면 좋은 꼴 못 볼 테니 이리로 와.”

그야말로 일방적인 질타였다.

엄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대뜸 중정 밖으로 걸어 나갔다.

떨어지는 비에 그대로 노출된 세레니예 백작이 내게 손짓한다. 비 맞는 게 벌이라도 되는 건가 싶어 따라나섰을 때였다.

하늘로 닿아 있던 남자의 머리가 어느 순간 쑤욱 꺼졌다.

“타게.”

이윽고. 그는 시방 한 마리의 네발짐승이 되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짐승?’

이 남자, 마법사였어? 역시 루인가?

“타라니까.”

나는 주춤하며 세레니예 백작의 어깨…… 아니, 등…… 아니, 허리 어디쯤에 엉덩이를 댔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내가 왜 이 짐승의…… 아니, 세레니예 백작의…… 아니, 짐승의 등에 타야 하는 건데?

“늑대 같은 거예요?”

의문 끝에 나온다는 소리가 고작 그런 질문이었다.

짐승이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털을 더 바짝 잡고 몸을 낮췄다. 은근히 힘들었다.

“맞아. 낮에는 백작님, 밤에는 야수가 되는 끔찍한 저주를 받았지. 나는 이 저주를 풀어 줄 나만의 왕자님을 찾고 있어.”

“왕자님을 찾을 나이는 아닌 것 같아요. 아저씨잖아요.”

토독, 토독.

가볍게 걸음을 잇던 그가 코웃음 치며 반문했다.

“아저씨는 왕자를 찾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아저씨도 아저씨인데 유부남이 그러면 안 되죠.”

솔직히 나도 내가 뭐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 머릿속은 지금 두 가지 의문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자식 진짜 루인가?

아니면 로궤의 마법사들은 다들 루처럼 제멋대로인 건가?

“그 입으로 모리안 세레니예는 없는 존재라 하지 않았었나? 나도 유부남이 아니야. 젊고 순수한 미혼남이라면 모를까.”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농담인 걸까?

상대가 장단을 맞춰 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빌어먹을 중년 귀족 같으니라고.

“좀 살살 잡아. 털 빠지겠어.”

내가 짐승의 털을 더 세게 당길 동안, 그는 성을 둘러싼 초원을 지나쳐 작은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느티나무 근처를 맴돌던 짐승은 비석 아래를 힘차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순간 무언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음이 나더니 땅 아래 숨겨져 있던 비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로 들어가려고 변신한 거였어요?”

“바닥을 기어서 들어가는 백작님은 멋있지 않거든.”

그의 말대로 계단 입구는 몹시 작아서, 짐승 위에 올라탄 내가 상체를 바짝 낮춰야만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지하는 습하고 어두웠다. 세레니예 백작이 마법으로 촛불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어둠이었다.

‘지하 무덤인 건가.’

나는 고개를 쭉 빼, 먼지가 가득 쌓인 석판들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렸다.

사랑하는 누구누구, 존경하는 누구누구……. 전부 세레니예 일원이 잠들어 있는 관이었다.

“이 친구들도 살아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볼 거야.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소름 끼치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즐겁게 웃은 그는 나를 내려놓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털이 흠뻑 젖었던 게 무색하게도, 사람이 된 세레니예 백작은 물기 하나 없이 보송보송했다.

그는 가까운 관 쪽으로 다가가서 비석 위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이윽고 안에서 작은 진주를 꺼낸 후 내게 내밀었다.

아니, 그건 진주가 아니었다.

“한 가지 묻겠네. 이런 거 주워 먹은 적 없나? 아니면 누가 억지로 먹였다거나.”

“……심장 결정석이잖아요. 북대륙에나 볼 수 있는 물건인데, 제국인인 내가 어떻게 주워 먹는다는 거예요?”

“아마 먹었을 거야, 데이지 양은. 그렇지 않고서야 죽었다가 되살아날 수 없거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죽었다 살아난 사실까지 알고 있어?’

동시에 내 혼란이 한 번 더 가중되었다.

이 남자는 역시 루인 건가?

아니면 루의 충신? 아무리 봐도 루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목적이 대체 뭐지?

세레니예 백작은 조금 탁한 빛깔의 심장 결정석을 도로 상자에 되돌려 놓았다.

“나는 데이지 양이 칼레파쯤 되는 기인의 심장 결정석을 삼키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네. 그 시기에 결정으로 남아 있을 칼레파 급의 인물은 많지 않지. 당장 떠오르는 건 둘 정도로군.”

“누구인데요?”

“디안 케트와 메피스토.”

디안 케트가 로궤의 칼레파였다는 사실은 진작 전해 들은 사실이다. 하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나는 조금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마법사 메피스토가 로궤의 칼레파였다고요?”

“아니. 칼레파가 될 뻔했지. 그는 능력이 아주 출중했으니 말일세. 세기의 천재였고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인재였어.”

그 말과 함께 세레니예 백작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디안 케트가 로궤 출신이란 정보보다 이쪽이 더 납득이 쉽다.

메피스토의 이름 옆에는 ‘로궤에서 퇴출된’이라는 부속어가 붙기 때문이다.

잘못된 힘을 추구하여 북대륙에서 쫓겨난 자.

어그러진 자가 남대륙에 도달해 벌인 짓은 끔찍한 생체 실험과 마도 전쟁 발발…….

메피스토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고, 어째서 남대륙을 휘젓게 되었는지 대강의 퍼즐이 맞춰진 느낌이었다.

전쟁의 주범이란 사실이 무색하게도, 세간에 밝혀진 메피스토의 정보는 몹시 한정적이었으니까.

“메피스토의 군대뿐만 아니라 메피스토 본인도 로궤 출신이었군요.”

“그래, 로궤의 입장에서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최고의 흠이야. 메피스토의 스승이 살아 있었다면, 필시 그가 벌인 악행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거네. 메피스토의 스승은 그의 제자가 사람처럼 살 거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메피스토는 타고난 악인이었던 건가요?”

“타고난 악인이라.”

세레니예 백작이 가까운 비석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청소라도 하듯, 뒤쪽 관에 쌓인 먼지를 몇 번 가볍게 턴 그는 내게 되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나?”

그는 검지와 엄지에 묻은 새까만 먼지를 천천히 비벼서 털었다.

“그가 살아온 길. 그가 로궤에 입교하게 된 이유. 그의 강함의 원천. 그의 스승이 그를 선택한 근거. 차마 포기하지 못했던 서사. 그럼에도 그가 로궤를 나서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이유를 말일세.”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이야기.

누구도 듣지 못했을 그 비밀스러운 서두에 내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기실, 현대 역사에 대마법사 메피스토만큼 비밀에 휩싸인 인물이 없다.

누구도 그의 개인사를 모른다. 연극 따위에서도 메피스토는 단순히 마법에 영혼을 바친 미치광이로만 그려졌다.

사랑과 연민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괴물로.

하지만 나는 넌지시 던져진 메피스토의 이야기에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심이 들었다.

“아니요.”

그 악마를 사람으로 보게 될까 봐.

“내가 그자의 이야기를 들을 일은 평생 없을 거예요. 내게 있어 메피스토는 끔찍한 학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현명하군. 그래, 메피스토는 학살자다. 그가 겪은 불운이 그가 행한 악행을 변호할 수 없어. 그러니 메피스토 같은 악인은 타고난 악인이 되어야만 한다네. 진실과 무관하게 말이지.”

부드럽게 웃은 세레니예 백작이 대뜸 날 향해 말했다.

“손.”

뭐야, 그건. 내가 개야?

일단 손을 줬다. 그러자 그가 내 손 위에 심장 결정석을 얹었다.

“지하 무덤에 방문한 기념 심장. 가지게나. 로궤에서 심장 결정석은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친우에게만 전달하지.”

“이걸 준다고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심장을?”

“이름은 어디 보자…… 다프네 세레니예로군. 어떤 여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필요 없어요. 본인 심장도 아니잖아요.”

“아. 내 심장이 필요해? 저돌적인데?”

그의 장난스럽다 못해 뻔뻔한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메피스토 때문에 한동안 불쾌하게 펄떡이던 심장이, 간질간질 요동치기 시작한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확신하고 말았다.

아니,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외간 남자에게 이렇게 쉽게 손을 주다니. 놀랐어.”

“……당신, 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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