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기다렸다는 듯이 레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으.”
물 좀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 안과 입술이 바짝 말라서 쉰 호흡만 기어 나왔다. 눈치 빠른 레냐가 물 한 잔을 먹여 주고 나서야 살 만해졌다.
“여기는 어디야?”
“주, 주인님의 집이에요. 이틀 꼬박 기절해 계셨어요.”
아.
그래.
‘기절……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나는 방금 심신일체 두 번째 벽을 넘었다.
첫 번째 벽을 넘었을 때와 동일한 점은, 이전에 비해 수명이 3년 정도 더 늘어났다는 것.
이제 내게 주어진 수명은 이제 도합 10년이었다. 세상에, 3년의 시한부에서 10년의 시한부라니?
이 정도면 인생 역전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상하지. 이전처럼 몸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다니.
‘오히려 바위에 깔린 것처럼 불편해.’
사지가 욱신욱신했고 때로는 저리기까지 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니, 머리 위에 투명한 액체가 든 유리병이 보였다.
‘수액을 맞고 있었구나.’
그런데 왜 수액을?
‘맞아, 나 양쪽 어깨를 다쳤지.’
깨닫기 무섭게 어깨를 확인했다. 다행히 절단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고 두 쪽 다 온전히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다쳤었더라?
‘한쪽 어깨는 가로쉬한테 뚫리고, 나머지 어깨는 내가 뚫고.’
……가로쉬? 가로쉬가 누구였지.
순간 섬광 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맞아, 안데르트!
내 동생!
“윽.”
상체를 벌떡 일으키려 했지만, 급격한 어지러움을 못 이기고 다시 뒤로 쓰러졌다.
물잔을 정리하던 레냐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앗. 누워 계세요! 피를 말도 안 되게 많이 흘리셨어요. 정말 죽지 않으신 게 용하다구요. 저, 저는 저의 괜한 부탁 때문에 데이지 님이 도, 돌아가시는 줄 알고…….”
“나를 데려온 게 누구야?”
“예? 카, 칼레파께서 데려오셨어요.”
그랬구나.
‘하아.’
다행이다. 루가 결국 날 찾아낸 거야.
‘잠깐. 그럼 안데르트는?’
루가 날 데려왔다는 건 필시 안데르트와 마주쳤다는 뜻일 텐데.
안데르트는 어디로 간 거지?
“느낌이 어때?”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인 루는 테이블에 앉아 여유롭게 신문을 읽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반짝거리는 낯짝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 없었다. 이런 안도감은 라파엘로에게나 느껴 본 감정인데…….
“이런. 결국 반하고 만 건가? 쯧. 조심하라고 그렇게 경고했거늘.”
이제는 저런 헛소리를 들어도 짜증 나지 않는다. 나는 누운 상태로 진심을 다해서 고개만 까딱였다.
“고마워, 루 씨. 덕분에 살았어.”
루는 다시 신문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번에도 내게 빚을 진 우리 데이지 양. 언제 다 갚으려나 몰라.”
그런데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웃음이 평소와 달리 다소 싸늘한 듯하다.
아니, 확실했다. 평소의 능청스러움이나 장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나처럼 대놓고 비웃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뭔가 실수했나?’
찝찝한데.
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
“루 씨. 안데르트는? 아니, 가로쉬. 아니, 그러니까 얼굴에 긴 흉터가 있는 남자. 나랑 싸우던 남자는 어디로 갔어?”
눈을 마주친 그가 무던히 대답했다.
“죽였는데.”
“……뭐?”
누구를, 어떻게 했다고?
순간 눈앞이 검게 침전했다. 지금 루가 내 동생 안데르트는 죽였다는 말인가?
루가, 내 동생을?
“농담.”
“……머?”
주먹을 휘두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
물론 곧장 뒤로 고꾸라졌지만.
“으아아, 데이지 님! 제, 제가 누워 계시라고 했잖아요! 상처가 터진다고요. 자꾸 이러시면 아, 안 돌봐 드릴 거예요!”
“미안.”
레냐가 뽑힐락 말락 하는 수액 바늘을 다시 꼽았다.
그 꼴을 보며 재수 없게 웃던 루가 진정하라는 듯 진실을 고했다.
“가로쉬이자 안데르트인 남자라면, 네가 심신일체 두 번째 문을 여는 과정을 실컷 구경하다 떠났지. 엄연히 주인이 있는 개였으니까. 물론.”
루는 테이블 위의 낡은 수첩 하나를 집고선 살살 흔들었다.
“디안의 일기장은 여기 있지만. 수고했어, 데이지 양. 그토록 바라던 디안 케트의 유물을 손에 넣었군.”
디안 케트의 일기장!
나는 가볍게 날아오는 일기장을 손으로…… 아니, 어깨 때문에 움직이질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입으로 받았다.
짝짝짝.
“옳지. 잘했어, 데이지!”
애완견 취급하는 루를 무시하고 쿰쿰한 종이책에 뺨을 비볐다.
아아, 내 영혼을 살려 줄 소중한 유물…….
‘이 자식 때문에 골로 갈 뻔했는데.’
곱게 얻어서 다행일세, 다행이야.
그러나 나는 일기장보다는 안데르트가 무사히 돌아갔다는 사실에 더 안도했다.
비록 그에게 도움을 청하긴 했어도……. 루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나도 쉬이 예측하기 힘들었으니까.
안데르트가 살아 있다.
‘살아 있기만 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살아 있는 안데르트를 만나다니.’
안데르트는 죽었다.
그가 올라타 있던 군함은 메피스토의 군대에게 격추당해 바다에 가라앉았고, 수십 일 동안 근방을 살폈지만 결국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언젠가 안데르트에게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을 날이 올까?
아니, 그런 끔찍한 기억은 되새기지 않아도 좋다. 그냥 우리 어린 시절만 기억할 수 있다면…….
‘…….’
기억해도 되는 걸까?
죽음에서 부활한 후, 나는 고작 한 계절을 보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느낀 바는 많다. 변한 것도 많았고 깨달은 것도 많았다.
그러나 여태껏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고르라고 하면 단연코 마도 전쟁이라 외칠 것이다.
전쟁은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놨다. 지독하게 피폐한 생의 결말을 맞이하게 했으며, 종전 후에도 환각와 환청을 겪을 만큼 선명한 공포를 뼈에 새겨 놨다.
‘안데르트가 기억을 되찾는다는 건 전시에 느낀 공포를 되찾는다는 건데.’
그딴 흉측한 경험을 굳이 되찾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억나게 한다.’
어떻게든 나게 한다.
안데르트가 죽은 줄 알고 정신이 나가 개고생한 시간이 어언 10년.
나는 가족도 잊은 패륜아에게 이 10년의 고통을 꼬옥 보상받을 것이다.
반드시 보상받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누나’니까.
새로운 목표를 설립하고 마음을 다잡은 순간. 부담스러운 낯짝이 대뜸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그래서. 느낌은?”
“……느낌?”
“몸. 어떠냐고 두 번 물은 것 같은데.”
느낌을 묻는 거랑 몸이 어떠냐고 묻는 거랑 같나.
나는 머리로 루의 가슴을 밀어 낸 후, 몸 상태를 다시 돌아봤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문제점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변함없이 너덜너덜하기만 했다.
“아프기는 해도 나쁘지 않아.”
“아하. 나쁘지는 않다니 그거참 다행이야.”
비꼬는 듯 아닌 듯 속삭인 루가 수액 유리병을 열어 붉은색 가루를 털어 넣었다.
가루 봉투에 <위급용, 수면, 진통, 소염>이라고 적힌 걸 봐선 레냐가 따로 구해 온 약인 듯했다.
봉투를 곱게 접어 테이블 위로 내던진 그는 한참 동안이나 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한참 만에 입술을 뗐다.
“데이지 양.”
“응.”
“살고 싶다고 말해 봐.”
뜬금없이?
“왜?”
“해 봐.”
“……살고 싶어?”
타닥. 약 봉투를 검게 태워 없앤 루가 메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간절함이 전혀 와닿지 않네.”
“내가 연극배우도 아니고, 대뜸 요구하는데 어떻게 간절함을 담아?”
“연극배우? 따지자면 데이지 양은 그들보다 더 간절해야 하지 않나.”
무슨 뜻일까.
나는 잠시간 아무 말 없이 루를 쳐다봤다. 역시 평소보다 더 이상하다.
이상한 루가 따분함이 깃든 목소리로 지나가듯 읊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 간절함을 이루어 줄지도 모르지.”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왜 그래?”
“늙은 칼레파는 원래 다 제멋대로 굴어.”
“나한테 루 씨는 칼레파 같은 게 아니라, 감자그라탱을 맛있게 만드는 요리사 겸 정원사인데.”
픽 웃은 그가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자리했다.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루는 재차 물었다.
“데이지 양. 살고 싶어?”
그때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짧은 문답이 나와 그의 관계에 전에 없던 전환점이 되리란 사실을.
나는 긴 강과 폭포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심해에서 건져 올린 나의 우울한 검도.
“응. 나는 살고 싶어.”
“진심으로?”
“진심으로.”
“좋아……. 방금은 꽤 그럴싸한 간절함이 느껴졌어. 그 정도면 충분해. 하지만 데이지 양.”
루가 내 팔을 쥐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팔이 안쪽으로 뒤집혀졌다. 하얀 피부에는 세 개의 상흔이 가지런히 그려져 있었다.
맹세의 흔적.
“그건 우리 약속과 다르지 않나?”
“……약속? 무슨 약속?”
나는 맹세의 흔적을 내려다봤다.
세 번째는 하녀장과 나눈 맹세. 두 번째는 검성과 나눈 맹세.
두 맹세는 마치 어제 나눈 것처럼 눈앞에 생생했다.
한데 무언가 이상하다.
‘첫 번째 맹세는 누구와 나눈 맹세였지?’
…….
어라.
…….
왜 기억나지 않는 거야?
“데이지.”
루의 가지런한 손톱이 첫 번째 맹세를 꾸욱 내리눌렀다.
나는 그를 쳐다봤다.
“간절하다면 떠올려.”
무엇을?
더 이상의 문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수면욕이 머리를 덮치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