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하지만 이보다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머리 쓰느라 뒷골 당겨 죽겠는데. 단기간 안에 낸 계책 중에선 나름 최선의 수이지 않을까?
하녀 따위가 ‘그냥 오케이 하시죠.’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웨더우즈 가문에 인력이 부족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래, 나는 최선을 다했어.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라고, 나는 오늘도 자기 위로했다.
침묵의 소용돌이 가운데 유일하게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린 루가 내 턱을 살살 쓸며 칭찬했다.
“어머, 그랬니? 하긴 검사면 체력도 좋겠구나? 우쭈쭈. 똑똑해요, 우리 데이지.”
역시 내 편은 루밖에 없다. 월월!
“답이 나왔네요. 남편에게 당장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인 만큼, 공작님의 요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 곧장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점, 명심해야 할 거예요. 이해해 주시겠죠?”
검성이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전쟁을 거쳐 온 소드 마스터답게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데 익숙한 눈이었다.
“물론입니다.”
설마 내가 웨더우즈 자작인 걸 알아차린 걸까?
논리적으로 그럴 확률은 현저히 낮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딱 내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직전까지 나누셨던 대화에 제가 한 말씀 올리자면. 제국 남부 군도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황제 폐하께서 라파엘로 공작에게 일임하신 지 오래입니다. 국가 기밀과 밀접하게 관련된 지역의 문제라, 불복종 시 국가 보안법 위반 및 반역죄로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못 들은 척했으면서 사실은 다 듣고 있었네.
하긴 4년 전에도 검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꽤 능청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반역죄는…….’
이 한 몸 바쳐 대마법사 메피스토와 그의 군대를 일망타진했더니. 돌아오는 거라곤 반역죄다.
내가 초래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기운이 조금 빠졌다.
내 얼굴을 본 루가 고개를 내저으며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내뱉었다.
“펜 로타 제국의 법은 참 호전적이라니까…… 흐음. 뭐, 좋아요. 제나일 공작? 공작의 요구에 응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사에는 우리 데이지가 아니라, 내 남편이 응하게 해 주세요.”
뭐?
‘그래도 돼?’
라파엘로의 눈이 좁혀지자, 루는 저답지 않게 긴 설명을 덧붙였다.
“괜한 오해 마세요. 내 남편을 데이지의 대리자로 나서게 해 달라는 뜻이니까. 데이지는 우리 가문의 비화를 전부 알고 있는 아이예요. 어떤 말실수를 할지 몰라 두려우니, 일차적으로 내 남편에게 데이지를 조사시킨 후 공작에게 보내겠습니다. 내 남편을 조사하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그때 데이지를 데려가세요. 동의하시나요?”
꽤 그럴싸한 시간 끌기였다.
표면적으로 루는 조사에 불복종하고 있지 않았다.
추가 요청 시 내 신변을 맡기겠다고도 했으니, 따지고 보면 시간 늦추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제는 라파엘로가 그 제안에 응하느냐는 것인데.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이제라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저로서도 다행입니다. 다만.”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긴 라파엘로가 경고하듯 뒷말을 이었다.
“부디 이 이해관계가 끝까지 유지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이후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라파엘로는 백색 제복을 입은 기사들에게서 짧은 보고를 전해 들은 후 저택 뒤편으로 사라졌다.
‘흐음. 이렇게 쉽게 수락할 줄은 몰랐는데.’
수년 만에 귀족회에 참석한 웨더우즈 가문을 위해 편의를 봐준 걸 수도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다정하지 못한 건 그대로라니까.’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검성이 우리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큰 문제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웨더우즈 부인. 라파엘로 공작은 보기보다 그렇게 까다로운 편이 아닙니다. 조사도 분명 빠르게 끝날 테지요. 자, 괜찮으시다면 부인과 예거시 군, 볼크윈 군 모두 제가 대피소로 모시겠습니다.”
루를 곁으로 이끈 검성이 앞서 걸음을 옮겼다. 그레이의 이름이 운운되는 걸 봐선 그레이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신상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장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귀족들도 승무원들의 안내를 따라서 별관으로 이동했다.
“웨더우즈 부인께서 아가씨를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내 곁으로 다가온 예거시가 작게 속삭였다.
“놀랐습니다. 적극적으로 제나일 공작님 앞을 막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 뭡니까?”
볼크윈도 나를 보며 웃었다.
“부부는 한 쌍이라지요. 부인께서 먼 고향에서 펜 로타까지 와, 그레이를 선택한 이유가 온몸으로 느껴지더군요.”
둘의 태도는 하녀인 내 앞에서도 변함없이 신사적이었다.
함부로 하대하지 않고 서글서글한 태도를 보이니, 나로서도 구태여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운이 좋았음.”
“하하, 운이 아닙니다. 웨더우즈는 귀족회의 일원이니,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결과였죠.”
짧은 대답이었으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웨더우즈가 만약 귀족회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라파엘로의 동의를 받아 대리인을 출석시킬 수 없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가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애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인 이유가 귀족회의 특권과 인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귀족회 소속 귀족들은 황법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크고 작은 특혜를 주고받고 있거든요. 적어도 양지에서는요.”
그래서 루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거구나.
우리는 별관의 지하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활짝 열린 대형 철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 대피소였다.
“생각보다 크군요.”
대피소는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꽉 막힌 지하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하답지 않게 내부가 잘 꾸며져 있는 데다, 밝고 쾌적한 편이라 대피소보다는 홀 느낌이 강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편히 쉬고 계십시오. 의자는 충분합니다.”
“고마워요. 데이지? 이리 오련.”
이게 바로 귀부인의 소형견이 된 기분인 건가.
나는 루 옆자리에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다 됐고 이제 집에 돌아가고 싶다.
얼마 후.
듣기 싫은 굉음과 함께 대피소의 철문이 닫혔다.
정제석으로 작동하는 등불이 부족함 없이 배치되어 있는 덕분에 내부는 낮처럼 밝았다.
흑백의 제복을 걸친 기사들이 보호하듯 문 앞을 지키고 선 상황에서, 대피소 내 가장 높은 단상 위로 검성이 올라섰다.
검성의 차분한 음성은 그리 큰 목청이 아니었음에도 우리의 귀에 쏙쏙 들어박혔다.
“귀빈 여러분. 가장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새벽, 이리겔 별장에 열두 명의 신원 미상 마법사가 침입하였습니다. 그들은 대형 정신 마법 트랩을 설치해 별장 내 혼란을 야기했으며, 최소 하루 전부터 준비해 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저런. 대체 누가…….”
지하여서 그런지, 크고 작게 웅성거리는 소음이 실내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검성은 사람들이 실컷 떠들게 놔둔 후 재차 입술을 뗐다.
“많이 놀라셨겠지만 한시름 놓으셔도 됩니다. 침입자 전원 생포에 성공했습니다. 현재 별장 내 추가 트랩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 각 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럼 남은 일정은 취소되지 않는 겁니까?”
“아니요, 전면 취소입니다. 7시간 내로 라갈에서 지원병이 도착하고, 저녁 8시쯤 이리겔을 떠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신 마법 트랩으로 인한 치료는 순차적으로 진행될 겁니다.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사위는 조용했다.
지하 내 그 누구도 불안감을 표출하며 난동을 부리거나, 검성을 손가락질하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외려 검성이 자신들을 지켜 주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를 향한 제국민의 신뢰가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었다.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발 벗고 나서서 사람들을 안심시키면…… 믿을 수밖에 없겠지.’
한창 작은 소음이 오가던 내부는 일정 시간이 흐르자 소강상태가 되었다.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새벽 내내 정신 마법 트랩에 시달리면서 공포와 불안감에 덜덜 떨어 온 이들이었다. 반나절 만에 찾아온 평화에 하나둘 긴장을 풀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쿠우웅.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그 너머에서 튀어나온 남성이 검성에게 다가가 고개를 낮추었다.
“각하. 잠시…….”
무슨 소식이려나. 나는 두 귀를 쫑긋 열었다.
다른 사람들도 어떤 새 소식이 도착했는지 궁금한 얼굴로 목을 길게 뺀 채 쳐다봤다.
그러나 두 남자의 속닥거림을 들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을 것이다. 부럽지?
“낯선 비행선이 정박을 요청해 왔습니다. 소유주 및 어떤 표식도 확인할 수 없는 상태라, 일단 정박을 거부했습니다.”
“낯선 비행선이라고? 라파엘로 공작의 비행선은 아닌 건가?”
“예, 여쭈어봤지만 모르는 물체라고 답하셨습니다.”
검성과 남자가 대피소를 나가려 할 때였다. 옆자리에서 일어선 루가 나를 이끌고 아주 당당하게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당황한 남자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부인.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대피소에서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으신 거라면 말씀을…….”
“필요한 물건은 없고.”
사랑스러워야 하는 모리안의 본분을 잊고, 한껏 시큰둥한 얼굴을 한 루가 문 너머를 턱짓했다.
“내 비행선이 도착한 것 같아서. 슬슬 집에 돌아가려는데, 그것도 허락받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