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이게 지금 무슨 헛소리람.
‘너희가 나를 곱게 내보내 줬잖아?’
지금 내가 하녀라고 핍박하는 거냐. 응?
그러나 나는 분별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래 봬도 나에게는 머리라는 게 있다.
하녀가 공작에게 말대꾸……는 알 바 아니지만, 라파엘로와는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으니 최대한 말을 섞지 않을 생각이었다.
“흐음. 어쩐다. 데이지?”
하지만 늘 그래 왔듯 루는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하고 싶니? 이 주인님은 네가 원하는 대로 따르마.”
라파엘로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그런 라파엘로를 친히 노려봤다.
이 자식 은근히 마음에 안 드네.
10년 우정이 다 무슨 소용이랴. 하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은 쥐뿔도 안 되는데.
‘어쩐다.’
본래 나의 역할을 떠올리면, 대공작이신 라파엘로 각하 앞에서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며, 라파엘로의 말이 하늘의 말이고 그의 명령이 신의 명령인 것처럼 구는 게 맞았다.
하지만.
‘섬에서는 쉽게 내보내 줘 놓고, 갑자기 말을 바꿔서 조사에 응하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잖아?’
추측건대, 라파엘로는 내가 퀸 섬에 나타났다는 소식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가, 오늘의 만남으로 마음을 바꾼 듯했다.
그렇다면 선택의 갈림길이다.
어느 쪽이 웨더우즈 가문에서 하녀 생활을 유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될까?
<1. 조사에 응한다. 내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다가 죄인이 된다.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웨더우즈에서 쫓겨난다.>
최악이다. 다음은?
<2. 조사를 거부한다. 국가 차원의 웨더우즈 가문 조사가 착수된다. 디안 케트의 유물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빼앗긴다. 웨더우즈에서 쫓겨난다.>
만만치 않게 최악이야. 둘 다 탈락.
이렇게 되면 최후의 수단을 선택한다.
“주인님.”
나는 루의 옆에 바짝 서서,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저는 주인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하녀 데이지는 주인님의 순종적인 하녀니까요.”
싱긋 웃은 루가 장하다는 듯 내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싫다는 뜻이니?”
“주인님께서 바라신다면요.”
“그래, 내 하녀가 싫다는데 말아야지. 제나일 공작? 공작의 요청은 거절하겠습니다. 아, 혹시 거절하면 사형인가요?”
루의 거친 행동과 불안한 드셰로, 그걸 지켜보는 나.
루의 태도는 분명 무례하다.
재밌는 점은 그녀의 미모가 워낙 특출나서인지, 누구 하나 ‘당돌하다! 몰상식하다!’고 소리치는 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나를 향해 지은 안쓰러운 표정을 보고선 ‘고용인까지 생각하는 마음씨 좋은 귀부인’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외모가 다인 더러운 세상. 고맙습니다.
‘이 정도면 좋은 대책이었어.’
이로써, 하녀장이 내게 죄를 묻는다면 루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하녀의 마음을 아는 건 공작님이 아니라 같은 정원사라니까?
“라파엘로.”
한데 아뿔싸.
“문제라도 생겼나?”
초대되지 않은 손님이 한 명 더 끼어들 줄이야.
“아닙니다, 지하르크 공작님.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까?”
“대충은 그렇네.”
……이건, 좀.
‘많이 불편해졌는걸.’
적어도 지금은 라파엘로보다 검성이 더 위험하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루의 등 뒤로 숨었다.
검성은 이미 진으로부터 결투의 승패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웨더우즈 자작을 유심히 주목하는 상황에서 내 존재가 눈에 띄게 된다면.
그리하여 검성의 놀라운 육감과 통찰력이 나와 웨더우즈 자작 사이의 유사점을 찾게 된다면……. 일이 더 피곤해질 수 있었다.
라파엘로와 몇 마디 더 주고받던 검성이 루를 돌아봤다. 그는 라파엘로와 대비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웨더우즈 부인. 저는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입니다. 한데 그레이 웨더우즈 씨가 안 보이는군요.”
두 무인이 나란히 서니 전에 없던 무형의 압박감이 풍겨 오는 느낌이다.
한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은 거북함.
감이 예민한 이들은 하나둘 멀찍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물론 루에게는 포함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녀는 발랄하게 웃으며 검성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반가워요, 버클리그레이튼 공작님. 남편에게서 말씀 들었어요. 안타깝게도 그이는 요양하고 있답니다. 마법 트랩 때문에 크나큰 정신적 육체적 상해를 입었거든요.”
마찬가지로 꾸역꾸역 곁을 지키고 선 예거시가 의문을 갖고 물었다.
“방금 전 아가씨께선 진 양과의 결투에서 상처를 입었다고…….”
닥쳐.
나는 예거시의 허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진 그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가쁘게 호흡을 이었다.
‘약하게 쳤는데 엄살 부리기는.’
라파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이런. 자작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그와 결투에 관해서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쉽군요. 오늘 사태로 인해 자작에게 발생한 문제는 제가 꼭 보상하겠습니다.”
라파엘로가 의문 서린 눈으로 검성을 돌아봤다.
“결투?”
“……아, 공작도 몰랐겠군. 웨더우즈 자작의 검술 실력이 상당한 모양일세. 미드윈트리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친부을 떠올리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던 듯하군.”
“누구와 치른 결투이기에 그리 후하게 칭찬하십니까?”
“우리 진과 치렀다네.”
“……그 말은 진 양이.”
라파엘로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승패 결과를 굳이 입에 담아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두 귀를 쫑긋 세우던 예거시가 실망한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놈 반응이 이렇다는 건. 설마, 결투의 결과는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안 알려진 건가?’
진과의 결투가 조용히 마무리되는 건 나로서도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진이 패배를 부정하고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확실한 문제가 된다.
“아, 웨더우즈 부인. 진이 웨더우즈 자작 아래에서 검을 배워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던데. 들어 본 적 있으십니까?”
“……검?”
안 그래도 불편했던 자리가 10배는 더 불편해졌다.
‘갑자기 그 말은 왜 꺼내는 거지?’
진. 내가 입 다물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떠벌거리고 다닌 거야?
“웨더우즈 자작도 허락했다고 하더군요. 근시일 내 진을 댁에 보낼 예정입니다. 웨더우즈 자작을 스승으로 둔다면 진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지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언제 허락했어?
안 그래도 미치도록 불편했던 자리가 100배는 더 불편해졌다.
나는 평정심을 찾기 위해 천천히 침을 삼켰다.
‘이 빌어먹을 구라쟁이를 봤나.’
누가 거짓말 치는 거지? 진이? 아니면 검성?
‘아니, 진은 거짓말 칠 인물은 못 돼.’
하지만 내가 아는 검성 또한 이런 식으로 다 들킬 거짓말을 칠 위인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는데…….
‘그는 지금 웨더우즈 가문을 노리고 있어.’
목표는 디안 케트의 유물. 그러니 진이 아닌 검성 쪽에서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어냈을 확률이 높았다.
‘계획을 바꾼 건가. 웨더우즈의 몰살보다는, 진을 웨더우즈 저택에 들여보내서 자신의 눈으로 만들려는 속셈이겠지.’
이거 어쩐다. 생각지도 못한 덫에 걸리고 말았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루가 이내 곧 작은 비소를 터트렸다.
“아, 제자.”
아니야, 나를 쳐다보지 마. 내 얼굴을 보면서 진위를 파악하면 안 돼. 저 두 괴물은 눈치가 귀재라고. 분명 의심할 거야.
“그런 말은 처음 듣네요. 남편은 그 어떤 사소한 이야기도 제게 들려주는 편인데 말이죠.”
다행히 루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고민이네. 정말 어찌해야 하나아.”
정말 어쩌지?
한시 빨리 이 난관을 헤쳐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라이 루가 더 큰 사건을 일으키고 말 거야.
어떻게 해야 진을 제자로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지. 따지고 보면 데려가서 나쁠 것도 없지 않나?’
첫 번째, 검성의 음습한 계획과 관련해서.
진이 마도구도 아니고. 그녀가 알아낸 사실이 검성에게까지 도달하려면 서신 같은 통신 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진을 가문에 받아들여도, 검성과의 소통 수단만 차단하면 문제없지 않을까?’
두 번째. 집사 암살자의 요청과 관하여.
집사 암살자가 원하는 바는 ‘<클론>의 길드 마스터가 바뀌면서 길드 내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더 궁극적으로는 <클론>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
‘둘을 만나게 해서 적당히 합의 보게 하면 되지 않을까?’
세 번째. 하녀장의 허락과 관하여.
‘무급 하녀를 한 명 데려가면 오히려 기뻐할 거야.’
이거……. 정말 나쁘지 않을지도?
“어찌, 해야, 할까나.”
크흠. 흠.
결정했으니 행동하자.
진을 받아들이자는 내 의사를 전혀 수상하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전달해야 했다.
“주인님.”
“응?”
“마침 저택에 청소 인력이 부족합니다.”
일대는 한순간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