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95)

40화

“투신 소동.”

“투신……이라고?”

“그래. 녀석은 수업에 참석하는 대신 교수에게 편지를 한 장 보냈다고 해. <지금 나는 이 성 최상층에 있고, 떨어질 예정이다. 모두 너희 탓이다>라고.”

볼크윈이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미쳤군.”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하지만 내 친구는 그 정도의 미친 짓으로 멈추지 않았어. 원래 뭐든 후속 조치가 더 중요한 법이거든.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끈 직후. 녀석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맹견을 대동했다고 해.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만큼 공격적인 맹견을 말이야. 덕분에 그녀는 <더 미치기 전에 건들지 말고 홀로 내버려 두어라>라는 아버지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고, 형제들로부터 자유로워졌지.”

“……그 이야기. 어디선가 들어 본 느낌인데. 설마?”

“맞아. 나타샤 황녀의 일화야.”

너도 아는구나? 하기야 나타샤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황족도 드무니까.

어리숙하고 순박한 황녀였던 나타샤는 그 사건을 기준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힘을 갖기 위해 마법 공부에 매진했고, 마도 연합군에 입대해 전투 마법사로서의 명성과 지휘관으로서의 입지를 톡톡히 다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형제들을 물리치고 그녀 스스로 황태녀의 자리를 얻어 내기까지 했지. 아쉽게도 황위까지는 못 닿았던 것 같지만.

볼크윈은 허무한 웃음을 터트렸다.

“한마디로 미친 사람이 되라는 말이구나.”

“하지만 볼크윈. 그 정도의 미친 짓이 아니면 주변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 그 녀석도 마찬가지야. 만약 자신의 체면을 불사하고 그런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형제들에게 단물만 쪽쪽 빨린 후 버려진 신세가 되지 않았겠어?”

“미쳐야 바뀔 수 있다라…….”

볼크윈은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이마를 쓸었다.

“하하. 확실히 나는 미친 사람은 아니었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어. ……조언 고맙다, 예거시.”

“예거시?”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예거시로 보여?”

“응? 그야 당연하지. 너는 예거시니까.”

‘출구’는 타깃의 정신적 혼란을 중재하고, 회복시키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깃에게 안정감을 부여하는 존재의 모습을 본떠서 나타나곤 한다.

아무래도, 볼크윈이 역린을 이겨 내는 ‘출구’는 예거시인 것 같았다. 친구로서의 예거시의 존재가 그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나 보다.

“눈이 삔 녀석. 아무리 봐도 내 미모가 압승인데.”

출구를 발견한 볼크윈의 형체가 서서히 흐릿해진다. 트랩을 벗어난 것이다.

나는 한 줌의 별빛이 된 볼크윈을 지나쳐서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다 좋은데 내 출구는 어디 있는 거야?’

보통 트랩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 트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출구가 옆을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내 경우에는 트랩에 걸릴 때마다 항상 어린 모습의 내가 따라다녔다. 작고 어리숙한 꼬마 시절의 내가.

‘그런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는 거지?’

그때였다.

저 멀리서 반짝이는 금발의 남성이 급히 뛰어오는 게 보였다.

누구인가 싶었는데, 예거시였다.

‘뭐야. 설마 자의로 환각을 푼 건가?’

그건 곤란한데.

내 목표는 예거시의 정보다. 예거시가 환각에 시달려야 내가 원하는 정보도 캘 수…….

“아버지! 교수님이 오늘 우리 집을 방문하신다면서요?”

나는 내 옆에 멈춰 선 예거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설레는 표정으로 제 앞에 선 중년의 남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환각을 푼 게 아니었구나.’

환각을 향해 달려오던 거였어.

예거시의 환각이자 그의 친부이기도 한 남성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 부탁을 받아들여 주신 건가요? 그렇다면 일정은요? 교수님이 제 유학 선생님이 된 만큼, 일정도 다시 손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 교수는 네 유학에 따라가지 않을 거다. 이곳에 남아 네 형의 수업을 도울 거야.]

예거시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형님이 그 교수님의 수업을 받고 싶다고 하셨나요?”

[그건 아니다. 경력을 보니 네 형 수업에 더 큰 도움을 줄 것 같아서 내가 그리 결정했다.]

“하지만 그 교수님은 제가 초빙한 분이지 않습니까?”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네 형은 가업을 이을 장남이지 않느냐? 누가 초빙했든 동생인 네가 양보해야지.]

“아버지. 저는 그분의 논문을 다 찾아봤습니다. 북대륙연합교국에서 꼭 연구하고 싶은 분야가 있는데, 그 교수님이 제격…….”

[그만! 토 달지 말거라. 지금 내가 정한 네 형의 교수를 빼앗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예거시의 역린은 장남인 형에게 밀리는 차남 신세인 건가.

실망하다 못해 넋이 나간 예거시의 표정이 여러모로 안쓰러웠다.

나는 일단 그의 아빠를 후려쳤다.

“죄송.”

놀란 예거시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봐, 예거시. 좋은 걸 형한테 자꾸 빼앗기니까 화나지?”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솔직한 심정이야 그렇지.”

“안 빼앗기는 법을 알려 줄까?”

“들어는 볼게.”

“투신 소동을 일으키면 돼.”

예거시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농담이냐? 하나도 재미없다, 인마.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나는 아버지와 조금 부딪힐 뿐,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해. 투신 같은 미친 짓 할 생각 없어.”

“아니, 하라는 게 아니라 소동만 일으키라는 거잖아.”

“그러다 아버지가 충격받고 쓰러지시면? 그런 끔찍한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어. 다시는 입에 담지 말라고, 친구.”

음, 이 방법은 아닌가.

‘예거시는 그런 취급을 받고도 가족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는군.’

가족의 형태를 너무 단편적으로 해석하려 들면 이런 실수를 하고 만다니까.

덕분에 내가 일으킨 균열은 빠르게 회복됐다.

이러다간 부작용으로 더 강력한 환각에 붙들리고 말 것이다. 방금 균열보다 더 큰 균열을 일으켜야만 했다.

‘예거시를 동요시킬 수 있는 요소가 뭐가 있을까?’

예거시가 중요시하는 것.

예거시 하면 떠오르는 것.

바로, 정보.

‘이 녀석, 정보를 꽤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지.’

신문사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몹시 유연했다.

정보란 사교 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되는 도구. 예거시는 정보를 이용해서 아버지의 독단과 형의 그늘을 탈피하려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거시의 역린은 정보를 이용해서 깨뜨릴 수 있겠어.’

역린을 깨뜨리는 법은 간단하다.

역린이란 간단히 말하면 스스로 떨쳐 내기 어려운, 뼈에 박힌 상처이자 트라우마이다.

이 상처를 잊게 할 만큼 강력하면서 긍정적인 요소를 떠올리게 하면 타깃의 역린은 깨진다.

따라서 상대를 잘 알수록 역린 역시 쉽게 깨뜨릴 수 있었다.

이는 반대로 상대에 대해 무지하면 절대 깨뜨릴 수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예거시의 역린이 형에게 빼앗겨야 하는 관심과 기회라면.’

정보는 예거시 본인이 주도적으로 휘두를 수 있고, 한발 앞서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하는 ‘기회’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예거시를 홀려 역린에서 관심을 돌리게 할 정보라.

“예거시, 그거 알아?”

“…….”

“웨더우즈 자작이 진 버클리그레이튼과의 결투에서 승리했대.”

“…….”

“승리한 대가로 진 버클리그레이튼을 노예로 만들었다는데? 죽을 때까지 저택 지하에서 가둬 놓고 이불 빨래만 시킬 거래.”

진짜라고는 안 했다.

우울했던 예거시의 안색이 단번에 환해졌다.

“뭐? 그게 사실이야?”

그는 총기가 엿보이는 눈으로 내 어깨를 흔들었다. 역시 맞았네. 쉬운 녀석 같으니라고.

“어디서 그 소식들 들은 거야, 볼크윈? 그레이, 그 자식. 처음부터 심상치 않아 보였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

볼크윈이라.

네 출구는 볼크윈이었구나, 예거시.

‘한쪽은 장남이란 점이 역린이고, 한쪽은 장남이 못 된다는 점이 역린인데.’

정반대의 길을 걷는 둘이서, 서로가 서로의 위안이 되어 주는 건가? 역시 사람의 정신세계는 심오하다니까.

‘하지만 심오한 건 심오한 거고.’

예거시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를 도운 값은 받아야겠다.

“디안 케트의 유물을 찾고 있는 위험한 자들. 누구야?”

환각이란, 상대의 비밀을 캐내는 가장 훌륭한 정신 마법.

환각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역린을 깨 준 ‘출구’ 앞에서 가장 무방비하다.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비밀을 밝혔다. 지금처럼.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이건 예상한 상대다.

“그리고?”

예거시는 살짝 몽롱한 눈으로 대답했다.

“북대륙연합교국의…… 로궤.”

로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로궤가 뭔데?”

“너…… 로궤도 몰라? 그럴 리가 없는데. 볼크윈이 로궤도 모르는 천하의 천치라고?”

미안하다, 로궤도 모르는 천하의 천치라서.

‘하여간 눈치 빠른 놈. 날 출구로 인지하는 상태에서도 의심하다니.’

하지만 덕분에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로궤가 뭔지는 몰라도 루와 관련되어 있을 게 분명해.’

루가 도둑질한 모리안의 신분도 북대륙연합교국의 신분이니까. 로궤라는 것까지 나왔으니, 대충 둘에 대해 파헤쳐 보면 되겠지.

“고마워, 친구.”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린 후 등을 돌렸다. 그때 예거시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하나 더 남았어.”

고개를 돌린 순간, 희미한 별빛이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제나일 공작.”

……제나일 가문이라면, 분명.

‘라파엘로 제나일 펜 로타’

라파엘로가 디안 케트의 유물을 찾고 있다.

‘이건 좀 반갑지 않은 정보인데.’

언젠가 그와 부딪힐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나는 다시 어둠 속으로 걸음을 이었다.

[멈춰! 어디로 가는 거야? 나를 살려 줘, 안데르트…….]

[안데르트! 이 혼자 살아남으려는 배신자! 네놈도 곧 우리처럼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주변을 살필 여유는 없었다. 정확히는 라파엘로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머릿속이 그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디안 케트의 유물이 필요하다는 건 쉬이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건데.’

설마 그도 나처럼 시한부인 건가? 생각지 못했던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어느 시점에.

누군가 내 손을 잡아 멈추었다.

“한참 찾았네.”

이어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정확히는 고개를 내렸다. 묘하게 낯설면서 익숙한 얼굴을 한 마른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등을 덮는 긴 갈색 머리. 살짝 처진 눈꼬리. 연두색 눈동자. 작은 몸. 하얀 얼굴.

소녀는 바로, 어린 시절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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