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나는 괜히 밤늦게까지 놀다 걸린 아이가 된 기분으로 루를 설득했다.
“금방 살펴보고 올게.”
“나는 분명 쉬라고 했어, 자기야. 불안한 마음은 이해해. 연약한 인간은 심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까. 그런데 자기는 내가 틀린 말 하는 거 봤어?”
“…….”
“못 봤지? 그러니까 곱게 잠이나 자. 첫날 이후에 거의 못 잤잖아. 그 꼴로 버티다가는 또 악몽을 꾸고 환각을 볼 거야. 육체가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지거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알겠으니까 그 모습으로는 제발 끔찍한 호칭을 입에 담지 말아 줘.”
“당신 하는 거 보고.”
그리 말한 루가 가방 틈에서 새로운 책을 한 권 꺼냈다. <숙련된 요리사를 위한 펜 로타 제국 고급 요리 100선>이었다.
나는 루가 독서에 집중하는 얼굴을 구경하다가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좀 불안했던 건가.’
루는.
분명 수상한 사람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신뢰가 가는 몇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검성 역시 테러가 일어났을 때 호락호락하게 당할 무인이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내가 나서는 건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었다.
모르는 척 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지나갈 일…….
……언제부턴가 길게 잠에 들었던 것 같다.
“하아암.”
아, 잘 자도 너무 잘 잤네.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창문 앞에 섰다.
산중에 자리한 별장이니 아침 새가 지지배배 울겠지? 하는 기대와 함께 커튼을 걷었지만.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호수고 은하수고 뭐고. 세상은 마치 심해에 잠긴 듯 어둡고 고요했다. 더불어 어딘지 모르게 세상이 흐릿하고 몽롱해진 듯한 이 기분.
“으음. 대형 정신 마법 트랩인 건가?”
정신 마법 트랩이라. 오랜만인걸.
‘전쟁터에서 종종 걸렸었지.’
마도 전쟁 때는 대마법사 메피스토를 신봉하는 마법사가 적잖이 존재했다.
그들은 자신을 메피스토의 사제라 칭하며, 연합군의 행보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곤 했다. 그중 한 방식이 바로 정신 마법 트랩이었다.
정신 마법 트랩이란, 간단히 설명하자면 특정 공간에 들어선 이를 환각에 빠뜨리는 마법이다.
시전자 수가 늘어날수록 마법의 시전 범위와 밀도가 높아져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보통은 여섯 명이 한 팀을 짜기 마련인데.
‘열둘이면 그 두 배.’
아주 골치 아파졌다. 암살자가 트랩에 걸려든 귀족들을 인질 삼는다면 제아무리 검성이라 할지라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루는…… 안 보여. 트랩을 해체하러 간 건가?’
우리의 침실은 그의 안배로 트랩에서 자유로운 상태인 듯했다. 트랩 특유의 답답하고 몽롱한 공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선 틀림없었다.
이곳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면 언젠가 별장 안의 트랩이 풀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오히려 내게는 기회다.
‘환각에 빠지면 정신력이 약해져.’
때문에 군부에서는 암암리에 정신 마법으로 스파이를 고문하곤 했다. 정신 마법으로 나약해진 상대는 비교적 쉽게 기밀을 발설하기 때문이다.
‘트랩에 입장해서 사람들도 구하고, 디안 케트에 대한 정보도 캐내고.’
이것이 바로 일석이조. 좋아, 할 일이 결정됐다. 그렇다면 일단.
“씻자.”
그대로 욕실에 들어간 나는 부드러운 향이 감도는 온수로 몸을 꼼꼼하게 씻었다.
“사람들을 구하는 건 구하는 건데.”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구하느냐다.
경험상 대형 트랩 안에서는 별 희귀한 일이 다 벌어진다.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검을 들어야 할 수도 있었다.
선택 가능한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1. 웨더우즈 자작 모습을 유지할 경우.
저택으로 돌아가서 하녀장에게 오늘 일을 알린다.
하녀장이 자기 허락도 없이 웨더우즈 자작의 얼굴로 난동을 부렸다며 혼낸다. 나를 향한 하녀장의 신뢰가 대폭 하락한다.
운 나쁘게 검성과 마주치면 웨더우즈 자작과 안데르트 파거가 동일 인물로 의심받는다.
정체가 들통나고 괘씸죄로 잘린다.
돈을 못 벌어서 굶어 죽는다.>
‘으윽.’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하녀장은 웨더우즈 가문이 조용하고 평화롭기를 원한다. 하녀는 하녀장의 말에 상명하복 해야 했다.
그러니까 시끄러워지면 안 돼. 나는 다음 수를 떠올렸다.
<2.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경우.
저택으로 돌아가서 하녀장에게 오늘 일을 알린다.
하녀장이 살신성인한 내 노고를 치하한다. 하녀장과 나의 우정이 더욱 공고해진다.
어쩌면 내 급여가 더 오를 수도 있다.
나는 여자이고, 안데르트 파거는 남자라서 동일 인물로 의심받을 일이 없다.
위급한 일이 발생할 때에는 루의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면 되니 안전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겠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선택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하녀장과의 우정을 위해서!’
타월로 물기를 닦은 후 망설임 없이 결혼반지를 깨뜨렸다.
우드득, 뼈가 맞춰지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시야의 높이가 급속도로 낮아진다.
데이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내 소유의 단벌을 걸치고 있었다.
“역시 이 몸은 불편해.”
돌아온 몸에 적응하며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리고 예상대로, 침실 밖으로 펼쳐진 세상은 어둡고 어두워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언제 느껴도 기분 나쁜 어둠이야.’
끝없는 심연 속, 울음 섞인 환상이 내게 손을 뻗었다.
[살려 줘, 안데트르!]
[도와줘. 이리로 와. 나를 도와줘…….]
익숙한 비명을 무시하고 더 깊은 어둠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기를 몇 분. 끝이 보이지 않는 시야의 저 너머, 첫 번째 피해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크윈이었다.
“안녕, 볼크윈.”
멍하니 선 볼크윈 옆에는 낯선 중년의 부부가 서 있었다.
내 존재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볼크윈을 노려보는 두 남녀의 시선에는 못마땅한 감정이 그득했다.
이 둘은 볼크윈의 환각이다.
환각이 그에게 윽박질렀다.
[볼크윈, 너는 사내 녀석이 어찌 그리 대범하지 못하느냐. 우리 가업의 미래가 네 결혼에 달렸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게냐?]
[네가 소심하고 숫기 없어서 귀부인들의 눈에 들지 못하는 것 아니니? 이 고모가 너와 연결시켜 준 그 아가씨는 무려 자작 가문의 외동딸이었는데! 가문의 복을 네가 걷어찼어!]
볼크윈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나름대로 노력했…….”
[시끄럽다! 노력은 네가 근본 모를 놈들을 끌고 다니는 데 쏟고 있지 않느냐? 펜 로타 사교계 인맥을 가꿔도 모자랄 시간에 자꾸 밖을 나도니 이런 꼴이 나는 게야!]
[네 아버지 말이 맞다, 볼크윈. 반성하렴. 시장에 나뒹구는 잡상인들의 자식 놈들을 가르치다니. 그게 우리 가문의 후계자인 네가 할 일이니?]
[너는 당분간 외출 금지다!]
볼크윈은 이를 악물며 숨을 삼켰다.
“그들은 근본 없지 않아요, 아버지. 우리도 그들이랑 똑같아요. 우리 가업도 시장에서 시작한 걸 저도 안단 말입니다…….”
볼크윈의 아버지가 은행장이었던가?
‘흠.’
그의 친부는 더 높은 상류 사회에 진출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아들인 볼크윈을 통해 투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볼크윈의 욕망을 짓밟으면서까지.
[그리고 전부터 말했지만, 예거시 파뉼라와는 계속 연을 잇지 말거라. 친부의 눈 밖에 난 녀석과 뭐 하러 계속 어울려?]
[네 아버지 말이 맞단다. 어울려도 파뉼라 가문의 장남과 어울려야지. 그런 놀기 좋아하는 청년과 어울리면 너도 안 좋은 물이 들 게 분명해.]
‘이 트랩은 타깃의 역린을 건드리는 트랩 같네.’
흔한 수법이다. 역린을 건드리는 행위만큼 정신력에 큰 타격을 주는 환각이 없기 때문이다.
환각이 장기간 지속되면 트랩에서 빠져나와도 며칠은 식물인간처럼 살거나, 모든 질문에 사실만 낱낱이 고하는 최면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그야말로, 다수의 상대를 한 번에 무력화시키기에 최적인 마법이라 할 수 있었다.
정신 마법 트랩은 일종의 보드게임으로 이해하면 쉽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환각을 깨고 출구를 찾으면 트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강력한 환각에 걸린 상태에서는 자의로 출구를 찾는 일이 몹시 어려웠다.
이런 경우 외부에서 트랩으로 진입한 침입자가 도와줘야만 하는데.
“우리 볼크윈은 내가 도와주러 왔네?”
그리고 환각을 깨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건, 역시 물리 행사다.
“미안, 볼크윈. 네 아버지와 고모 좀 칠게.”
미리 사죄를 박고 볼크윈의 환각에 주먹을 꽂았다.
“허헉!”
두 환각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볼크윈이 경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볼크윈의 환각에 나라는 ‘균열’이 생긴 것이다.
“너……!”
“볼크윈, 아버지와 고모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던 볼크윈이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흠. 그러고 보니 내 친구 중에도 가족의 구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녀석이 있었지.”
볼크윈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든 말든 나는 내 할 말을 계속했다.
“그 녀석의 형제는 머릿수만 열이 넘었는데, 형제라는 놈들이 하나같이 내 친구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용해 먹으려 들었거든. 정략결혼 때문에 억지로 만난 남자만 스물이 넘었을 거야.”
“…….”
“아무리 거절해도 형제들은 녀석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어. 녀석이 너무 착했거든. 만만하게 생각한 거지. 그러다 꽤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참다못한 내 친구가 사달을 냈어. 아주, 아주 대단한 사건이었지. 주변이 깜짝 뒤집어지고도 남았어.”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가 은근히 물었다.
“……어떤 사건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