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마차는 미드윈트리 고속 비행정 역으로 향했다.
마도학 기술이 뛰어난 펜 로타 제국에도 고속 비행정 역이 설치된 도시는 드물다.
고속 비행정이란 일종의 이동용 마도구로, 마법사 기장이 셋 이상, 그리고 대량의 정제석으로 운용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티켓 가격은 일반 시민은 엄두도 못 낼 만큼 높다. 값비싼 대신 열차로 나흘은 걸릴 거리를 6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표는 언제 어디서나 모자랐다.
‘예전에는 더 비쌌는데. 그새 가격이 많이 내렸네.’
고작 4년 사이에 기술이 많이 발전했다는 뜻이겠지.
“……잠깐.”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나는 마부(당연히 집사 암살자다)에게 정차를 요청했다.
나는 루가 『어린이를 위한 대륙 7대 미스터리 보물 편』에 집중할 동안 잠시 하차했다.
어슴푸레한 새벽부터 골목에 출근한 감자 노인이 자리를 펴고 있었다.
나는 바구니 안의 감자를 정리하기 바쁜 노인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요구했다.
“감자 전부 최고가에 매입.”
오늘은 내 첫 봉급이 지급된 날이자, 웨더우즈 자작을 위한 거액의 품위 유지비를 챙겨 받은 날이었으니까.
벼룩의 간도 없는 집안에서 어떻게 이런 큰돈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줬으니 마음껏 써 주는 게 도리.’
실눈을 뜬 채 내 얼굴을 살피던 노인이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반겼다.
“으응? 아이고, 우리 아가씨 왔어? 잘 왔어, 잘 왔어. 요즘 감자 질이 괜찮아.”
“…….”
“아! 혹시 그쪽이 진짜 얼굴인가? 어느 쪽이 진짜든 잘생기고 예쁘구먼. 사람이 정말 참해. 인기도 많겠어.”
“……어떻게 알았어?”
솔직히 크게 당황했다.
설마 싶어서 얼굴과 머리칼을 매만졌지만, 웨더우즈 자작의 얼굴 그대로였다.
지금의 나는 데이지 파거가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느냐니?”
“내가 나인 거. 생긴 게 다르잖아.”
그런데 노인은 대체 무슨 근거로 나를 알아본 걸까?
허허롭게 웃은 노인이 따스한 눈으로 대답했다.
“나는 항상 이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구경하곤 하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다니는지 모를 게야. 그리고 사람은 걸음걸이가 다 다르다네. 성별마다, 직업마다, 성격마다, 앓는 병마다 제각각이지.”
걸음걸이 하나로 날 알아봤다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루도 검사로서의 내 습관들을 지적했었지.’
습관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새겨지는 거였나.
나는 운이 정말 좋아.
둘 덕분에 귀족회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깨달았다.
‘걸음걸이와 왼손잡이 검사로서의 습관. 이 둘만 조심하면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이 제아무리 눈썰미가 좋다 한들 나를 못 알아볼 거야.’
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귀족회에 참석하는 게 아니었다.
올해 귀족회에 라파엘로가 불참한다는 건 분명한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검성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이 참석하는 이상,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검성은 소드 마스터다.
소드 마스터 정도 되는 경지에 오르면 육감의 예민도가 오감을 웃돌므로, 육체가 아닌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육감은 기본적으로 경험과 통찰에 의해 단련되는 감각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행동하든, 검성은 필시 내게서 ‘낯선 익숙함’을 느낄 것이다. 이는 내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자잘한 습관이라도 반드시 가려야 해.’
왼손잡이 검사는 드물다. 명가의 검술이 모두 오른손잡이 검술이기 때문에, 왼손잡이 검사는 죄다 오른손잡이로 교정받았다.
하지만 나는 스승이 없고, 명가의 검술도 전수받지 않았기에 오른손잡이로 교정하지 않았다.
‘조심하자.’
마음을 다잡고 다시 감자 노인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노인의 감자를 전부 사 버릴 의도였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걸음걸이로 사람을 구분할 정도의 눈썰미를 지닌 사람은 드물다. 만약 이 눈썰미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면…….
“할머니. 혹시 부업 뛸 생각 있어?”
우리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나는 감자 노인과 부업에 관해 논의한 후 마차로 돌아왔다.
감자는 전량 매입하지 않았다.
노인이 미드윈트리 시장을 감시하는 ‘부업’을 계속하려면, 바구니에는 항상 감자가 채워져 있어야 할 테니까.
“이동.”
나는 역에서 내리기 직전, 마차에서 작성해 둔 쪽지를 집사 암살자에게 넘겼다.
모자 아래의 청회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내게 은밀히 부탁한 사안을 잊지 않았다.
더불어, 그라면 감자 노인의 눈썰미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그에 알맞은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루를 태운 고속 비행정이 미드윈트리 상공에 떠올랐다.
웨더우즈 자작 부부가 긴 칩거를 깨고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펜 로타 제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제도 라갈.
펜 로타 제국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펜강을, 남쪽으로는 로타 평원을 낀 대도시.
지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펜 로타 제국이란 국명은 이 펜강과 로타 평원에서 기인했다.
평지에 자리한 라갈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위용이 엄청나다. 황성을 중심으로 날개 펼치듯 펼쳐져 있는 대도시의 풍경은 마치 거대한 미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라갈 중심부에 진주처럼 박힌 황성을 응시하며 옛 감상에 젖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성했던 날이…… 벌써 9년 전인가?’
그날은 펜 로타 황실에서 이동용 고속 비행정을 처음으로 선보였던 날이기도 했다.
나는 전선에서 12시간을 날아 황성에 도착했다. 전우인 나타샤의 황태녀 책봉식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나타샤 밀리오르그 펜 로타.
마법사의 핏줄이라 불리는 펜 로타 황실의 일원답게, 나타샤는 마도 전쟁에서 큰 명성을 떨치는 훌륭한 전투 마법사였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황태녀 책봉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시골 촌구석에서 자란 나에게는 그마저도 눈이 시릴 만큼 화려하게 느껴졌지만.
그러나 이날은 사람들에게 ‘나타샤 황태녀 책봉식’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안데르트.”
아직도 선명했다.
그날은 새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지.
기다란 레드 카펫의 끄트머리, 황제로부터 후계자의 작은 로타 홀을 건네받은 나타샤가 뒤로 물러선 즉시 내게 다가와 물었다.
“황태녀가 된 나를 위해서, 어떠한 선물이든 바칠 수 있다 했었지?”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으나, 나타샤에게도 다 뜻이 있을 거라 여겼다.
나는 전장의 흙먼지가 아닌, 황위 후계자로서의 고고한 기품을 품은 나타샤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황태녀 전하. 별을 따 오는 정도의 고난만 아니라면야 그 무엇이든 구해 바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결혼해 다오.”
잠깐만.
“……뭐?”
“안데르트 파거.”
그녀는 무릎 꿇은 내 앞에 마주 무릎을 꿇으며 고백했다.
“네가 별을 따 오라면 따 오겠다. 나의 비이자 다가올 미래, 펜 로타 제국의 국부가 되어 다오. 내 일평생을 바쳐 너를 지키고 아끼겠다.”
그날.
나타샤 황태녀 책봉식은 책봉식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눈앞에서, 펜 로타의 새로운 황위 후계자가, 한낱 평민에게 절절히 구애한 날로 각인되었다면 모를까.
하하하.
하하.
‘나타샤는…… 참 재밌는 친구였지.’
하지만 두 달 전, 퀸 섬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펜 로타 제국 황위는 나타샤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이따금 나타샤의 수려한 얼굴이 떠올랐으나, 생사 확인 그 이상의 족적은 알아보지 않았다.
살아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으니까.
“자기.”
차갑고 부드러운 살결이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흠칫 놀라 몸이 굳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깍지 낀 채 내 팔에 얼굴을 기댄 루가 나른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표정이 안 좋아.”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됐나?”
“긴장을? 자기가?”
낮게 웃은 루가 선잠이라도 들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법 귀여운 거짓말이었어.”
나는 못 들은 척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속 비행정이 천천히 강하하면서, 라갈의 풍경이 단숨에 가까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땅을 밟았다.
제국의 수도답게 라갈은 고속 비행정 역에서부터 붐볐다.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게이트를 나오자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두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루의 미모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란 그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웨, 웨더우즈 자작 내외분 맞으십니까? 블랙라갈호로 모시러 왔습니다.”
내가 웨더우즈 자작이야.
날 보고 말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