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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242화 (241/242)
  • 242화

    그리엄은 콜린 하이클레어의 저택 앞에 멀거니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 시녀의 말대로라면…….’

    정말로 이곳에 살아남은 왕녀를 보필하던 기사가 머무르고 있단 말인가.

    만일 그가 왕녀를 탈출시켰고, 이곳으로 망명한 것이 사실이라면 로헨의 왕녀는 어쩌다 성녀가 되어 제국 황궁에 머무르고 있단 말인가.

    그가 들은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리고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왕녀의 정체를 알면서도 어째서 황제에게 맡긴 거지?’

    그 어린 왕녀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만일 그녀가 그토록 대단한 신성력을 타고났더라면 로헨 왕실에서도 그리 방치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이 신의 기적을 목격했다고 했어.’

    성물의 힘을 끌어내고, 제국을 덮은 재앙을 물리쳤다고.

    두 눈을 반짝이며 성녀의 위대함을 늘어놓던 사람들을 떠올린 그리엄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엄 경이시군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리엄이 움찔했다.

    정문 안쪽에서 필립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급히 달려왔던 전장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그의 외모는, 뒤로 보이는 정원을 배경으로 삼아 한 폭의 그림처럼 상대를 멍하게 만들었다.

    빙긋 웃은 필립이 살갑게 말을 건넸다.

    “설마하니 저택을 찾아 주실 줄은 몰랐군요.”

    “저는…….”

    “굳이 이곳까지 걸음을 하신 것을 보면 분명 저나 아버님께 볼일이 있으실 테지요. 들어오셔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고민은 짧았다.

    머뭇거리던 그리엄이 결심을 마친 듯 입을 열었다.

    “이곳에 로헨 왕국의 기사가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온화한 얼굴로 방문자를 바라보고 있던 필립은, 느닷없이 던져진 물음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다니 놀라운 일이군요.”

    느릿한 목소리에 애가 탄 그리엄이 필립을 향해 다그치듯 말했다.

    “공자께 묻겠소. 일찍이 왕녀와 접촉한 적이 있었기에, 로헨의 생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놀라지 않았던 것 아니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왕녀를 사칭해 우리를 규합한 것도 모두 영애의 계획 같소만!”

    “…….”

    “도대체 어째서 로헨 왕실의 마지막 핏줄을 제국의 황제에게 가져다 바친 거요? 설마하니 후작 영애는 우리 로헨을……!”

    “경.”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온화하기 그지없던 필립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서늘한 눈을 마주한 순간 그리엄의 말문이 턱, 막혔다.

    “탁 트인 곳에서 떠들 만한 이야기는 아니로군요. 경이 테아를 그렇게 언급하는 것도 제게는 기껍지 않은 일이고요.”

    그리엄은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쥔 채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 정말로 로헨의 기사가 머물고 있소?”

    “그는 어린 딸이 로헨 국경 근처에서 벌어진 ‘수상한 의식’에 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며 테아에게 애원했지요. 제발 딸을 구해 달라고.”

    “…….”

    “필사적인 그의 매달림에 테아는, 아이를 향한 아비의 부정(父情)을 가엾게 여겨 거두어 주었습니다만.”

    필립의 말에 그리엄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로헨 왕국의 기사라는 사실은,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스스로 밝히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고?

    모르고서 그 두 사람을 거두어 그저 호의적으로 대했을 뿐이라고?

    도로테아와 막역한 사이였던 발레리 제르망은 죄를 짓고 추방되자마자 스스로를 로헨의 왕녀라 칭하며 생존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 모든 것이 우연이었을 리가 없었다.

    “원한다면, ‘주드’를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필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의아한 얼굴로 필립의 부름에 응해 다가오던 남자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대를 보고 멈칫했다.

    이윽고 서로를 인식한 전(前) 로헨의 신하 둘은 경악에 물들었다.

    “아무래도 긴 대화가 필요하겠군요.”

    필립이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둘을 향해 권했다.

    “응접실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대화를 나누실 수 있게끔.”

    “…….”

    “…….”

    석상처럼 굳은 남자들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을 걸어도 답이 없는 이들을 흘끗, 보던 필립이 어깨를 으쓱했다.

    *   *   *

    그 무렵, 도로테아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프란체스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도는 몹시 생경한 눈으로 이쪽을 훑고 있었다.

    그에게 붙여진 수많은 흉악한 호(號)들을 생각해 본다면, 성흔의 소유자인 그가 평소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날뛰었을지 보지 않아도 선했다.

    그뿐이랴.

    자신과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는 실력자들은 전 대륙을 뒤져도 별로 없으니, 오만하게 상대들을 짓밟고 다닌 적은 있었어도 본인이 이토록 짓밟힌 것은 처음이리라.

    “소리를 질러 도움을 구하지 않는 점은 훌륭하구나.”

    그랬더라면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좀 더 패 줄 생각이었는데.

    일부러 쳐 둔 결계가 무색할 만큼 사도는 얌전히 누워 있었다.

    탁하던 동공이 점차 선명해지고, 앙다물려졌던 입이 벙긋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입을 닫아 두었던가?”

    사내 놈의 비명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아 봉했던 것도 같고.

    도로테아는 프란체스코의 목 위로 손을 얹고 알 수 없는 말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큭!”

    잠겨 있던 목이 열리면서 느껴지는 익숙지 않은 감각 탓인지 프란체스코의 몸이 움찔했다.

    동시에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건지 커다란 덩치가 들썩였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걸. 일부러 속을 진탕으로 만들었거든.”

    “…….”

    “지금 네 상태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조금’ 더 심각해.”

    겉가죽이라도 그럭저럭 멀쩡하게 붙여 두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던지.

    그의 가죽이 얼마나 너덜너덜해지든, 딱히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힐데가 충격이라도 받으면 곤란한 일이 아닌가.

    “그나마 나니까 이렇게 감쪽같이 속만 뒤틀어 놓았지.”

    자랑이라도 하듯 싱글거리는 소녀를 바라보는 프란체스코의 눈이 서늘한 예기를 띠었다.

    그러나 도로테아가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얼쩡거리고 있어도,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맹목적이긴 해도 멍청하진 않으니까.’

    적당히 봐주는 대신 궁이 반파되는 것조차 감수하고 제대로 손을 쓴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만만하게 보였다가는, 아주 조금의 승기라도 엿보인다 싶으면 눈이 뒤집힌 채 죽을 때까지 덤벼들 인간이란 말이지.

    침대 끝에 가볍게 걸터앉은 도로테아가 다리를 달랑거리며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을 줄만 알았는데. 기껏 목소리를 내게 해 주었는데도 말이 없구나.”

    “너.”

    “…….”

    “그 눈.”

    역시 신의 사도라는 건가.

    신의 흔적이라는 성흔을 지니고 태어난 값은 하는 것인지 꽤 감이 좋다고 해야 할까.

    “제법이네. 다른 이들은 수차례의 단서를 주어야 겨우 알아맞히던데.”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 그런 불쾌감을 느낀 것은 생애 고작 두 번뿐이니까.”

    “…….”

    “그리고 너는 첫 번째와는 조금 달라.”

    “다르다니. 어떻게?”

    “그자가 ‘옳지 않은 것’이라면, 너는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해야 할까.”

    잘못된 방향이나 비틀어진 것과는 달랐다.

    이질적이고, 섞일 수 없고,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계속 뇌리를 울리고 있었다.

    프란체스코의 말에 도로테아의 눈이 활처럼 휘었다.

    “나와 같은 존재를 만나 본 적도 없다면서 꽤 제대로 구분하는구나.”

    그가 본질을 볼 줄 안다는 증거였다.

    마치 신기한 물건이라도 구경하듯, 턱을 괸 채 프란체스코를 빤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나를 불길한 존재. 존재해서는 안 될 인간이라고 여겼지. 그렇기에 나를 이단으로 몰아세웠고.”

    꽤 조잡한 공격이었지만, 제국의 귀족인 내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 후에 이래저래 신경 쓸 것들이 많은 탓이었을까. 내가 놓친 것들이 몇 가지 있더라고.”

    “…….”

    “우리가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휴전한 사이 꽤 많은 일이 있었지. 어쩌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필립과 윌리엄은 줄곧 너를 주시하고 있었어.”

    네가 혹, 성녀를 강제로라도 성국에 데려갈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까, 하고.

    프란체스코는 낯선 모습의 도로테아가 말을 건네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처음 재앙이라는 이름으로 일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혼란에 빠졌어. 죽어야 할 사람들이 살아나 움직이니 어찌 공포스럽지 않겠어.”

    “…….”

    ”때마침 필립은 부재중에, 유감스럽게도 윌리엄에겐 너를 막을 만한 수완이 없지. 네가 원한다면 힐데를 성국으로 데려가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는 거야.”

    프란체스코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성물이 그녀에게 반응했고, 그녀의 기도에 신이 응답했다.

    힐데가르트는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성녀가 분명했다.

    “그런 순간에조차도, 너는 그 아이를 성국으로 데려가는 대신 이곳에 남아 있었어.”

    “…….”

    “그건 어쩌면 성국 내에 ‘성녀’를 위협할 만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잖아. 그 아이는 신의 기적을 보였던 성녀인걸. 신을 경배하는 국가에서 성녀가 위험할 수 있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도로테아의 조잘거림에도 성국의 사도는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아무런 할 말도 없다는 듯 꾹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끝끝내 침묵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 불쾌감을 느낀 건…… 내가 두 번째라고 했었지.”

    내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그 무언가라면, 또 다른 인물은 ‘옳지 않은 것’…… 이라고.

    도로테아는 프란체스코의 말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이 세계에 속한 혼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이질감을 느꼈을 테지.

    그리고 옳지 않음이란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망가뜨리고 경계를 허무는 존재.”

    클라이브가 움직이려면 가장 견제해야 할 세력은 제국이 아니었다.

    자신과 상극의 힘을 다루는, ‘신의 종’들이 머무는 성국이겠지.

    그러니 그가 제국에까지 손을 댔을 때에는 이미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뜻일 테고.

    “그 옳지 않은 누군가를 좀 만나야겠구나. 내가.”

    도로테아의 요구에 프란체스코는 답하지 않은 채 시선을 틀었다.

    은근한 거절의 의미라는 것을 눈치챈 소녀는 잠깐의 침묵 끝에 선심 쓰듯 조건을 더했다.

    “모든 거래는 서로 필요한 게 교환되어야 하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면 나 또한 네게 적절한 대가를 줄 수 있어.”

    은근한 목소리에 프란체스코의 눈이 슬쩍 그녀를 향했다.

    “네가 안내자를 자처하여 그곳까지 나를 데려가 준다면 나는 네 목숨을 구해 줄게.”

    “…….”

    “네 숨이 지금, 딱 끊기기 일보직전이거든.”

    소녀는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얼굴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니면 좀 더 일찍 신을 뵈러 갈 수도 있을 거고.”

    이참에 네가 거추장스러운 육신 따위는 훌훌 벗어던지고 그렇게나 경애하던 신을 만나러 가는 걸 선택한다고 한들 난 이해할 수 있단다.

    어느 쪽이든, 내가 손수 도와줄 테니 말만 하려무나.

    *   *   *

    우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눈이 충혈되도록 노려보고 있는 우드의 기세에 양옆에 서 있던 성기사들도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앉아서 기다리시오. 앉아서.”

    “그리 노려보고 있는다고 좀 더 일찍 나오는 것도 아니잖소.”

    “거, 어차피 사도께 말을 전하고 나오는 것뿐인데 뭘 그리…….”

    “그게 문제인 겁니다.”

    우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기사들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

    “너무 조용하잖습니까.”

    “조용한 것이야 사도께서 잠들어 계실 테니, 그 곁에 앉아 성녀님의 기도를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럴 리 없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다른 이를 위해 기도를 한다고?

    차라리 저주를 한다면 이해나 갈까.

    물론 그조차도 귀찮다며 하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겠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내 경험상, 밀실에서, 이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면 사고를 치고도 남았을 상황이야.’

    그런데도 조용한 것을 보면 보통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설마하니 사도를 손봐 준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등을 타고 오르던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끼이이, 열린 문 사이로 쏙 빠져나온 소녀가 볼우물이 패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성기사들이 우드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내 뭐라 했소. 별일도 없는데 유난은.”

    “별일이 있긴 해요.”

    도로테아가 불쑥 꺼낸 말에 성기사들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기적이, 일어났거든요.”

    그렇게 말한 소녀는 살짝 열려 있던 문을 활짝 열어, 방 안의 풍경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아늑한 분위기의 방 안을 보니 분명 소녀가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몸져누워 있던 사도가, 멀쩡한 얼굴로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도로테아는 뜻밖의 광경에 넋이 나간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성녀님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을 사도님의 귀에 속삭여 드렸을 뿐인데.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도님께서 벌떡 일어나시지 뭐예요.”

    아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건넨 설명에 입을 벌리고 있던 성기사들이 서둘러 성호를 그으며 눈앞의 기적에 눈을 감았다.

    성기사들이 감사의 기도를 웅얼거리는 사이, 프란체스코는 기적을 겪은 사람치고는 담담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와 성기사들을 지나쳤다.

    멀쩡한 그의 모습에 놀란 것은 우드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궁이 반파될 정도의 격렬한 싸움이 아니었던가.

    내상을 입어 언제 깨어나는지, 그 시기조차 가늠할 수 없다던 사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회복되어 있었다.

    “어떻게 한 거냐?”

    “기적을 목격했다니까.”

    설명 대신 짤막한 답을 남긴 도로테아가 성큼성큼 걷는 프란체스코의 뒤를 따랐다.

    우드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 두 사람이 향하는 곳으로 함께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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